-
-
양만리시선 - 송대편 311 ㅣ 중국시인총서(문이재) 311
원종례 지음 / 문이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閑居初夏午睡起(한거초하오수기 : 한가로운 초여름 낮잠자고 일어나다.)
양만리(楊萬里.1127~1206)
梅子留酸軟齒牙 (매자유산연치아) 매실은 신맛을 남겨 치아를 무르게 하고
芭蕉分綠與窓紗 (파초분록여창사) 파초는 초록빛을 나누어 비단 창을 물들인다.
日長睡起無情思 (일장수기무정사) 해가 길어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무료하여
閑看兒童捉柳花 (한간아동착류화) 아이들이 버드나무꽃을 잡는 것을 한가롭게 바라본다.
<해 설>
제목 그대로 한가로운 초여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의 느낌을 적은 시다.
매실은 예나 지금이나 숙취를 해소하는데 좋다. 지금이야 즙이나 주스를 많이 마시지만, 당시에는 끓여서 차로 마셨을 것이다. 아마 작자는 간밤에 술을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침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름의 해장법으로 오전을 넘겼는데 점심을 먹고 나서도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입맛이 없는 채로 점심을 때운 작자는 여전히 숙취가 가라앉지 않자, 지끈지끈한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고 매실차를 마셨겠다. 그러고는 몰려드는 피로와 낮잠의 유혹에 빠져 잠시 오수를 즐기고 깨어났는데 매실의 신맛이 여전히 입안에 남아 이가 뻐근해지는 것이 아닌가. 신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면 이가 시리고 얼얼해지듯 매실차의 신 기운이 입안에 골고루 퍼져,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이가 뻐근하기도 하고 물러진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한편 시인이 낮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파초는 햇빛을 그득히 받아 그 초록빛이 더욱 진해졌다. 파초는 자신의 진한 초록빛을 주체할 수 없어서 가까이 있는 비단 창을 물들이고 있었다. 낮잠 자는 그 짧은 시간에 마당에서는 색깔의 이동 내지는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물들인다'고 했다. 파초는 그 초록빛을 나눌 줄 알았다. 여유가 있거나 넘치면, 다른 것에게 나누어주거나 흘려보내주는 것이 바로 대자연의 섭리다. 만약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넘친다면, 이렇듯 파초와 같이 나누어 줄 것인가?
긴긴 여름날 낮잠에서 깨어나 나른함에 젖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이 시와 비슷한 분위기에 젖어 보거나, 유사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군에 있을 때 여름 혹서기 한 달 정도는 하루에 한 시간씩,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낮잠을 잘 수 있었다. 물론 그 시간에 보초를 서야 하는 경우는 제외였으니, 당연히 고참들은 근무시간표에서 빠졌고, 졸병들만 그 무더위에 돌아가며 근무를 서느라 애를 먹었다. 처음에는 잠이 안와서 대충 한 시간 무료하게 누워 있다가 일어나곤 했는데 나중에는 점점 그 달콤함을 즐기게 되었다. 어떨 때는 한 시간의 후유증이 커서 오후 내내 무기력증에 빠지기도 했다. 또 당연히 그런 날은 단체 기합을 받기도 했다. 어쨌거나 군 복무 기간을 통틀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 때의 낮잠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요즘 아이들은 아버지 세대에 비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빈곤하기 그지없다. 도회지 아이들은 흙을 밟아보기 힘들고, 예전처럼 골목길에서 구슬치기, 땅따먹기, 축구, 술래잡기,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등을 하며 뛰어 놀지도 않는다. 학교만 다녀오면 수학, 영어, 피아노학원 등을 전전해야 하니 정서적으로 황폐해지기 쉬운 환경이 아닐까.
필자가 어릴 때에는 춥고 배고픈 날이 많았지만 산과들에서 뛰놀며 산딸기,머루, 다래 등을 따먹고, 방학때면 외가에 내려가 참외, 수박 서리도 하고, 냇가에서 멱을 감고 가재를 잡아먹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맨발로 뛰노는 아이들, 건강하고 정서적으로도 풍요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떤가. 부모가 용돈을 넉넉하게 주고, 햄버거나 피자를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지만,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 공간도 마땅치가 않다. 무엇보다 비정상적인 교육열때문에 공부만을 강요받고 있어 노는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만 나면 스마트폰, 컴퓨터, 게임기에 빠져 밀폐된 공간에서만 살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다가올 미래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필자만의 과민함인가!
<죽기 전에 읽어야 할 한시 99편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