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벼 타작>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이 놀이가 되는 삶은 얼마나 복된가. 단원 김홍도가 그린 <벼 타작>은 보람찬 대동사회의 바탕이 선하다. 삼복의 땡볕 아래 여문 나락은 옹글고, 거두는 자의 기쁨은 푸지다. 알곡을 터는 농군의 일머리가 손에 잡히고 가을걷이의 성취감이 벅차게 드러난다. 노역의 고단함이 사라진 자리에 일손 놀리는 신명이 절로 피어난다.

 

일감을 나눈 사람들의 낯빛이 어떤가. 하나같이 웃는다. 지게를 진 맨상투 사내는 등짐이 오히려 가든하고(가볍고), 더벅머리 총각은 볏단을 힘자랑하듯 내리친다. 개상에서 이삭을 훑어내는 사내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 가락을 맞춘다. 고깔 차림은 머리 숙여 헤식은(싱거운) 웃음을 날린다. 태질을 하다 실수로 새끼가 풀렸는지 무릎으로 아랫단을 누르며 매듭을 고친다. 농군들이 보여주는 낙천성이 복받치는데 마음먹기는 내내 정답다.

 

중년은 흩어진 낟알을 비질해서 모은다. 마무리를 맡은 그에게 좌장의 음전함이 있다. 볏가리 위에 삿자리를 펼친 재 장죽(長竹)을 꼬나문 갓쟁이는 팔자가 늘어졌다. 감농(監農)하는 마름이 혹 아닐까. 태평스러운 표정을 보건대 일꾼에게 강짜를 놓거나 패악을 부릴 심산은 아니다. 타작이 끝나면 술병에 남은 막걸리 한 잔씩 나눠 마실 맘 씀씀이가 그에게 있을 터.

 

화가가 표현한 농촌의 일상은 소박하고 활기차다. 일하는 자의 기꺼움이 그림 구석구석에 녹아든다. 삶을 긍정하는 넉넉한 배포 덕분이다. 결실은 자연의 힘이고 수확은 인간의 몫이다. 그리하여 가을은 자연과 인간이 품앗이하는 철이다. 오곡백과 익은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너와 내가 고루 풍성한 가을 들판, 두레의 염원이 그곳에서 피어난다.

 

<사람 보는 눈 -손철주의 그림자랑> p.17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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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 인생의 굽이길에서 공자를 만나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1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입문(入門)>

 

사람은 처음 어린아이에서 출발해서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간다. 어린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어 어른처럼 살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어 취업을 심각하게 고민할 즈음이 되면 어른 되는 것이 부담스럽다. 책임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에는 친구끼리 부모에 대한 불만을 서로 이야기하고, 학생 시절에는 동무끼리 선생님 흉을 보고, 취업한 뒤에는 술자리에서 상사의 허물을 들춰낸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들 기준으로 볼 때 부모가 부모답지 않고 선생이 선생답지 않으며 상사가 상사답지 않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너그럽지 않고 쫀쫀하다거나 감정조절을 잘 못하고 화를 잘 낸다거나 사람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부모, 선생, 상사가 된다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사실 부모, 선생, 상사 역할을 하면서 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관대하지 못하며 공정하지 못하다면 상대는 괴롭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부모, 선생, 상사 역할을 잘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들은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즉 자신을 통제하는 수기(修己)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 선생, 상사가 되어서 자식, 학생, 부하 직원의 처지와 고통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성과만을 앞세운다면 마찬가지로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특히 수기가 되지 않은 사람은 주위 사람을 편하게 할 가능성이 많지 않다. 이 세상에는 짝이 되어야 할 것이 많지만 수기와 안인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한 쌍의 파트너가 되어야겠다. 이런 목표를 세운다면 힘겹고 어려운 공부도 버틸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승당(升堂)>

 

자로가 자율적 인간에 대해 물었다. “자신을 갈고닦아서 맡은 바를 신중하고 차분하게 수행한다..” 자로가 너무 간단한 대답이 믿어지지 않는지 다시 물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공 선생이 대꾸했다. “자신을 갈고닦아서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줘야지.”

자로가 다시 물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공 선생이 대꾸했다. “자신을 갈고닦아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줘야지. 자신을 갈고닦아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네. 요임금이나 순 임금도 그러한 목표에 대해서 자신의 한계를 느꼈지.”

