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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마고우 오성과 한음 - 빛나는 우정과 넘치는 해학으로 역사가 되다
이한 지음 / 청아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치다 보면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가끔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우정을 다진다. 세상이 변해도 믿을 만한 친구가 있다면 인생의 든든한 후원자를 둔 것이요 큰 자산임에 틀림없다. 포도주와 우정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친구간의 신뢰가 날로 엷어져만 가는 염량세태에, 역사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우정 사례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고귀한 사귐을 교우관계의 밑거름으로 삼았으면 싶다.
管鮑之交 (관포지교 :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
관중(BC725~BC645)과 포숙은 죽마고우로 둘도 없는 친구(親舊) 사이였다. 어려서부터 포숙아는 관중의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관중은 포숙아를 이해하고 불평 한마디 없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벼슬길에 올라 관중은 공자(公子) 규(糾)를 섬기게 되고 포숙아는 규의 아우 소백(小白)을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두 공자는 왕위를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하게 되어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적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소백이 승리했다.
그는 제나라의 새 군주가 되어 환공(桓公)이라 일컫고, 형 규를 죽이고 그 측근이었던 관중도 죽이려 했다. 그때 포숙아가 환공에게 진언했다. "관중의 재능은 신보다 몇 갑절 낫습니다. 제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으로도 충분합니다만 천하(天下)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관중을 기용하셔야 하옵니다."환공은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政事)를 맡겼다. 재상(宰相)이 된 관중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마음껏 수완을 발휘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했다.
성공한 후 관중은 포숙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내가 젊고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면서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에게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몇 번씩 벼슬에 나갔으나 그때마다 쫓겨났다. 그래도 그는 나를 무능(無能)하다고 흉보지 않았다. 내게 아직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쳐 온 적도 있으나 그는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공자 규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하여 동료 소홀(召忽)은 싸움에서 죽고 나는 묶이는 치욕을 당했지만 그는 나를 염치없다고 비웃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기 보다 공명을 천하(天下)에 알리지 못함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다."
刎頸之交 (문경지교 :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귐)
전국시대(戰國時代 : BC403~BC221) 趙(조)의 혜문왕(惠文王: 재위 BC298~BC266) 때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큰공을 세웠지만 환관 무현(武賢)의 식객에 불과했던 인상여를 경대부(卿大夫)에 임명하자 염파는 불만이 대단했다. 그래서 인상여를 만나면 망신을 주리라 생각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니 부하들이"왜 그렇게 염장군을 두려워합니까?"라고 물으니 인상여가"진(秦)나라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염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둘이 서로 헐뜯고 싸운다면 나라가 위태(危殆)로워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염파는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염파가 옷을 벗어 살을 드러내고 곤장을 지고 인상여의 집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하기를 "비천한 사람이 장군의 너그러움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했다." 라고 했다. 마침내 인상여와 염파가 문경지우가 되었다.
水魚之交 (수어지교 : 물과 물고기의 사귐)
삼국시대(220~280) 때, 위(魏:220~265)나라 조조(曹操)는 강북의 땅을 평정(平定)하고 오(吳:229~280)나라 손권(孫權)은 강동의 땅에 의거하여 각각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촉(蜀:221~263)의 유비는 확실한 근거지를 확보(確保)하지 못한 상태였다.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 등의 용장은 있었지만 모사(謀士)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을 군사로 맞이할 수 있었으니 유비의 기쁨은 대단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제압해 근거지로 삼을 것, 서쪽은 융(戎)과 화목하고, 남쪽은 월(越)을 회유해 후환을 없앨 것, 정치(政治)를 고르게 하여 부국강병의 실을 거둘 것, 손권(孫權)과 손잡아 조조를 고립시키고, 기회를 보아 조조를 무찌를 것 등을 헌책했다. 유비는 전폭적인 신뢰를 공명에게 쏟고, 군신의 정은 날로 더해 갔다. 관우와 장비는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예인데다가 나이 또한 젊은 공명이 더 중요시(重要視)되고 자신들은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공명은 27세로 유비보다 20세나 연하였다. 이것을 알아챈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달래어 말했다. "나에게 공명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니 두말 없기를 바라노라.“
죽마고우 오성과 한음의 우정 이야기
1592년(선조 25)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조선군의 항거를 별로 받지도 않은 채 물밀 듯이 북상하여 수도 한성을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도성을 떠나 평양까지 피란을 왔으나 이곳도 안전치 못하여 다시 북상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왕은 먼저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선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떠나게 한 다음 윤두수와 김명원을 시켜 평양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밤을 타서 신하들을 거느리고 평양을 빠져나와 영변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덕형을 사신으로 삼아 명나라로 들어가 원병을 청해 오게 하였다. 이덕형이 사신으로 떠날 때 그의 친한 친구 이항복이 그를 전송하면서 “이번에 만일 명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으면 그대는 나의 시체를 용만(龍灣 : 지금의 평북 의주)에서 찾으시오.” 하고 결연한 빛을 띠며 말했다. 그러자 이덕형 역시 결연한 빛으로 “아닐세, 만일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대는 나의 시신을 노룡(盧龍 : 명나라 수도)에서 찾도록 하게.” 하면서 비장한 작별을 하였다. 전쟁 중에도 서로를 격려하며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두 신하의 우국충정과 서로간의 우애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과 오성(鰲城:1556~1618) 이항복(李恒福)은 여러 자료를 살펴보았을 때에 어려서부터 친구로 자란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죽마고우라는 설도 있음) 그러나 벼슬길에 나선 이후에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두 사람 다 율곡(栗谷)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참여한 사실, 임진왜란 때에 정치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뛰어난 공을 세운 점,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를 열어 그 유지에 함께 기여하였고, 임해군(臨海君)이 관련된 사건의 처리 및 인목 대비 폐모론과 영창 대군의 처형 등에 대해서 입장을 같이 하는 등 관직 생활에서 거의 평생 동안 동고동락했음을 알 수 있다.
당파도 이항복은 율곡의 서인 계열이었고, 이덕형은 퇴계(退溪)의 동인 계열이었지만, 둘 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당쟁에 휩싸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직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벼슬을 교대로 맡았던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이성(李姓)의 삼상(三相)[이덕형·이항복·이원익(李元翼)]으로 불리었다. 이와 같은 평생의 교분으로 한음이 먼저 세상을 뜨자, 오성은 한걸음에 달려가서 손수 염을 하고 장례를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한음의 아들이 오성에게 묘지(墓誌)를 청하자, “그대 아버지가 세상에 없으니 나 또한 진심으로 의견을 나눌 친구가 없어지게 되었구나. 나는 한음보다 나이로 치면 조금 위지만 덕이나 재주로 말하면 한참 아래였건만, 세월이 태평할 때는 같이 홍문관에서 학문을 닦았고 전쟁 중에는 서로 바꿔 가며 병조를 맡았었다. 평생을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다가 이렇게 끝을 맺게 되니 비통한 마음뿐이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책을 맡아 가면서 나를 이해해 주는 이는 그대 아버지뿐이었고, 나는 평생 그를 존경하며 따랐으니, 이제 어찌 친구의 행적을 기록해 주지 않으랴.”고 하며 기꺼이 묘지명을 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