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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명적이다 - 경계를 넘는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예술
제미란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5월
평점 :
14인의 여성미술가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그녀들의 작품과 열정!
한국을 대표하는 14명 여성미술가들의 예술과 열정을 담은 책, 『나는 치명적이다』는 여성미술 순례가 제미란이 한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여성미술가들을 선별하여, 그녀들의 전시장과 아틀리에를 직접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느낀 것들을 담은 기록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순전한 기쁨이었지만 무절제한 배설이 아니라 의미를 구축하고 책임져야 하는 작가의 의무와 혹독한 수련의 시간 앞에서 도망치고 만 그녀는 뛰어난 감성과 공감의 능력으로 많은 여성미술가들을 찾아나섰다. 그녀가 아니였다면 멋진 여성미술가들을 아직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그녀의 도망은 나로선 행복이겠다. 뛰어난 감성으로 어렵기만 한 미술 작품들을 해체해서 가볍게 소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현대미술은 난해하고 어렵다고만 생각했던 내겐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가장 압권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미술가는 현재 네덜란트 암스테르담에 거주하고 있는 송상희씨다. 그녀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을 넘나들며 폭발하는 상상력을 무기로 숭고한 주제를 설파하고 있다. 이 책이 단지 화가만 담고 있는 책이 아니기에 이런 귀중한 여성미술가를 알게 되어 행복할 따름이다. 사진이나 설치, 애니메이션까지 다재다능한 그녀는 일단 「메타모르포시스 16」란 애니메이션을 보여준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서사시에서 차용한 소재에 종을 넘나들고 생사를 초월한 환생, 창세기와 종말론의 기지 있는 변환, 석유 전쟁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통찰력까지 환상적인 그녀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룰 수밖에 없다. 책 안에 그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실려있는데 정말 감동적이다. 그 외에도 자신이 직접 등장하여 사진을 찍거나 다양한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데 하나같이 실험적이다. 정말 미래가 기대되는 분이다.
또 가족이 모여 운영하는 금속 공예와 주얼리 전문 공방이 있어 화제다. 60세에 글을 익히시고, 70세에 그림과 자수를 익혀 80세 되는 해 〈홍옥순 할머니의 바느질 이야기〉전을 여신 홍옥순 할머니와 그녀의 딸들이 직접 운영하고 만드는 아원공방이 그 주인공인데, 정말 작품 하나가 모던하고 유려해서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디자인을 품고 있다. 백동과 동, 황동으로만 만든 꽃과 새 모빌은 차가운 금속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투박한 따스함이 묻어난다. 꽃과 새가 모두 자연에 속한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푸른 빛을 내뿜는 줄기로 한데 연결한 것은 이 모빌의 백미가 아닐까. 이런 금속을 다루는 인아씨와 매장을 운영하는 인정씨, 그리고 목걸이나 귀걸이를 만드는 막내 인자씨까지 이 집안은 홍옥순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예술적 재능과 감각으로 제각각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꿰차고 있었다.
마지막으론 경북 봉화에 사는 류준화씨를 손에 꼽고 싶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여성예술가들이 대단한 분들이지만, 미천한 내 눈에 좀 이해될 만한 분들로 꼽은 것이다. 준화씨는 사회폭력에 대해 분노를 품고 대학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한동안 마음을 둘 곳 없어 대학을 떠나 미술 '황토'에서 작업을 하다가 남편을 만났단다. 그녀의 그림은 솔직히 아마추어인 내 눈으로 볼 땐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실물에 가깝고도 아름답게 그리다가도 2등신의 여인들을 내세우기도 하고 아예 네모진 몸매를 가진 여인들을 그리니, 그런 변화가 별로 맘에 들진 않는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선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이 더 좋으니까. 그러나 이 책의 표지에도 나와있지만 「물의 몸」이란 작품을 보면 그저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가. 아름답지만 어딘가 불온한 듯 보였던 이전 그림보단 훨씬 안정감이 곁들여졌다.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등뼈에서 가지가 뻗어나와 붉은 색 꽃을 피어낸 「꽃이 피다 지다 피다」만 봐도 시선을 잡아끄는 따스함이 느껴지니, 이것이 그녀의 힘이겠다.
세계 여러 곳에서 예술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미술가가 이렇게 많이 있다니 정말 놀랍고도 자랑스럽다. 하지만 여기에 나온 14명의 여성예술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더욱 많은 곳에서 이름이 있거나 없거나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며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부단히 자신을 이겨가고 있을 테니까, 우리의 미술계도 아름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