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마고우 오성과 한음 - 빛나는 우정과 넘치는 해학으로 역사가 되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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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치다 보면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가끔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우정을 다진다. 세상이 변해도 믿을 만한 친구가 있다면 인생의 든든한 후원자를 둔 것이요 큰 자산임에 틀림없다. 포도주와 우정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친구간의 신뢰가 날로 엷어져만 가는 염량세태에, 역사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우정 사례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고귀한 사귐을 교우관계의 밑거름으로 삼았으면 싶다.

 

管鮑之交 (관포지교 :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

관중(BC725~BC645)과 포숙은 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親舊) 사이였다. 어려서부터 포숙아는 관중의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관중은 포숙아를 이해하고 불평 한마디 없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벼슬길에 올라 관중은 공자(公子) ()를 섬기게 되고 포숙아는 규의 아우 소백(小白)을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두 공자는 왕위를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하게 되어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적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소백이 승리했다.

 

그는 제나라의 새 군주가 되어 환공(桓公)이라 일컫고, 형 규를 죽이고 그 측근이었던 관중도 죽이려 했다. 그때 포숙아가 환공에게 진언했다. "관중의 재능은 신보다 몇 갑절 낫습니다. 제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天下)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관중을 기용하셔야 하옵니다."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政事)를 맡겼다. 재상(宰相)이 된 관중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마음껏 수완을 발휘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했다.

 

성공한 후 관중은 포숙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내가 젊고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면서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에게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 번씩 벼슬에 나갔으나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래도 그는 나를 무능(無能)하다고 흉보지 않았다. 내게 아직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쳐 온 적도 있으나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공자 규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하여 동료 소홀(召忽)은 싸움에서 죽고 나는 묶이는 치욕을 당했지만 그는 나를 염치없다고 비웃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기 보다 공명을 천하(天下)에 알리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刎頸之交 (문경지교 :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귐)

전국시대(戰國時代 : BC403~BC221) ()의 혜문왕(惠文王: 재위 BC298~BC266) 때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큰공을 세웠지만 환관 무현(武賢)의 식객에 불과했던 인상여를 경대부(卿大夫)에 임명하자 염파는 불만이 대단했다. 그래서 인상여를 만나면 망신을 주리라 생각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니 부하들이"왜 그렇게 염장군을 두려워합니까?"라고 물으니 인상여가"()나라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염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둘이 서로 헐뜯고 싸운다면 나라가 위태(危殆)로워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염파는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염파가 옷을 벗어 살을 드러내고 곤장을 지고 인상여의 집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하기를 "비천한 사람이 장군의 너그러움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했다." 라고 했다. 마침내 인상여와 염파가 문경지우가 되었다.

 

水魚之交 (수어지교 : 물과 물고기의 사귐)

삼국시대(220~280) , (:220~265)나라 조조(曹操)는 강북의 땅을 평정(平定)하고 오(:229~280)나라 손권(孫權)은 강동의 땅에 의거하여 각각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촉(:221~263)의 유비는 확실한 근거지를 확보(確保)하지 못한 상태였다.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 등의 용장은 있었지만 모사(謀士)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을 군사로 맞이할 수 있었으니 유비의 기쁨은 대단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제압해 근거지로 삼을 것, 서쪽은 융()과 화목하고, 남쪽은 월()을 회유해 후환을 없앨 것, 정치(政治)를 고르게 하여 부국강병의 실을 거둘 것, 손권(孫權)과 손잡아 조조를 고립시키고, 기회를 보아 조조를 무찌를 것 등을 헌책했다. 유비는 전폭적인 신뢰를 공명에게 쏟고, 군신의 정은 날로 더해 갔다. 관우와 장비는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예인데다가 나이 또한 젊은 공명이 더 중요시(重要視)되고 자신들은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공명은 27세로 유비보다 20세나 연하였다. 이것을 알아챈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달래어 말했다. "나에게 공명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니 두말 없기를 바라노라.“

 

