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스트리트에서 세상을 기록하다 - 로이터 통신 뉴욕 본사 최초 한국인 기자 이야기
문혜원 지음 / 큰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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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말을 좋아한다. 국내 최초, 세계 최대, 세계 신기록... 간혹 보면 우린 이런 말을 남발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가장 처음이라는 말이 가지는 매력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로이터 통신 뉴욕 본사 최초 한국인 기자인 문혜원 기자를 처음 봤을 때도 그런 매력에 한껏 빠져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얼굴도 이쁜 것이 머리도 좋았구먼~’ 어떤 분야에 도전하나 그 장소가 뉴욕이면 영어가 네이티브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말로 먹고 사는 기자란 직업이라면 넘어야 할 장벽은 상상을 불허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인이 도전하지는 못할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순수 한국인이기는 하지만 영어를 현지인만큼 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타고났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만약 그녀가 유아기부터 외국에 나가 살 수 있는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면, 한 번도 외국에 서 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로이터 통신 최초 한국인 기자’라는 타이틀을 얻어내지는 못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4살 때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를 시작으로 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은 인도, 태국, 미국, 한국에서 보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은 캐나다에서 보냈으니 그녀가 가진 배경이 얼마나 탄탄한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이, 그가 성장할 수 있는 한계를 어느 정도 결정할 뿐.
 
그러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할 시기인 청소년기까지를 외국에서 보냈으니 한국어 실력이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바르게 서있었을까 걱정이 될 만한 경우인데, 이는 교육관이 확고하신 아버지 덕택에 해결될 수 있었다. 밖에서는 영어를 쓰더라도 집에서는 무조건 한국어를 써야 한다는 규칙을 정해놓고 밥을 굶기는 혹독한 벌을 주시는 아버지 덕분에 자신이 한국인임을 배울 수 있었단다. 미국 국가는 다 외울 수 있으면서 애국가는 못 외우는 아이들이 안타까워 4절까지 외울 때까지 공부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벌을 받았을 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게 해준 중요한 교훈이었다고. 이렇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사람 뒤에는 항상 그보다 더 대단한 부모님이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대단한 능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11개월 앞서 태어난 언니도 소위 영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특했고, 그녀의 어머니도 첫 부임지인 나이지리아에서 영어를 만나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워 결국 영어강사자격증까지 취득해서 현재까지 영어가 제 2의 외국어인 사람들에게 가르치신단다. 게다가 아버지는 또 어떤가. 외교관이신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딸이 뉴욕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부터 매일같이 전화로 한국 뉴스를 브리핑해주시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지. 역시나 외교관이셔서 그런지 브리핑하는 내용이 나는 알아듣지 못할 경제 분야를 빠삭하게 정리해주시는 것이 기자급이었다. 이런 가족들 곁에 있으니 뭐가 되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도 처음부터 기자란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경영학과에 진학했는데, 흥미도 없고 성적도 최악이라서 고민을 하는 중에 글을 쓰는 교양 과목에 점수도 잘 나오고 재미있었던 것을 기억해내 영문과로 전과했다. 그러나 경영학과와는 다르게 영문과는 시험 유형이 모두 에세이쓰기라서 회화는 현지인처럼 하지만, 글 쓰기의 깊이가 없던 그녀로서는 부단히 노력했단다. 그러다 글을 하루에 3~4시간을 투자해서 쓰는 노력 중에 학교 학보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글 쓰기 실력을 탄탄하게 다지게 되는 계기를 얻었다. 결국 기자라는 직업에 필이 꽂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따끈따끈하게 막 꾼 꿈에다가 글 쓰기 실력은 바닥인 그녀가 졸업하고 지원한 유명 언론사는 모조리 “NO”를 외치니, 얼마나 좌절했을까. 그 중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실패자라고 보는 것이 더 괴로워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엔 공업개발기구에 인턴으로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하지만 포기했다고 했던 그 꿈이 더욱 강렬하게 갖고 싶은 것이 되어버린 그녀에겐 유엔이란 꿈에 그린 직업이 그다지 감흥이 없었던 것이다. 고즈넉한 풍경에 여유로운 환경에서 열정적으로 개발도상국의 공업에 대해서 조사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인류의 꿈을 위해 뛴다는 사명감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그만 그 자릴 박차고 다시금 한국에서 기자란 꿈에 도전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연합뉴스에서 기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고, 굵직굵직한 특종도 쓰고 상도 받으면서 나름 잘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뉴욕 본사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알게 되었다. 모르면 몰랐지, 이왕 알게 된 것은 호기심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한국의 혹독한 수습기자생활도 해냈는데 뉴욕에서 무얼 못하겠나 싶었던 그녀는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그것이 성공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확고한 꿈이 있어서 어릴 적부터 글 쓰기나 사건을 관찰하는 것을 해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살아오는 동안 해온 여러 경험 중에서 자신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을 찾았고, 그를 위해 실패와 좌절을 해보고 나서 그 분야에 성공을 이루는 것도 가히 나쁘지 않다. 그러니 그녀는 점점 노력하면서 성취하는 유형이었다. 처음부터 머리가 좋거나 뛰어나게 영특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꾸준히 그 꿈을 놓지 않고 매달리는 승부 근성 하나만을 가지고도, 살벌하기 그지 없는 뉴욕의 월 스트리트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앞으로 종군기자가 될지, 정치의 중심 워싱턴 DC에서 한국인 최초로 백악관 출입 기자가 될지, 칸의 영화 담당 기자가 되거나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기자가 될지, 아직 아무것도 결정난 것은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과정처럼만 준비한다면 이번에도 그녀가 꿈꾸는 그것을 얻게 될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뉴요커의 생활이나 기자의 생활, 다채로운 경험을 얻고자 한다면 딱히 기자에 관심이 없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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