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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 별이 반짝! 심장이 쿵!!
차선희 지음 / 다인북스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조금 독특한 설정을 안고 시작한다. 안면기억장애를 가진 여주인공의 설정이 바로 그렇다. 한 번에 사람을 인지하지 못하는 주인공 장미후는 열일곱에 첫눈에 반한 환이랑 행복하고 별이 반짝이듯이 사랑을 하다가 그를 교통사고로 먼저 보낸다. 벌써 3년이나 그를 잊지 못해 혼자 살면서 가끔 그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아 엉엉 울다가도 그가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방긋 웃는 그렇게 사랑을 할 줄 알고 하는 사람이었다. 스물여덟이란 나이가 무색하게도 환이 엄마, 즉 시어머니께 ‘엄마’라고 부르면서 안겨들기도 잘 하면서 사랑을 잘 베푸는 사람. 고아이지만 작은 사랑을 크게 느끼고 감사하면서 사랑을 많이 줘봤던 그렇게 마음이 순수하게 넓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첫 장면은 그런 미후가 엉엉 울면서 뛰어들어왔을 때 옆에 존재감 없이 다소곳하니 자리잡은 성 작가와 같이 일하는 서우영 감독과의 만남이었다. 싫다는 여자 안 붙잡고 쿨 하게 헤어지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상당히 담백한 남자, 그 서우영. 그가 미후와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서로 소개를 정식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경황없이 울다가 눈만 잠깐 마주친 사이, 그들의 첫만남은 독특했다. 더 독특한 것은 미후의 안면기억장애가 무색하게도 우연히 동네 슈퍼에서 두번 째 만났을 때 그를 단박에 기억해내버린 것. 환이말고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환이말고는 운명을 만들지 않으려했기에 그렇게 무심히 모른 척 누구냐고까지 연기를 했어야 했던 남자였다, 서우영은.
그렇다면 우영이에겐 미후란 여자가 어떻게 비춰졌을까. 자신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엉엉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안겨드는 여자. 스물여덟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낮은 정신연령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보단 성 작가가 제 아들부부 때문에 그런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사극드라마에서 연애물로 전향했다고 하는 소문이 더욱 궁금했다. 실물로 보진 못했지만 소문으로는 엄청 유명했던 그 여자와의 첫만남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어이없다고 받아들여졌지만 엉엉 우는 여자를 보니 혹은 그녀의 사랑이 정말 진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사랑도 연애도 복잡할 것 없이 단순하게 마음이 들면 사귀다가 지루해지면 바로 끝내는 우영의 사랑에 정면도전한 것 같이... 그저 성큼 다가왔다. 새로 찍는 드라마에서 플로리스트로 같이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저 독특한 여자 그 이상은 아니었을 거다. 그저 안면기억장애라니까 자기는 얼마만에 기억할지가 궁금했고, 그녀가 해주는 끝내주는 연포탕이 먹고 싶고, 눈가를 반달로 만들며 웃는 그녀의 웃음이 보고 싶었을 뿐. 어느 것 딱 와닿는 것은 없는데 그저 그녀가 보고 싶을 뿐. 그렇게 그는 그녀에게 꽂혀버렸다. 평소처럼 연애하자고 정면공격을 해놓고서 싫다는 대답이 나올까봐 하루 더 준다고 더 생각해보라고 그러고, 정말 환이보다도 더 많이 생각하지만 그래도 안되겠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자존심이 상해 미치겠지만 이 여자랑 다시 못 볼까봐 무섭고, 결국 환이에게 미안하다며 못 하겠다는 서글픈 표정을 짓는 여자가 안쓰럽고, 그래서 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란 걸 마음으로 먼저 알아버렸다. 사랑은... 원래 그런가? 죽을만큼 아프면서도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우영이에게도 사랑이 왔나보다, 운명처럼.
우리 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느냐 물었던 적이 있어. 별이 반짝, 심장이 쿵.