 

子路問君子. 子曰 : 修己以敬. 曰 : 如斯而已乎? 曰 : 修己以安人. 曰 : 如斯而已乎? 曰 : 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여언(與言)>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쓰면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자신의 수양이 반이고 목민이 반이다.”라고 하였다. 수기가 되지 않은 목민관은 관직을 대민 봉사로 생각하지 않고 일신의 영달을 위한 자원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지방 관원을 비롯해서 공직자들은 인민의 고혈을 짜내면서 자기 이익이 적다고 불평을 터뜨릴 것이다.

 

이처럼 공직자의 자기 수양을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등 12부분마다 각 6조의 지침을 제시했지만 정작 정약용 자신은 목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실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민심서>를 지었던 것이다. 만약 실제 기회가 주어 졌더라면 이 책의 제목은 <목민심(心)서>가 아니라 <목민지(之)서> 또는 <목민실(實)서>가 되었을 것이다.

 

정약용이 걱정했던 것은 공자가 수기안인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한 치의 차이도 나지 않는다. 헬스를 처음 배우는 사람도 몸 푸는 사전 운동을 게을리 하고 기구부터 손에 잡으면 금방 몸에 탈이 난다. 운동에서 몸 푸는 운동은 책임자가 되기 위해 하는 수기와 닮았다. 남들보다 많은 권한을 가지고, 행세하는 데 맛을 들이고 정작 책임자로서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 자리도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준비 없이 자리에 올랐다가 얼마 뒤에 부패와 비리로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나 경제 등 여러 영역을 보면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은 많지만 박수를 받으며 자리를 떠나는 사람은 적다. 우리 사회도 공직자, CEO 등이 되려면 필요한 만큼 철학을 꼭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p.17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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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몰락
제임스 리카즈 지음, 최지희 옮김 / 율리시즈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국제금융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십수 년 사이에 미국발 금융위기 등 몇 차례 파동을 겪었다. 그러나 조만간 그보다 훨씬 심각한 금융 쓰나미가 몰려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취약한 우리 경제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가. 치밀한 금융 정세 파악 및 철저한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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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 인생의 굽이길에서 공자를 만나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1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입문(入門 : 문에 들어섬)>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다. 막상 구입해서 집에다 들여다 놓았지만 부팅하는 것이 어렵다.

매뉴얼을 봐도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더 어렵다. 요즘 와서는 스마트폰이 또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은 늘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신세대일수록 적응이 쉽지만 구세대일수록 적응이 어렵다. 신세대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공기처럼 마시면서 자라온 세대이지만 구세대에게 그것은 길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한 괴물과도 같기 때문이다. 디지털 문명의 적응력만 두고 보면 어른은 아이처럼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어른아이가 되고 아이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능숙하게 기기를 이용하므로 아이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에는 이 나이에 뭘 배우느냐며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디지털 문명이 대세가 되자 등 떠밀려서라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어른이면서 디지털 문명에 익숙한 아이처럼 잘 적응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공자는 ‘불치하문’을 그 시대에 알기 좋아하는 인물과 연관 지어 썼다.

 

 

<승당(升堂 : 당에 오름)>

 

자공이 궁금해서 물었다. “위(衛)나라 공문자는 무슨 까닭으로 ‘문’의 시호로 불리게 되었는지요?” 공 선생이 대꾸했다. “이해력이 뛰어나고 학문을 사랑하며 모르면 아랫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이라고 할 만하다.”

 

子貢問曰 :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입실(入室 : 방에 들어섬)>

 

공문자는 공자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위나라 대부 공어(孔圉)를 말한다.

시호는 오늘날 익숙하지 않은 말이다. 과거에는 사람에 태어나면 아이 시절의 이름, 정식 이름, 성인의 자(字), 성인의 아호가 있고 죽으면 시호로 불렸다. 이처럼 사람은 삶의 국면에서 다양하게 불렸는데, 이는 이름 부르기를 금기시하는 사회 문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을 감춰 죽음을 관장하는 귀신에게 들통 나지 않으려는 방법이었다.