죽마고우 오성과 한음의 우정 이야기 

1592(선조 25)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조선군의 항거를 별로 받지도 않은 채 물밀 듯이 북상하여 수도 한성을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도성을 떠나 평양까지 피란을 왔으나 이곳도 안전치 못하여 다시 북상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왕은 먼저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선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떠나게 한 다음 윤두수와 김명원을 시켜 평양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밤을 타서 신하들을 거느리고 평양을 빠져나와 영변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덕형을 사신으로 삼아 명나라로 들어가 원병을 청해 오게 하였다. 이덕형이 사신으로 떠날 때 그의 친한 친구 이항복이 그를 전송하면서 이번에 만일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는 나의 시체를 용만(龍灣 : 지금의 평북 의주)에서 찾으시오.” 하고 결연한 빛을 띠며 말했다. 그러자 이덕형 역시 결연한 빛으로 아닐세, 만일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대는 나의 시신을 노룡(盧龍 : 명나라 수도)에서 찾도록 하게.” 하면서 비장한 작별을 하였다. 전쟁 중에도 서로를 격려하며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두 신하의 우국충정과 서로간의 우애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 오성(鰲城:1556~1618) 이항복(李恒福)은 여러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에 어려서부터 친구로 자란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죽마고우라는 설도 있음) 그러나 벼슬길에 나선 이후에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두 사람 다 율곡(栗谷)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참여한 사실, 임진왜란 때에 정치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뛰어난 공을 세운 점,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열어 그 유지에 함께 기여하였고, 임해군(臨海君)이 관련된 사건의 처리 및 인목 대비 폐모론과 영창 대군의 처형 등에 대해서 입장을 같이 하는 등 관직 생활에서 거의 평생 동안 동고동락했음을 알 수 있다.

 

당파도 이항복은 율곡의 서인 계열이었고, 이덕형은 퇴계(退溪)의 동인 계열이었지만, 둘 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당쟁에 휩싸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직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벼슬을 교대로 맡았던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이성(李姓)의 삼상(三相)[이덕형·이항복·이원익(李元翼)]으로 불리었다. 이와 같은 평생의 교분으로 한음이 먼저 세상을 뜨자, 오성은 한걸음에 달려가서 손수 염을 하고 장례를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음의 아들이 오성에게 묘지(墓誌)를 청하자, “그대 아버지가 세상에 없으니 나 또한 진심으로 의견을 나눌 친구가 없어지게 되었구나. 나는 한음보다 나이로 치면 조금 위지만 덕이나 재주로 말하면 한참 아래였건만, 세월이 태평할 때는 같이 홍문관에서 학문을 닦았고 전쟁 중에는 서로 바꿔 가며 병조를 맡았었다. 평생을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다가 이렇게 끝을 맺게 되니 비통한 마음뿐이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책을 맡아 가면서 나를 이해해 주는 이는 그대 아버지뿐이었고, 나는 평생 그를 존경하며 따랐으니, 이제 어찌 친구의 행적을 기록해 주지 않으랴.”고 하며 기꺼이 묘지명을 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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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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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말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부지런함(勤)이란 무엇 뜻하겠는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오는 날까지 끌지 말도록 하고 비오는 날 해야 할 일도 맑은 날까지 끌지 말아야 한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하고 어린이는 직접 행동으로 어른의 감독을 실천에 옮기고 젊은이는 힘든 일을 하고 병이 든 사람은 집을 지키고 부인들은 길쌈을 하느라 한밤중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 요컨대 집안의 상하 남녀 간에 단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또 잠깐이라도 노는 시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걸 부지런함이라 한다.

 

검(儉)이란 무얼까? 의복이란 몸을 가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고운 비단으로 된 옷이야 조금이라도 해지면 세상에서 볼품없는 것이 되어버리지만 텁텁하고 값싼 옷감으로 된 옷은 약간 해진다 해도 볼품이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벌의 옷을 만들 때 앞으로 계속 오래 입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서 만들어야 하며, 곱고 아름답게만 만들어 빨리 해지게 해서는 안된다. 이런 생각으로 옷을 만들게 되면 당연히 곱고 아름다운 옷을 만들지 않게 되고, 투박하고 질긴 것을 고르지 않을 사람이 없게 된다.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안으로 들어가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버린다. 삼키기 전에 벌써 사람들은 싫어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것은 정성 때문이니 전혀 속임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늘을 속이면 제일 나쁜 일이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동업자를 속이면 모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속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기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입과 입술을 속여서 잠깐 동안만 지내고 보면 배고픔은 가셔서 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해야만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 된다.

