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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선인장 - 사랑에 빠졌을 때 1초는 10년보다 길다
원태연.아메바피쉬.이철원 지음 / 시루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창 학창시절에 유명했던 시인이 있었다. 읽지는 않아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 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가 80만부나 팔리면서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순정만화에 나올 법한 이름에 오글오글거리는 수사법은 내 나이 여고생 시절에 들불처럼 시집 광풍을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사볼 정도로 그의 시에 빠졌던 것은 아니지만 시집 이름만 들어도 괜시리 마음이 갔다. 한 때 다이어리에 누군가의 시와 누군가의 노래 가사를 옮겨 적어놓는 것이 유행이 되었는데 그의 시도 단골메뉴로 심심치 않게 등장했으니 내가 글씨를 좀 잘 썼다면 나도 옮겨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단한 내용도 아니고 툭 하면 등장하는 사랑 타령인 내용에 아이들이 목을 매는 것을 볼 땐 좀 의외였다는 느낌도 들었다. 고교시절 시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고, 그나마 좋아했던 시도 대부분 교과서에나 등장하는 이육사, 윤동주, 신동엽과 같은 저항적인 면모가 남다른 시였기에 원태연 시를 좋아하기엔 내겐 공감대가 너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집을 사보지 않았으니 시인의 성별에 대해 전무했지만 나름 추측하기를 독특한 이름도 그렇고, 표현력도 그렇고 분명 여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남자인 것도 참 의아했다. 여하튼 내겐 그가 뻔한 내용에 비해 평범하지는 않은 시인으로 여겨졌다.
『손 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와 같이 딱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대단한 표현력이란 감탄을 하긴 했다. 내 또래 여고생이 생각할 법한 언어들을 잘 버무려 시를 썼기에 우리들은 말 그대로 환장을 했다. 사랑 타령이 싫은 나조차도 감각적으로 잘 표현했단 생각은 하게 만들었으니. 꼭 여고생이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우리의 감성을 잘 뽑아냈던 시였다. 하지만 시란 존재가 워낙에 그렇듯이, 오랜 울림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도 몰랐고, 우리도 몰랐다. 시의 표현은 우리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옮기면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것이 식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오랜 시간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들었을 때는 너무나 마음에 들지만, 계속 곱씹기에는 평범한 그런 시가 나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또 다른 장르에 도전하고자 한다. 블로그에 연재하면서 오디오그래픽노블(Audio Graphic Novel)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는데 CD 없이 QR코드를 활용해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책을 읽으면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고교 때 시로 우리 세대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것처럼 스마트폰에 열광하는 요즘 세대에 딱 어울릴 만한 장르의 책이다. 몽환적이면서도 사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그래픽아티스트 아메바피쉬와 국내 일렉트로니카 음악계 1세대 작곡가 이철원이 합류했다.
이제 나도 서른을 넘어 중년을 향해 간다. 고교 시절 자신의 시가 사람들에게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시인은 스물하나에 첫 시집을 발표해 엄청나게 많은 시집이 팔리는 시인이 되었지만 그 때까지도 시인이 뭘 하는 사람인지를 몰라서 군대를 다녀왔다. 스물다섯에 전역을 하고 유명 가수들에게 노래 가사를 써주며 화려하게 살았지만 작사가도 시인도 아니었다. 스물아홉에 우연히 영화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꿈을 꾸다가 능력의 부족으로 좌절해버리고 서른부터 서른여섯까지 웃음, 글, 영혼까지 팔아가면서 자신이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찾다가 드디어 시인이 뭘 하는 사람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으나 그 땐 이미 시가 떠난 이후였다. 나도 서른이 넘은 지금에 인생을 회고해보면 아쉬웠던 부분이 더러 보이고, 지금 알고 있는 이것을 그때 알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많이 있는데 후회로 점철된 이런 고백 덕분에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는지 알 수 있어 더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이런 실수를 발판 삼아 더 앞으로 나가야 할 일이다. 오히려 이런 실수를 안고 나온 글이기에 그 글이 더 깊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소심쟁이 고양이와 사랑하는 이를 안아줄 수도, 위로해줄 수 없는 선인장을 사랑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그런 많은 실패의 경험이 녹아들어갔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보고 싶은 감정이 앞서서 저지르게 되는 실수에서부터 소심해서 맞서지 못해서 관계를 어긋나게 하는 행동까지 다 포함하는 이야기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사랑의 첫 설레임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순정까지 모두 잘 표현했는데 고양이가 왜 외로워가 되었는지, 선인장이 왜 이름이 땡큐인지도 알 수 있다. 덧붙어 등장하는 선인장의 친구 쓸쓸이는 서로 좋아하는 고양이와 선인장 사이를 질투하지만 그것은 날카롭거나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받지 못해 안타까운 감정만 느끼게 해준다. 마지막에 에필로그격으로 나오는 고양이의 첫사랑 이야기에서는 진짜 잔잔하게 감싸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스스로는 시가 떠나갔다고 말하지만, 확실히 시인이여서 그런지 이 책에 쓰인 단어 하나도 절대 그냥 쓴 것이 없고 앞뒤에 진행될 이야기 속에 꼭 필요한 구절로 연결되는 것들이 많아 감동을 느끼게 된다. 평범해 보이는 단어 속에 대단한 의미가 숨겨져있음을 밝히면 항상 신선한 감동을 받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원태연은 시인이 틀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