 

이외에도 시호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평가해서 그에 합당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예컨대 공문자는 “민이호학, 불치하문“ 했기 때문에 ‘문(文)‘으로 불리는 것이다. 예컨대 이순신은 충무공이라고 말한다. 이때 충무(忠武)는 장군으로서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문인의 경우 문성(文成)이 최고의 시호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이름 짓기 또는 이름 붙이기는 사람을 사후에 도덕적으로 재분류하는 역사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거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긍정적으로 기술되기를 희망했고 그 희망은 평소의 삶을 규제하는 원리로 작용하기도 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라는 말과도 연결된다.

 

 

<여언(與言 : 함께 말하기)>

 

사람에게 모르는 것만큼 답답한 것은 없다.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사람의 호기심, 궁금증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뭔가 있는 것을 눈치 채면 그냥 넘어 가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알려고 한다. 알고 나면 별거 아니더라도 나 혼자만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서운한 것도 없다.

 

그런데 사람은 무엇을 알고자 하더라도 막상 후배나 부하 직원에게 물어보기를 어려워한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는 “아는 것이 당연하고 모르는 것이 죄다.”라고 여기는 풍조가 강하기 때문이다. 모르고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후배에게 묻자니 무식하다는 것이 탄로나 위신도 깎이고 체면이 영 말이 아니게 된다. 누구에게라도 물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는 일에 알고 싶은 바람 이외에 아무것도 집어넣지 않으면 된다.

 

호기심을 참지 못해 금기를 넘어서려는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위신과 체면을 내려놓고 아는 것을 최우선으로 간주하면 누구에게라도 묻지 못할 사람이 없다. 묻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으며 돌고 돌아서 겨우 알게 되거나 그래도 모를 수 있다. 아이에게라도 묻는다면 금방 알게 된다. 묻는 것만큼 앎을 향한 급행열차는 없다. 나이가 들어도 소탈한 사람을 보면 “저런 것을 질문이라고 하나!”라며 의아하게 여길만한 것도 모르면 지체 없이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다. 아이 같은 심성은 무지를 유지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묻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p.156~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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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본기 2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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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후의 노심초사와 고조의 죽음

 

여태후는 고조가 보잘것없었을 때의 부인으로 효혜제(유영)와 딸 노원태후를 낳았다. 고조가 한왕이 되자 정도의 척희를 얻어 아끼고 사랑하여 조(趙)은왕 여의(如意)를 낳았다. 효혜제는 사람됨이 어질고 약하여, 고조는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여겼다. 이에 늘 태자를 폐하고 자신을 닮은 척희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척희는 귀여움을 받아 고조를 따라 늘 관동까지 갔는데, 밤낮으로 울면서 태자 대신 자신의 아들을 세우려고 하였다. 여후는 나이가 든 후로는 늘 관중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고조를 만날 일이 드물어 더욱 멀어졌다. 여의가 조왕(趙王)이 된 뒤로 태자를 대신할 뻔한 일이 몇 차례 있었지만, 대신들이 말리고 유후(장량)가 계책을 냄으로써(상산사호를 모셔와 고조의 마음을 돌림) 태자는 폐위되지 않았다.

 

여후는 강단이 센 사람이라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는 데에 힘을 보탰고, 대신들을 죽이는 데도 여후의 힘이 컸다. 여후의 오라비 둘은 모두 부장이 되었다. 큰 오라비 주여후는 전사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 여이가 역후에 봉해졌고, 다른 아들 여산은 교후가 되었다. 작은 오라비 여석지는 건성후가 되었다.

 

고조12년(기원전 195) 4월 갑진일(음력 4월25일)에 고조가 장락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황제 칭호를 이어받았다. 당시 고조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유비는 효혜제의 배다른 형으로 제왕(齊王)이 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효혜제의 동생으로, 척희의 아들 여의는 조왕(趙王)이 되었고, 박부인의 아들 유항은 대왕이 되었다. 여러 희첩들이 낳은 아들 중 유회는 양왕, 유우는 회양왕, 유장은 회남왕, 유건은 연왕이 되었다. 고조의 동생 유교는 초왕이 되었고, 고조의 형의 아들인 유비는 오왕이 되었다. 유씨가 아닌 공신 파군 오예의 아들 오신은 장사왕이 되었다.

