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외면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너를 사용하신다
맥스 루케이도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너무나 유쾌하다. 단지 내용이 유쾌해서 유쾌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렵게 생각하는 베드로와 여러 성경 속의 장면들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장면들로 다시 꾸며져서 내 앞에 놓여졌기 때문에 유쾌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헤롯이 야고보 사도는 죽이고 베드로 사도를 옥이 가두어둔 그 상황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를 하는 장면이었다. 장면 15번 [기도부터, 그리고 기도에 힘입어]란 부분인데 베드로가 죽을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교회 역사상 가장 위기인 순간을 루케이도 목사님은 아주 재미있게 설명해주셨다. 무지렁이 어부였던 베드로의 이전까지의 행적과 그 당시의 행적을 비교하여 베드로가 얼마나 담대해진 사도로 거듭났는지를 아주 절묘하고 기치 넘치게 풀어냈다. 예수님께서 풍랑이 부는 바다 위 배에서 잠을 곤히 주무셨던 장면이 기억나는가. 어떻게 우리가 다 죽게 된 상황에서 주무실 수가 있느냐고 예수님께 투덜거리던 바로 그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하룻밤만 지나면 죽게 될 그 감옥에서 코를 골며(물론 성경에는 안 나와있지만) 자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성숙된 증거가 아닐까.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걱정 근심 없이 평안을 누리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야할 바가 아닌가. 그 때 바로 천사가 베드로를 깨운다. 그 장면을 성경책으로 보면서 천사가 베드로를 깨우느라 고충이 심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우고(행 12:7) 또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일일히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오라고(행 12:8) 했던 것을 볼 때 그는 아직 잠이 덜 깨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했던 것(행 12:9)이 확실하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감옥에서 빠져나와서야 겨우 천사를 보내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니까 진짜로 그는 아무런 걱정 없이 감옥에서 잤던 것이다. 쿨쿨~ 그때 루케이도 목사님은 돌아서 가는 천사가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갔다는 말로 재미를 한층 더하셨다. 다음 번에는 나팔 가져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고.

 

그 심각한 상황이 이렇게 재미있는 장면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성경을 어렵게만 느끼고 봤기 때문인지 그렇게 우리와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그들을 보지 못했다. 작년에 가르침을 주신 전도사님께서도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가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언뜻 기억난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셨던 것을 볼 때,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이곳에 있고 싶다고 한 말을 가리켜 마가는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했던 것을 가리켜 그렇게 말씀하셨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베드로, 쟨 알지도 못하고 헛소리를 해~”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각 성경의 저자가 개인적인 언급을 중간 중간에 한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해서 이런 풀이가 참 신기하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해서 즐거웠다. 정말로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천재적인 성경 스토리 텔러이다. 이 책을 보면 성경에서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 모든 진리들이 쉽게 다가온다. 성경을 읽었으나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분들에게 사도행전만큼은 제대로 전달해줄 수 있겠다. 게다가 이 책은 단지 읽고만 넘기는 책으로 쓰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촉구를 하신다. 행동을 요구하는 촉구. 앞서 말했던 베드로가 감옥에서 탈출한 이야기는 기도 편이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마리아의 집에 모여 베드로 사도를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에서는 우리와 같이 기도하면서도 믿음이 약한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도, 작은 계집 아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가 살아돌아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만큼 그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뒤숭숭한 분위기였는지,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베드로를 살려달라 기도하면서도 그가 돌아온 것을 그의 영혼이라 여겼던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우리의 본성으로는 희망을 바라보기보단 절망을 먼저 예측하는 것이 훨씬 쉽다. 하지만 그렇기에 성경에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더불어 교회는 예배드리는 집도 아니고, 교제하는 집도 아니고, 성경 풀이하는 집도 아니고 오로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셨던 예수님처럼 기도로 힘입어 살아갈 것을 이야기한다. 기도로 교회를 가득 채울 것을 다짐하게 한다.

 

또한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도 항상 등장한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 개망나니일지라도 그에 대한 관심을 항상 잃지 않으셨다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무엇 때문에 그는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쉽게 선고를 내리곤 한다. 무직자이기 때문에, 노숙자이기 때문에, 알콜 중독자이기 때문에, 폭력 전과가 있기 때문에 등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치부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고 싶어하시는 모습은 긍휼이기에 그가 설사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형용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우리는 긍휼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일이 이것이 아닐까. 좋은 일인 줄은 당연히 알지만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거나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것. 신앙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대인 관계로 드러나는 것임을 느낀다. 내 삶에 드러나는 모습이 내 믿음을 드러내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 부분은 나를 쳐서 복종시켜 움직여야 할 부분일 것이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미국적인 상황에서 등장하는 일화들이라 딱 마음에 와닿지는 않지만 노숙자에게라도 존중하면서 눈을 바라봐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은 정말 공감이 많이 되었다.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일 때는 미안해서 회피하게 되기 때문인데 인간적인 관심부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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