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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소치 우상적, 사제 관계를 묻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 놓일 때, 비로소 지인들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된다. 내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질투함 없이 자신의 일인 양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지, 내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고민해 주고 위로해 주는지, 그 됨됨이를 알게 된다.
내게 좋은 일이 생기면 수시로 연락하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모른 척하는 지인을 보는 것도, 반대로 내가 매우 힘들 때 걱정하는 척하며 나의 아픈 상처를 자꾸만 들추는 지인을 보는 것도 씁쓸하다. 나 또한 내 이익의 가능성에 맞추어, 조건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된다.
사람 관계가 더 삭막해지는 요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제자에게 그려 보낸 <세한도(歲寒圖)>를 통해 진정한 사제 관계를 묻고자 한다.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수면 위로 떠 오른 것은 김정희가 55세이던 1840년, 남쪽의 섬 제주도에 유배되면서부터다. 김정희는 유배생활 4년을 맞던 어느 날, 중국에서 도착한 책 꾸러미를 풀어 본다. 책을 보낸 사람은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었다. 제자가 일전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를 보냈고, 이번에는 <우경문편>을 보내 준 것이다.
이 책들은 모두 스승이 평소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분야의 책들로 당시 중국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는 중국 지인들의 인맥을 동원해서 책을 구해 스승이 계신 먼 제주도까지 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귀양살이하는 노선비는 상대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선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슴이 젖었다. 또한 당시에는 유배 중인 중죄인에게 책을 보내는 행위는 자칫하면 정치적으로 연루되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제자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스승의 유배 생활에 늘 마음을 쓰고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관직에 있다 보면 유배당하는 일이 흔했고 곧 풀려나기도 했지만, 제주도에 유배되었다는 것은 김정희의 죄목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준다. 제주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 데다가 바다에 갇힌 섬이어서, 절도안치(絶島安置 :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가두는 형벌)에 처할 만큼 중죄를 지은 왕족이나 고위 관리를 보내는 곳이었다. 제자 이상적은 이런 스승을 위해 기회가 되는 대로 중국에서 좋은 책을 수소문했다. 그는 역관으로 남다른 언어적 감각을 가지고 있어 통역을 위해 중국을 여러 차례 다녀왔고, 임금이 그 공로를 인정하여 상을 하사한 인물이다.
김정희는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에, 중국 송나라 때 소동파가 먼 유배지까지 찾아와 준 아들에게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그리고 붓을 들어 <세한도>를 그렸다. <세한도>의 전체 크기는 세로 23cm, 가로 14m로 매우 길며, 화면의 전체 구성은 오른쪽부터 화제, 그림, 발문으로 되어 있다. 가로가 14m까지 길어진 이유는, 이 작품을 감상한 당시 청나라와 조선 지식인들 20여 명이 글을 지어 붙였기 때문이다.
화면의 오른쪽 위로는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의 화제 ‘세한도(歲寒圖)’가 보이고, 그 옆에는 ‘우선(이상적의 호)은 감상하시게, 완당(김정희의 호)’이라는 뜻의 ‘우선시상 완당(藕船是賞 阮堂)’이 세로로 쓰여 있다. 화면 왼쪽에 있는 발문을 보면, <세한도>가 <논어>의 말씀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번역해 옮겨 본다.
지난해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 책을 부쳐 주었고, 금년에도 <우경문편>을 부쳐 주었소. 이 책들은 모두 세상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니, 머나먼 천 리 만 리 밖에서 여러 해에 걸쳐 모은 것이지 한순간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더구나 세상의 흐름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데, 그대는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들여서 구한 이 책들을 권세가나 재력가에게 주지 않고, 결국 외딴 섬에서 초췌하게 몰락한 사람에게 주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가나 재력가를 좇듯이 했소.
태사공 사마천이 이렇게 말했소. “권력이나 이익으로 어울리는 자들은 권세나 이익이 다 떨어지면 그 관계도 소홀해진다.” 그대도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인데, 초연하게 스스로 권력이나 이익에서 벗어나서 나를 권세나 이익을 가지고 보지 않는 것이지요. 태사공 사마천의 말이 잘못된 것이오?
공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에 상관없이 시들지 않는 나무들이오. 추워지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추워진 뒤에도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성인께서는 특히 추워진 뒤에 그들을 칭찬하셨다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소.
-늙은 완당 쓰다.
그림에는 동그란 문으로 들어가는 집이 있고 그 집 옆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묘사되어 있다. 집에는 울타리가 없어 열린 문이 바로 보인다. 제주도는 도둑과 거지가 없는 섬으로 유명하니 크게 염려될 것은 없지만 많다던 돌은 다 어디에 있는지, 낮은 돌담조차 없는 집은 썰렁해 보인다. 오로지 제주의 차가운 바람만이 가득한 곳에서 집과 나무는 미동도 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데, 메마른 붓으로 그린 묵선은 긴 세월이라도 표현하려는지 끊어질 듯 절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세한도>는 내적인 정신이나 의지를 표현하는 문인화의 정수로, 화가 정신의 뼛속까지 치고 들어갔으면서도 절제된 화법을 유지하여 감상자의 뼛속까지 울림을 준다. 단정한 글씨로 쓴 화제는 김정희가 제자들에게 그토록 주장했던 문자향(文字香 : 문자의 향기), 서권기(書卷氣 : 서책의 기운)를 경험하기에 충분하다. 김정희의 <세한도>는 조선 시대의 사제관계를 엿볼 수 있고, 서화 일치를 추구했던 조선 문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으며, 또 청나라와 조선 지식인들의 글씨를 함께 볼 수 있는 여러모로 귀한 그림이다.
세월이 흘러 1856년에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이상적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덥고 쓸쓸한 남쪽에서 10여 년 귀양살이하고 돌아오시더니 북쪽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더욱 쇠약해지시고, 원한을 씻지 못한 말년에는 마음이 타고 남은 재 같았다. 스승의 은혜를 갚지 못함을 통곡한다. 명망이 높으면 하늘이 시기하고 재주가 크면 세상에 용인되지 않는다. 평생지기인 먹 자취만 남았으니 ‘소심란(素心蘭)’과 ‘세한송(歲寒松)’이다.
이일수.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p.96~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