 

금년 여름에 내가 다산에서 지내며 상추로 밥을 싸서 덩이를 삼키고 있을 때 구경하던 옆사람이 "상추로 싸먹는 것과 김치 담가 먹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답해 "그건 사람이 자기 입을 속여 먹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하여 적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맛있고 기름진 음식만을 먹으려고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비할 뿐이다. 이러한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처지를 극복하는 방편만이 아니라, 귀하고 부유하고 복이 많은 사람이나 선비들이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유지해가는 방법도 된다. 근과 검, 이 두 글자 아니고는 손을 댈 곳이 없는 것이니 너희들은 절대로 명심하도록 하라.(1810년 9월에 다산 동암에서 쓰다.)  p.157~159

 

1810년 전후하여 조선 땅에 대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비록 유배지에 묶인 몸이었지만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산은 몸소 체험하고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백성들에게 글로써 근검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다산의 고매한 정신과 인생관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꼿꼿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의 자식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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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체성 - 경복궁에서 세종과 함께 찾는
박석희 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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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창하면서 도읍을 옮기는 일을 논의하였다. 태조의 생각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처럼 고려의 낡은 관행과 폐습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 새 나라를 열고자 하였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요즘 생각해도 만만찮은 일이다. 국가균형발전에 따른 수도 이전 문제로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급기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까지 하는 등 국가적 분란을 초래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수도 이전 문제가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왔는지, 아니 정부종합청사를 세종시로 옮기는 그나마 작은 일 조차도 얼마나 큰 분열을 가져왔는지는 우리가 그동안 직접 목도해서 잘 알 것이다.

 

고려의 토착세력이나 조선의 개국공신들 중에도 일부는 수도 이전을 강력히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태조의 확고부동한 의지로 결국 무학대사가 한양을 궁궐터로 잡고 삼봉 정도전이 조선 궁궐을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1395년에 완성하였다. 경복궁이 완공되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대대적 이사를 하면서 조선은 드디어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처음 조선 궁궐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고 왕의 필요에 따라 새로 지어지기도 하면서 전각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 책은 주로 조선 궁궐의 해설서라 할 수 있을 만큼 궁궐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는데, 특히 ‘경복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실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 조선조 왕들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였기에 경복궁과 관련해서 왕의 치적과 일화를 자세히 다룬다. 태조 때 경복궁에서 왕위계승 문제로 왕자의 난이 일어나 피바람이 불어선지 태종은 경복궁을 꺼려하여 새로 이궁인 창덕궁을 짓고 거기서 거처하였다.

 

경복궁은 조선의 역사와 명운을 함께 했다. 태조의 지시로 정도전이 경복궁이라 명명한 이후 명종(1553)때 실화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고,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노비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궁궐을 불태웠으며, 고종 때(1865) 흥선대원군 주도로 조선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국운을 부흥코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옛 위용을 되찾았지만, 머지않아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다. 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잔혹하게 시해당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정기와 민족성을 말살하고자 1909년 창경궁을 헐고 동물원(1911. 창경원 격하)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1915년에는 경복궁 4000여칸을 헐어 상품진열관 (전시회) 장소로 만들었다. 1916년부터는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광복 50년이 되던 1995년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고 경복궁 복원 사업을 진행하여 본래의 위상과 정체성을 되찾고 있기는 하지만, 경복궁은 조선 개국 이래 600여 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영욕의 세월을 함께했다.

 

