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 사기본기 1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마천


기원전 145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90년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자(子)는 자장(子長)이며 섬서성 용문(龍門) 출신으로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한 무제 때 태사령(太史令)이었다.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와서 동중서(董仲舒)와 공안국(孔安國)에게 학문을 배웠다. 스무 살 때 여행을 시작하여 중국 전역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돌아온 후에는 낭중(郎中)에 올랐다.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그에게 반드시 역사서를 집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108년 태사령이 되어 무제를 시종했으며 천제(天帝)에 제사 드리는 봉선(封禪)에 참여하고 역법을 개정했다.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자 국가의 장서가 있는 석실 금궤(石室金櫃)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했다. 기원전 104년 정식으로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기원전 99년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사마천은 홀로 무제 앞에 나아가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옥에 갇힌 그에게 세 가지 형벌 중에 하나를 고를 권리가 주어졌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이었다.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어 했으나 귀족이 아니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기원전 93년 사마천은 그의 친구 임안(任安)의 추천을 받아 무제의 곁에 있게 되었다. 이때는 『사기』의 집필이 대체적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20년 만이었다.



 

 

인문서적의 놀라운 발자취를 보여주고 있는 알마출판사에서 야심차게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으뜸인 사마천의 『사기』를 완역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한자가 병기된 번역체인데다가 그 번역도 매끄럽지 못해서 일반인이 접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었던 차에 『사기』 완역을 위해 20년 간 준비해오신 김영수 선생님의 지휘로 이 거대한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총 52만 6,500자로 쓰여진 『사기』는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한다는, 중국 ‘25사’ 정사 가운데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대작이다. 그러니 그것을 번역하는 것만 해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사기』 번역에만 매달려오신 김영수 선생님이 계시기에 드디어 완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이 그 야심찬 계획의 첫 책인데, ‘본기(12편)ㆍ표(10편)ㆍ서(8편)ㆍ세가(30편)ㆍ열전(70편)’의 다섯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사기』에서 이번에 나온 책은 ‘본기’ 총 12편 중 5편인 【오제본기ㆍ하본기ㆍ은본기ㆍ주본기ㆍ진본기】가 들어가 있다. 또한 서문 격인 【태사공자서】가 삽입되어 있고, 사마천이 이 책을 쓰게 된 연유와 그로써 형성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보인안서】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포석 작업을 할 수 있는 자료까지 친절하게 편집해둔 것이다. 특히 【보인안서】는 『사기』에 실린 글이 아니라 『한서』 권62 「사마천전」에 실린 임안에게 보낸 편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번역을 담당하신 김영수 선생님의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사실은 이번에 나온 책이 너무나 잘 설명되어 있고, 보기에도 깔끔하게 표와 사진과 지도까지 구비되어 있어 까마득히 오래 전 이야기일지라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었기에 그 이전의 『사기』는 어땠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번에 알마출판사에서 완역본이 나온 것이 이제까지 한 번도 완역되지 않았다는 소리라면 더욱 궁금증을 해소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검색을 좀 하면 이해할까 싶어 좀 해보았더니 정말로 ‘본기ㆍ표ㆍ서ㆍ세가ㆍ열전’의 각 부분마다 나뉘어서 설명된 책은 무수히 많지만, 그것을 하나로 연결하여 흐름이 끊기지 않게 정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일 듯 하다. 물론 두 번째 책을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문외한이 보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내가 사마천의 『사기』 그 자체를 잘 몰라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일 앞 장에 ‘『사기』 총 130편 편명 일람’과 ‘사마천과 한무제의 비교한 연보’ 그 다음에 역자 서문에서 그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준다. 진정한 지식은 소수의 사람만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두루 알려져야 한다는 것이 옳은 것처럼, 김영수 선생님은 문외한을 위해 정말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셨다.

 

역자 서문에 보면, 『사기』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체제, 그의 수많은 주석서와 판본 등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한 왕조의 역사만을 기록한 ‘단대사’와는 다르게 사마천의 『사기』는 무려 3,000년을 다루고 있는 거대한 ‘통사’라는 점에서 다른 정사들과 뚜렷히 구별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사마천의 속셈을 알아야 한다. 목적이 없이 그런 방대한 저술을 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인간으로서 치욕스러운 궁형을 감수하고서까지 『사기』의 편찬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을 본다면 그가 거대한 ‘통사’를 남긴 까닭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한 무제에게 직언을 했다가 오해를 사 감옥에 갇혔을 때 아무도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경험으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자그마한 이익에 영합하기 위해 바른 양심을 저버리는 인간의 치졸한 모습, 자신이 총애한 이 부인의 오빠인 이사 장군을 곡해한다고 버럭 화를 내고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감옥에 가둔 한 무제의 잔인한 본성 등 그런 것을 전달하려는 의지가 아니였나 싶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낮은 자질을 가진 황제는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지 못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비꼬거나 비아냥거리는 상황은 아니였을지 모르겠다. 이미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았기에 그를 위협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 조금은 다행이지 않을까.

