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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회 추억
신영복 지음, 조병은 영역, 김세현 그림 / 돌베개 / 2008년 7월
평점 :
다산 정약용 선생과 얼마 전에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은 닮은 점이 많다. 약 200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났지만 살아온 과정은 다산의 전철을 밟는 것처럼 거의 같은 길을 걸어 왔다.
다산은 1801년에 유배의 길에 들어서 1818년 해배(解配)될 때까지 약 18년간 유배생활을 했고, 신영복 선생은 1968년에 감옥에 들어가 1988년 출소 때까지 20년간 옥중생활을 하게 된다. 다산은 정조가 승하하고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유배를 가게 됐고, 신영복 선생도 반공주의 체제하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또한 출세배경도 많이 닮았다. 다산은 성균관을 거쳐 과거에 장원급제함으로써 20대의 젊은 나이에 출세가도를 달렸고, 신영복 선생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20대에 육관사관학교 교관으로 경제학을 가르쳤다.
다산은 천주교에 잠시 입문했다가 신유박해(1801)때 모함을 받아 사형을 받을 뻔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유배가는 것으로 감형되었고, 신영복 선생 또한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도 했다.
다산은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절명한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났던 해에 태어났고, 신영복 선생은 1941년 그러니까 정확히 179년 뒤인 1941년 신사년(辛巳年)에 태어났다. 60갑자로 보면 신사년이 임오년보다 한해 앞선다. 지나친 억측일지 몰라도 예전에 호적상 1~2년이 허술하게 기록되던 것을 감안하면 갑자(甲子)가 같은 해에 태어났을 수도 있겠다 싶다.
공통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산은 조선시대 수명으로는 비교적 긴 삶인 75세의 수명을 누렸고, 신영복 선생 또한 1941년~2016년까지, 음력으로 계산하면 아직 2015년이니, 75세의 삶을 누리고 영면했다. 다산이 조선의 선비로서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났던 만큼 신영복 선생도 시서화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다. 그리고 다산이 유배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11년간 후학을 양성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면, 신영복 선생도 출소하던 1988년에 성공회대 교수로 임용되어 2015년까지 약 27년간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또한 사후, 생전에 모두 사면복권 된 점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나 신영복 선생 모두 생전에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살았다.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의 당연한 책무일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인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돌아가시고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으니 그게 위로라면 위로가 아닐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