경복궁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는 단연 세종 때였다. 세종대왕은 경복궁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릴 정도로 15세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치적이 어찌나 많은지 언급하는 게 중언부언이 되겠지만, 거의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남긴 성군 중의 성군이었다. 청나라 강희제(1654~1722)가 조선 세종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그만큼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한글창제, 조세법 개편, 아악정리,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등 의약서 편찬,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측우기, 2단 로켓포 산화신기전 개발, 세계 최초 온실,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서라 불리는 금화도감 창설 등 모두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업적을 집현전 학사들과 경복궁에서 밤을 새우며 일궜다. 세계 최초 발명이 8가지나 된다니 가히 세계적 성군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필자는 경복궁의 자세한 내력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조선 최고의 임금 세종대왕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치적을 정리하고 그 시대를 조명한다. 그 당시에 부모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돌볼 고아원을 기획하고, 관노비의 출산휴가를 130일(현재 90일)이나 주면서 남편의 출산휴가까지 부여하였으니 왕조시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로지 왕이라는 근엄함 보다는, 어떻게 하면 백성을 좀 더 편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고뇌하는 집념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요즘 회자되는 ‘국민과의 불통’ 화두를 세종은 이미 600년 전 ‘소통’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을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은 세종이었기에 가능했겠지만 그기엔 경복궁이 든든한 밑받침이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수학여행 때나 가끔 들렀던 조선 궁궐에 무지했던 나로선 이 책이 궁궐을 이해하는 충실한 해설서가 되었다.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의 유래와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만춘전, 천추전 등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예술성을 느껴보는 좋은 시간이 되었고, 기회가 되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조선의 왕들이 걸었던 궁궐을 천천히 거닐면서 그 면면을 자세히 살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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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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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도적의 피해를 제거함(除害).

도적이 생기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위에서 위의(威儀)를 바르게 가지지 아니하고, 중간에서 명령을 받들지 아니하며, 아래에서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이 고쳐지지 않으면 도적을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 위의(威儀) : 위엄이 있는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 

 

<하산냉담(霞山冷談)>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갈의거사(葛衣居士)는 남쪽지방의 호걸이었다. 일찍이 쌍교(雙橋)의 장터를 지나다가 군관이 한 도둑을 잡아서 붉은 포승으로 결박하고 종이고깔을 씌우고 손을 뒤로 묶어 가는 것을 만났다. 갈의거사가 느닷없이 앞으로 나서서 도둑의 팔을 잡고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한편 위로하고 한편 ‘원통하다 그대여! 어찌하다 욕을 당하는 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넋두리를 하니,온 장터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겹겹이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군관이 깜짝 놀라 포졸에게 갈의거사도 함께 결박하도록 명령하니, 갈의거사가 ‘자네가 나를 결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 도둑과 한편이라고 결박하는가? 내 말을 들어보고 나서 결박하든지 놓아주든지 하려무나’라고 말했다. 군관이 무엇이냐고 묻자, 거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온갖 도둑이 땅 위에 가득하다. 토지에서는 재결(災結)을 도둑질하고, 호구(戶口)에서는 부세를 도둑질하고. 굶주린 백성 구제에서는 양곡을 도둑질하고, 환곡창고에서는 그 이익을 도둑질하고, 송사에서는 뇌물을 도둑질하고, 도둑에게서는 장물을 도둑질한다. 그런데도 감사와 병수사(兵水使)들은 도둑질하는 자들과 한패거리가 되어 숨겨주고 들추어내지 않는다. 지위가 높을수록 도둑질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녹봉이 후할수록 도둑질의 욕심은 더욱 커진다. 그러고서도 행차할 적엔 깃발을 세우고 머무를 적에는 장막을 드리우며, 푸른 도포에 붉은 실띠의 치장도 선명하게 하여 종심토록 향락하여도 누가 감히 뭐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유독 이 굶다굶다 좀도둑질 좀 한 사람이 이런 큰 욕을 당하게 되니 슬프지 아니한가? 내가 이래서 통곡을 하는 것이지 다른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군관은 ‘허!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는 술을 대접하고 놓아 보냈다. P.276~277.

 

위 글을 읽고,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어찌 요즘의 세태와 이렇듯 비슷한 지 탄복을 금치 못하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비리 냄새로 천지가 진동한다. 4대강, 자원외교, 방탄비리(防彈非理), 측근 비리, 국회의원 뇌물비리까지... 어떤 것 하나 시원하게 제대로 해결되지도 않고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흐지부지 종결되는 것을 보면 200년 전 다산의 안목은 실로 대단하다 할 만하다. 대기업 총수나 권력을 가진 자는 죄를 지어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훔친 좀도둑은 오늘날도 징역을 사는 것을 보면 갈의거사의 말씀이 이 시대에도 그대로 통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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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 컬러링북 시리즈
이재은 지음 / 작은책방(해든아침)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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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떠올리며 색칠을 하다보면 아이들의 순수한 감성이 살아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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