 

또한 『사기』는 현대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검증된 사실만을 정리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사마천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모두 다 섭렵하여 사실에 맞지 않거나 참고문헌이 부족한 부분은 빼버리고 검증될 수 있는 내용만 정리했는 데다가, 실제 한 왕조가 흥왕했던 지역까지도 꼼꼼하게 답사하는 등의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해 쓰인 역사서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전까지는 연대순 기술인 ‘편년체’로 정사를 기록했는데, 사마천은 방대한 통사를 일목요연하고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기전체’ 기술방식을 창안해냈다고 하니, 정말 그 가치를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사기』 이후의 정사는 거의 대부분 『사기』의 체제를 따르니 마땅히 역사의 궤적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외에도 『사기』가 중요한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내가 가장 최고로 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마땅히 중화사상의 근원이요, 신분 체제가 절대적인 한 나라에서 사마천은 이 때까지의 사고방식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었다. ‘본기ㆍ표ㆍ서ㆍ세가ㆍ열전’의 체제 중에서 일반적으로 제후의 업적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세가’에서 단지 제후이기만 하면 기록했던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었어도 천하 존망의 흐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에 따라 기록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이후에 편찬된 많은 정사에서는 다른 부분은 다 『사기』를 따르지만 이 부분만큼은 사마천의 기록을 곡해하며 제후들의 기록만으로 채우기에 이것은 사마천의 독특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는 그의 역할이자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 단순히 신분의 고하에 다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봉건적인 시대 사람으로서 그렇게 개방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영향력은 사마천 개인의 체험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궁형을 자처하지 않고 사형을 당해 죽었더라면 그런 시야가 넓어지는 깨달음은커녕 후세의 역사서 발전에 있어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와 잠재력을 믿었던 것이 불과 300~400년이 채 되지 않았기에 아마 늦되도 엄청 늦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사마천의 개방적인 사고 안에서 군왕이 가야할 길과 신하의 바른 도리를, 전설시대 제왕들인 ‘오제’로부터 사마천 자신의 당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고사성어들을 무더기로 속출하는데 그것을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본기 1편에서는 【오제본기ㆍ하본기ㆍ은본기ㆍ주본기ㆍ진본기】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오제본기】에 등장해서 놀라웠다. 단지 요와 순이라고 들어서 아닐 줄 알았는데, 원래 이름이 제요와 우순이었다고 하니까 내가 들었던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 실은 이 부분의 의도는 ‘선양’이라고 하는 권력 이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에게 무조건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는 데 합당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꼼꼼히 살펴서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선양’인데, 한 무제의 잔인하고 경솔한 성품을 꼬집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 역사에서는 ‘선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던데, 내가 보기엔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의도가 아닐까 싶다. 그가 목숨을 구걸하면서까지 전달하고 싶었던 그 무엇 말이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는 오제 전에도 신농 씨 같은 신들이 등장하지만 사마천의 생각에는 그런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빼버린 것이다. 그러니 역사가의 의도와 그의 생각을 유추하면서 읽어야하겠다. 원래는 이런 모든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가 1899년 갑골 문자의 발견으로 전설로만 치부했던 오제와 하, 은(상)나라의 존재를 증명해낼 수 있었다. 사마천의 시절만 하더라도 이 모든 역사에 대한 참고문헌이 있었다니까 무작정 전설로만 치부할 수는 없겠다. 중국에서 동북공정이니 서남공정이니 하면서 여러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는 것을 한 번쯤 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 활동 이면에는 이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 정부의 화합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으로 뒤떨어지지 않는 중화민국의 소프트웨어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응원도 하게 된다.

 

우리 동양의 위대한 문화가 사실은 서양 문화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아왔던 것에 대한 아쉬움의 발로랄까. 사마천의 『사기』가 있다는 것이 조금은 동양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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