그랬지, 나도. 유치하다고. 나도 모르게 쯧 혀까지 찼다니까. 근데, 서 감독. 녀석을 보니까...... 그 눈을 보니까 알겠더라고. 정말 적당한 표현이더라고. 그것밖에 없더라고. 서 감독, 너도 느끼게 될 거야. 별이 반짝, 심장이 쿵. 사람들이 왜 그 유치한 대사에 열광했는지 서 감독 너도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백번 이해하게 될 거야. (성재경 작가가 대본 수정하면서 서우영 감독에게 한 충고) - p.17~18
어디가 좋은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막 생각나. 분명 촬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면 미후를 생각하고 있어. 멍청히 앉아 있을 땐 귓가로 미후의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해. 그러면서 불안해. 초조하고. 그러다 만나면, 저 애랑 시선을 맞추면...... 그 불안함이 깔끔하게 가셔. 좀...... 어이없지? 나도 요즘 내가 좀 어이없어. 이런 적이 없어서 뭐라 말하기도 그래. (서 감독이 여자친구에게 한 미후에 대한 심경) - p. 82
다른 건 생각 하나도 안 나. 잡고 싶어. 잡고 싶어졌어. 내가 왜 이런 말을 성 작가님한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이 그래요. 그 녀석, 미후...... 내 옆에다 끌어다 놓고 싶어요. 성 작가님이 원했던 것이 어디까지였느냐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거든. 이렇게 불시에 당할 줄 몰랐거든, 나도. (미후가 사라지자 초조해한 서 감독이 성 작가님한테 한 미후에 대한 고백) - p. 94
한숨 또 한숨. 그러면서 뒤척이길 수십 번이었다. 가슴은 자꾸만 뭉클거리고, 심장은 공포영화를 볼 때처럼 무섭게 뛰어댔다. 미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생각보다...... 힘들다. 환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었던 것보다 배는 더 ...... 아프다. "그러니까...... 진작 그만 하랬잖아." (...) 기어이 눈물을 뽑고선 신경질을 부려댔다. 그리고 미후가 잠든 건, 6시가 다된 시각이었다.
(우영이를 거절하고 난 뒤 미후의 심경) - p. 141
공원 앞, 그녀는 입구를 빠져나가고, 그는 입구를 막 들어오는 참이었다. 그녀는 멈춘 데 반해, 우영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어?' 그리고 눈물 한줄기가 뚝 떨어졌다. 미후는 재빨리 눈물을 훔쳐 냈다. "미련퉁이" 울음 섞인 목소리...... 그랬다. 자신은 분명 미련퉁이가 맞았다.
(거절한 후 일주일만에 본 우영이가 자신을 지나치는 것을 보고 제 마음을 깨닫는 미후) - p. 155
지나치는 그 순간부터 아니, 마주친 그 순간부터 잡고 싶었다. 그냥 확 끌어안아 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흔들린다는 녀석이니 와락 끌어안고 절대로 안 놔주면 되지 않을까, 그 생각 했었다. 하지만 여태 그런 마음을 참고 견디는 이유가 그거다. 흔들리면서도 오지 못하는 마음, 그거......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막연히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아플까, 쪼그만 녀석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뒤돌아보고픈 거 꾸역꾸역 참아가며 멍청하게 걷고 있는 거였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초인적인 힘을 내가며 참고 있는 거였다.
(거절당한 후 미후를 보고도 외면한 우영의 마음) - p. 156
이 이야기는 사랑이 가벼웠던 한 남자와 사랑이 운명 하나라고만 믿고 있었던 여자의 이야기이다. 먼저 만나 추억과 이야기를 만든 전 남편에 대한 질투심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우영이와 먼저 우영이를 붙여주었지만 정작 잘 되어가는 우영-미후 커플을 볼 때 가슴 한 켠이 씁쓸해지는 성 작가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먼저 가버린 사람이 불쌍하고 그래서 더욱 남겨진 사람이 불쌍하긴 하지만, 제게 찾아온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벼울 것 같은 문체 속에다 무겁고 진중한 내용을 잘 포장해놓은 차선희 작가는 이번이 처음인데, 기대 이상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엄마도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고선 눈물을 쏟으셨다고 하셨는데,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말고도 인생의 깊은 주제, 인간의 애환을 잘 담아내어 마음에 든다.
"왜 ...... 환이라 그랬어?"
재경이 우영에게 물었었다. 그때, 우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더 이상 질투하지 않으려고."
그 말에 재경이 알 수 없는 눈길을 보내자, 우영은 다시 한 번 얘기했다.
"환일 사랑하려고."
그날, 재경은 우영을 끌어안고 한동안 엉엉 울었다.
(우영이가 아들을 낳았을 때 재경이와 했던 대화) - p. 414~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