 

 

여후의 보복과 혜제의 자포자기

 

여후는 척부인과 그 아들 조왕을 가장 미워하여 척부인을 영항(永巷 : 궁정의 감옥)에 가두고 조왕을 불러들이라고 명령하였다. 사자가 세 번 갔으나 되돌아왔다. 조왕의 승상 건평후 주창이 사자에게 말하였다.

 

“고조 황제께서 조왕을 내게 맡기셨는데, 조왕은 나이가 어리시오. 가만히 듣자하니 태후께서 척부인을 미워하고 조왕을 불러 들여 죽이려 한다고 하니, 내가 어찌 왕을 보낼 수 있겠소? 왕이 병까지 있어 조서를 받들 수 없소.”

 

여후는 크게 노하여 바로 사람을 보내 주창을 불러들였다. 주창이 장안으로 불려 들어가자 곧 사람을 보내 조왕을 다시 불러오게 하였다. 조왕이 출발하여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인자한 효혜제가 태후의 노여움을 알고는 직접 패상에서 조왕을 맞이한 다음 함께 입궁하여 조왕을 옆에 낀 채 같이 먹고 잤다. 태후가 죽이고 싶었으나 틈을 얻지 못하였다.

 

효혜제 원년(기원전 194년), 12월에 효혜제가 새벽에 사냥을 나갔다. 어린 조왕은 일찍 일어나지 못하였다. 태후가 조왕이 혼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독주를 가져오게 하여 먹였다. 해가 밝을 무렵 효혜제가 돌아왔으나, 조왕은 이미 죽은 뒤였다. 이에 회양왕 유우를 옮겨 조왕으로 삼았다.

 

그해 여름, 조서를 내려 역후의 아비에게 영무 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태후는 마침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귀를 멀게 하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 살게 하고는 ‘사람 돼지(人彘)’라 부르도록 명하였다. 며칠 뒤 태후는 효혜제를 불러 ‘사람 돼지’를 보여주었다. 효혜가 보고는 물었고, 그제야 척부인임을 알고는 큰 소리로 울었다. 이 때문에 병이 나서 1년이 넘도록 일어나지 못하였다. 사람을 시켜 태후를 청해서는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신이 태후의 아들로서 아무래도 천하를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효혜는 이로부터 날마다 술과 환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병까지 생기고 말았다.

 

2년(기원전 193), 초 원왕 유교와 제 도혜왕 유비가 조회에 들었다. 10월, 효혜제와 제왕이 태후 앞에서 편안한 술자리를 열었다. 혜제는 제왕을 형이라 생각하여 평민 집안의 예절처럼 윗자리에 앉혔다. 여후는 화가 나서 독주 두 잔을 따라 앞에 놓게 하고는 제왕에게 일어나 장수를 기원하게 했다. 제왕이 일어나자 효혜도 따라 일어나 잔을 들고 함께 장수를 기원하려 하였다. 덜컥 겁이 난 태후가 벌떡 일어나 효혜의 잔을 엎어 버렸다. 제왕이 괴이하게 여겨 감히 마시지 못하고 취한 척하며 자리를 피하였다. 물어 그것이 독주임을 안 제왕은 두려움에 떨며 장안을 벗어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제나라의 내사(內使) 사가 제왕에게 말하였다.

 

“태후에게는 오로지 효혜와 노원공주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70개가 넘는 성을 가지고 있지만, 공주는 성 몇 개만을 식읍으로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정성껏 군 하나를 태후께 바쳐 공주의 탕목읍으로 삼게 하시면, 태후는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이고, 왕께서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제왕은 성양군을 바치며 공주를 왕태후로 높여 부르니, 여후가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이어 제왕의 관저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즐겁게 마신 다음 제왕을 돌려 보냈다. p.389~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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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향기 2015-10-0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늙으면 젊음을 그리워하고 회춘을 꿈꾼다.
황제나 왕들도 인간인지라, 역사를 돌이켜보면 노년에
젊은 규수에게 새 장가 들고, 후궁으로 삼기도 했다.
한 고조가 그랬듯이 조선의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조 이성계는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예뻐하여 방석을
세자로 삼았고, 선조는 51세에 19세 인목왕후를 계비로
들여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조는 무려 66세에 15세의 정순왕후와 혼인을 하였다.
늦게 혼인한 계비나 후궁, 그 자녀들로 숱한 왕권 타툼이
일어나 왕조시대 많는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