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사형수 -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고 싶습니다
김용제.조성애 지음 / 형설라이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마지막 사형수』라는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일단 암울한 이야기다. 김용제라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건 얼마나 참회를 했건 간에 그는 이미 1997년에 사형을 당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그저 어두운 이야기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감옥에서 지은 죄값을 다 치르고 그 어려운 처지를 이겨내어 다시금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제 평생의 일생 동안을 열심히 살아볼 만한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평생의 삶을 아픔과 상실과 분노와 방황으로 채워진 채로 그렇게 죽은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책을 읽을까? 아마도 그건 누구에게나 숨겨진 상처가 있고, 지금까지의 삶의 궤적을 돌아볼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게다. 그의 일기를 읽으면 내가 가진 많은 혜택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지 않을까, 혹은 그의 범죄는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그는 이해해줄 수 있지 않을까 란 어쭙잖은 생각으로 이 책을 골랐다. 그런데 '용서'란 것도 그럴 만한 그릇이 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만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다. 1991년 10월 19일 오후 4시경, 여의도 광장에 있던 시민들을 향해 한 대의 승용차가 돌진해 자전거를 타던 어린이 2명이 숨지고 21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잊지 못하는 날이겠지만, 사실 나는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었다.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을 시절에 일어난 아주 황당하고도 끔찍한 그 사건의 가해자가 바로 마지막 사형수 김용제 씨다.

 

그 사건으로 죽은 한 어린이의 할머님께서 김용제 씨를 면회가서 돈도 넣어주고, 옷도 넣어주고, "용서했다"고 울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땐,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저지른 사건 자체만으로도 끔찍하지만, 그가 이제까지 저질렀지만 발각되지 않았던 많은 범죄만 봐도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당연히 줘야 할 빚에 대해서 받으러 오는 친구에게 짜증을 부린다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에 있는 사람의 돈을 훔쳐서 유흥비로 써버린다거나 일을 못해서 해고하는 사장에게 해코지를 한다거나 돈을 주지 않는다고 강도짓을 한다거나 한 번 거절당했다고 사람을 찌른다거나, 일일히 열거하기가 귀찮을 정도로 그가 부린 패악은 끝이 없었다. 사실은 보는 내내 역겨워서 힘들었다. 나와는 생각 자체가 다른 사람을 처음 봐서, 어떻게 참을성이 하나도 없이 그렇게 막 나갈까 싶은 그를 볼 땐 그 영혼에 회생 가능성이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이것은 내게 있는 독특한 버릇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현상에 꼭 논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는데, "저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할 땐 저래서 그런 거야", "이 사람이 흉폭해진 것은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야", "어릴 때 경험한 나쁜 성(姓)적인 경험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거야" 등의 경우다. 그런데 김용제 씨는 그렇게 흉폭하거나 못나거나 좌절감이 힘한 사람으론 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정에 약하고 엄마를 그리워하며 의지력이 약한 그저 보통 사람으로 보였는데 그렇게나 쉽사리 극단적인 방법 - 폭력, 방화, 강도 - 을 쓰는 것이 내게는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건 그가 쓴 두서없는 일기에게선 그런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전문 작가가 이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쓴다면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눈물겹고도 절절한 스토리가 나왔을 테지만, 김용제 씨에게는 그런 말주변은 없을 테니까. 아, 이제서야 조금은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그가 툭툭 던져주듯 말해주었던 어린 시절의 사건 사건들이 사실은 그가 부르짖고 싶었던 아픈 기억들이었다는 것을. 아마도 가장 큰 사건은 어머니의 가출이었을 것이다. 무슨 형벌인지 아버지는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애인인데다가 어머니 또한 시력이 무척이나 나빴으니, 그 가정이 단단하게 결속되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가정 형편이라도 나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도 않고 성당을 다니는 어머니와는 다르게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았을리도 없었을 테니,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린 것은 어쩜 인지상정이었는지도. 하지만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곤 같이 살자고 매달리는 용제 씨에게 "넌 이젠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매몰차게 말하는 어머니라니~! 어느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머니의 가출과 어머니에게서 버림 받은 기억 때문에 지독하게 이를 악물고 성공한다는 놀랄만치 쉽고 간단한 스토리를 들려주는데, 역시 현실은 이렇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도 없이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어린 사내에겐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으니까. 게다가 일을 하려 해도 선천적으로 눈이 나빠 검사를 해도 시력을 찾을 수가 없는 그에겐 그마저도 사치였다. 글씨를 읽는 것은 고사하고 얼굴의 구별조차 안 되고, 종업원 노릇을 해도 물 따라 주는 것도 쉽지 않으니 그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였다.  

 

아마도 그의 눈이 멀쩡해서 조그마한 일이라도 성실하게 하고 그런 그를 인정해주는 좋은 사장을 만났다면 어머니에게 버림 받고 어머니가 개같이 느껴질 만큼 더러워보였던 그 지난 상처를 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눈 때문에 일을 못하니 밥 먹듯이 해고당하고, 해고당할 때마다 월급을 제때 못 받고, 그러면 분풀이로 강도짓을 하거나 공장에 불을 지르거나 금고를 터는 악순환이 계속 되니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어찌 이해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자살도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법. 워낙에 마음이 여린 그에겐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자살미수가 계속 되는 상황에서 나는 그가 너무 불쌍해서 그게 이루어지길 바랐다. 정말 인간으로서 못할 생각인데, 그에겐 너무 희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생각지 못했다. 최극빈자 생활을 했던 용제 씨이기에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도 살기 어렵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공장에 돈이 없어 밀린 월급을 못 줄수도 있었을 것이고, 밀린 방세를 안 낸다고 고소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들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것이었을 테니까.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당하는 용제 씨가 더욱 더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은 간과했던 것 뿐!! 사실 그럴 때마다 - 어쩌면 억울하거나 아니면 당연한 요구를 당할 때마다 - 용제 씨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했다. 그래서 아주 극단적인 방화나 강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지 모르겠다만, 이제보니 그가 이제껏 세상에서 받은 모든 아픔을 그곳에다가 쏟아부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면의 자아가 미처 자라지도 못했을 때부터 사회로부터 상처와 무시만 당해왔으니 쌓아놓은 분노가 폭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마도 용제 씨는 감옥에 갈 것이 아니라 정신과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제 안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든 상처와 분노를 쏟아냈다면 그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사고가 났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때도 안 묻은 어린이를 죽였기에 아마도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다. 내 동생이나 내 아이가 그렇게 죽었다면 나도 같이 비난을 했을 것이고, 사형 당해야 마땅하다고 울부짖었을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서자(사회적 약자)를 이제껏 팽개쳤던 정부가 적자(사회적 강자)의 심기를 달래주기 위해 서자를 죽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김용제 씨 하나만 죽으면 뒷처리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많은 성범죄자들, 특히 여성 지적장애인을 피해자로 삼는 성범죄자들의 처벌이 솜방방이 수준이라는 기사를 오늘 읽었다. 여성 피해자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강압적인 검사의 심문에 말을 이리저리 바꾼다고 아예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것도 성범죄 전력이 있는 가해자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성범죄에는 관대하게 대처하는 정부가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어쩜 이렇게 강경 대응을 했는지, 도대체 생각은 제대로 하고 판결을 했는지 묻고 싶다. 김용제 씨가 한 행동은 쓰레기였지만 그렇다고 김용제 씨가 쓰레기는 아니였기에 하는 말이다.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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