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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전 - 여성의 삶을 말하다 ㅣ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유향 지음, 김지선 옮김 / 동아일보사 / 2016년 11월
평점 :
제(齊)나라 상괴녀(傷槐女)는 홰나무를 훼손한 연(衍)의 딸로, 이름은 정(婧)이었다.
경공(景公)이 아끼는 홰나무가 있었는데, 사람을 시켜 나무를 지키게 했다. 또 나무에 현판을 달아 명을 내리길, “홰나무를 건드리면 형벌을 내리고, 홰나무를 훼손하면 사형에 처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홰나무를 훼손하고 말았다. 경공이 이를 듣고 말했다. “이 자가 처음으로 내 명을 어겼다.” 경공은 관리를 시켜 연을 잡아가두고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그의 딸 정(婧)이 두려워하며 재상 안자(晏子)의 대문 앞으로 찾아가 말했다.
“제가 과분한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고 아룁니다. 부디 저를 재상의 시녀로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안자가 듣고 웃었다. “나에게 음탕한 마음이 있어 보이는 것인가? 어찌하여 이 늙은이가 사사로이 도망쳐 온 여인을 만나야 하는가?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군.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라.“
정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안자가 멀리서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얼굴에 깊은 근심이 있구나.”
들어오게 해서 물어보니 정이 대답하였다.
“제 아버님은 연이라는 분이신데, 다행히 성곽 안에 거주하게 되면서 공민(公民)이 되셨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고, 비바람이 제때 내리지 않으며, 오곡이 잘 여물지 않는 것을 보고, 명산과 신수(神水)에 제사를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올린 술을 드시고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왕의 명령을 가장 먼저 어기고 말았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도록 술에 취해 죄를 지은 것은 진실로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 현명한 왕은 나라를 다스릴 때 봉록을 줄이고 형벌을 가하지 않으며, 또 개인적인 원한으로 공법을 어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육축(六畜) 때문에 백성을 다치게 하지 않고, 잡초 때문에 곡물의 싹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옛날 송나라 경공(景公) 때 큰 가뭄이 들어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태복(太卜)을 불러 점을 치게 했더니 ‘사람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라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경공은 이내 대청에서 내려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내가 비를 비는 이유는 내 백성을 위한 것이다. 지금 반드시 사람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 과인이 직접 그 일을 감당하겠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으로 천 리까지 크게 비가 내렸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천리(天理)를 따르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왕께서는 홰나무를 심어놓고, 훼손하면 죽이겠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저의 아버지를 죽여 저를 고아로 만들려 하십니다. 저는 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어기고 현명한 왕의 도리를 잃으실까 봐 걱정이 됩니다. 이웃나라에서 이를 들으면, 모두 왕께서 나무나 사랑하고 백성은 천시한다고 비난할 것인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안자가 말을 듣고 놀라며 자못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다음 날 조회에 나가서 경공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 백성의 재산과 힘을 다 뺏는 것을 포(暴)하 하고, 좋아하는 물건을 아껴서 엄한 명령으로 위세를 부리는 것을 역(逆)이라 하며, 형벌을 부당하게 내리면 적(賊)이라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나라에 큰 재앙을 불러옵니다. 지금 왕께서는 백성의 재산과 힘을 다 빼앗아 좋은 음식을 먹고, 종고(鐘鼓)의 음악을 들으며, 궁실의 경관을 화려하게 꾸미십니다. 이는 가장 큰 폭정입니다. 좋아하는 물건을 아껴서 엄한 명령으로 위세를 부리니, 이는 명백히 백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홰나무를 건드리면 형벌을 내리고, 훼손하면 사형에 처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납니다. 심히 백성을 해치는 일입니다.”
경공이 말했다.
“과인이 그대의 명을 삼가 받아들이겠소.”
안자가 조정에서 나오자 경공은 즉시 명령을 내려 홰나무를 지키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걸어놓은 팻말을 뽑아냈다. 홰나무를 훼손하면 형벌을 내리는 법도 폐지했고, 홰나무를 훼손한 죄인을 풀어 주었다.
군자가 말했다.
“상괴녀는 말로써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시경>에 “그렇게 하려고 궁리를 도모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이네.” 라고 했으니 이를 이르는 말이다. p.223~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