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백두산을 만나러 갔다가 산이 허락하지 않아 허탕만 쳤을 때 만난 허름한 옷차림의 조선족 노인에게서 건네받은 한 고문서로부터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을 만나면 꼭 그랬을 것 같은 느낌, 한편으론 그랬으면 하는 바람 사이에서 갈대같이 오락가락 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을 즐기는 나는 금방 책에 빠져들게 됐다. 두 권을 다 읽은 시간이 두 시간이 채 되지도 않을 만큼 책을 빠르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진정 그러했을 것 같은 광개토대왕의 성정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에 살았던 태왕의 호위무사이자 내관이었던 두절은 이렇게 아름다운 왕이 또 있느냐고 현재 2009년을 살아가는 나에게 물어보았을 땐 내 일평생 그런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것이 마치 내 마음대로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난 두절은 자신이 큰 행운을 거머쥐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물론 고구려 백성으로서 행복하지 못한 단 두 명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런 애석함조차 상쇄해버리고 말 만큼 그는 멋진 왕을 옆에서 모셨다. 그런 왕에게 아우이자 은인이고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않은가.
이 책은 완전히 허구이다. 처음엔 그런 고문서가 진짜 있었을까 싶을 만큼 완전히 빠져들었지만, 실은 그 서두부터가 허구다. 하지만 소설에서의 허구란 있음직한 일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꾸며낸 일이기에 어디까지나 ‘있음직한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태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70세쯤에, 큰아버지 소수림왕은 65세쯤에, 아버지 고국양왕은 70세쯤에, 아들 장수왕은 98세에 죽었는데 광개토태왕은 삼국사기와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39세에 죽었다고 나와있는 것이 어쩐지 의아하지 않은가. 실제로 나와있으니 기록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하나의 속임수였다면 어떨까. 만주벌판을 다 호령하고 호시탐탐 고구려 양민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납치해가는 비적들과 모용들과 왜와 백잔들을 무릎 꿇게 했던 광개토태왕이 역사에서 사라지기 전 2년 간은 이렇다 할 전쟁도 없었으니 이제 그만 나라를 위해서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게다. 밖으로는 노략질을 하던 오랑캐를 다 무찔렀고, 백잔과의 묵은 한도 다 풀어냈고, 아들 둘을 낳아 하나는 잃고 하나는 태자로 책봉했으니 왕으로써 할 일은 다 했다 생각했을 법도 했다. 그러니 이제는 왕으로써의 자신은 없애버리고 그저 한 남자로써의 행복을 찾으려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곳, 그러나 말은 통하는 곳으로 내려가 자신의 일생에 유일하게 품었던 한 여인과 오손도손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태왕은 그 일을 시행한다.
이 책은 태왕의 호위무사이자 최고 내관인 지밀내관인 두절이란 가상의 인물의 입을 빌려서 태왕의 그러한 일들을 말한다. 태왕과 동고동락했던 유일무이한 동생과 같은 존재, 태왕의 입으로 자신의 형제이며 분신이며 은인이라 불렸던 존재, 자신의 그림자라 불렸던 존재, 그래서 자신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질까 두려워 아들에게 그의 안위를 보살피라 명했던 존재, 바로 그러한 존재가 말하니 아마 사실은 아니여도 진실에는 가깝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소설은 허구이고 호위무사이자 지밀내관인 두절이란 존재도 허구의 인물일 진데 내 마음에는 결단코 허상의 존재가 아닌 것은 그가 말하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덕이 있는 지도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은 결단코 덕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전쟁을 위해 태어난 왕이라고 말하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세금을 일절 내지 않도록 하고, 왕을 죽이려 했던 반역자들에게도 죽음 대신 자비로 그들이 원하는대로 행해주는 그런 태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이 소설은 허구지만 진실이다. 이 자체로도 길이 남아야 할 역사책보다도 더 중한 그런 소설책!! 우리 역사에 이런 왕이 있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데에만 그치지말고 우리도 이런 자랑스런 후손이 되어야 할 테다. 그리고 그런 자랑스런 우리의 지도자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내어야 할 테다.
호화로운 궁궐보다 거친 들판을 좋아했던 왕
흔들리는 여인의 가슴보다 흔들리는 말 잔등을 더 좋아했던 왕
적들에겐 공포를, 백성들에겐 평안을 주었던 왕
전쟁이 나면 친히 말고삐를 쥐고 전쟁터에 나갔던 왕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서른다섯 번 싸워 서른다섯 번 모두 이겼던 왕
그래서 타국의 왕을 종처럼 부렸던 왕
타국의 왕에게 절대 머리 숙이지 않았던 왕
진실로 강한 자에게 취하여 약한 자에게 분배했던 왕
진실로 나라 밖에서 취하여 나라 안에서 분배했던 왕
그러면서 오직 한 여자만 사랑했던 왕
사랑해선 안 될 비천한 여자를 사랑했던 왕
끔찍이 그 여자를 사랑했으므로 차갑게 그 여자를 버렸던 왕
하지만 끝까지 버릴 수 없어 대신 왕위를 버리고 나라를 버렸던 왕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왕, 왕답지 않은 왕, 차라리 인간답지 않은 왕
우리가 생각하고 추측할 수 있는 것, 그 위에 존재하는 왕
진실로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도 있어본 적 없는 왕
그 거룩한 이룸, 왕위에 계실 땐 영락태왕
왕위를 버리셨을 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2권 p. 280~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