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버드의 어리석음 - 세상을 바꾸지 않은 열세 사람 이야기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세상을 바꾸지 않은 열세 사람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참으로 독특한 책이다. 우선 저자인 폴 콜린스부터가 독특한 사람인데, 스스로를 '잊힌 것들에 대한 따뜻한 기록자'라고 부르는 그는 날마다 도서관에 출몰해 희귀본 서가를 들락거리는 책벌레이자 골동품 수집가, 그리고 작가이자 교수이다. 대학원생 시절에 교수님이 시킨 19세기 잡지 전권의 목록을 복사하는 일을 하다가 맞닥뜨리게 된 잊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묻힌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이 촉발되었다. 그래서 그는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오랜 시간 다락방에 묻어두었을 만한 이야기를 케케묵고 고루한 옛것이 아닌, 생생하고 재미나며 친근한 이야기로 만들어냈는데, 이 책이 바로 그의 첫 책이다. 이 책은 잊힌 이야기들의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을 객관적 사실과 개인적 경험을 뒤섞는 독특한 일인칭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그래서 잊혀진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객관적인 근거를 조목조목 들어 제시하는 단조로움이 마구 뒤섞인 묘한 글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이 책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글은 워낙에 감정이 들어가있지 않게 정리되어 있지만 이 역사적인 사건을 바라보는 저자의 따스한 눈길이 느껴지는 터라, 저절로 푹 빠지게 되어 버렸으니깐 말이다.

 

이 책에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 열세 사람이 등장한다. 분야도 다양해서 문학가에서부터 화학자, 육종학자, 음악가, 천문학자, 사업가, 화가, 시인, 배우, 치료사, 작가까지 등장한다. 단순히 명성을 얻기 위해 열광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했다기보다는 그저 그것만이 자신이 살 길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것에 미쳐있어서, 그것도 아니면 그것이 진리임을 아무런 의심없이 믿었기 때문에 순진하게 시도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여기에 나온 사람들 중 이미 대단한 명성을 지닌 사람은 단 한 사람 - N선이란 방사선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르네 블롱들로 - 뿐인데, 그 외에는 이름도 없고, 존재도 몰랐던 사람들 뿐이다. 그래서 정말 독특하고 흥미롭다. 이미 가지고 있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를 거짓으로 만들어 유포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순진하게도 주장한 것이 마침 시대를 잘 만나 유행을 일으키고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나 나중에는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능력이 있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미처 잘 몰라서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꼴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콩코드 포도의 주인공, 이프레임 볼이다. 평생을 다바쳐 미국 땅에 맞는 포도를 품종개량으로 성공했으나 그것을 포도 가지째 팔아버려서 나중에는 알거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생명체에는 특허 출원이 안되는데, 만약 특허 출원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미 가지째나 씨째 팔아버리면 다른 사람도 쉽게 그 종자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돈벌이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가 만약 포도째 팔지 말고 포도의 향미와 맛을 가공해서 팔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여기에 웰치란 사람이 등장한다. 한 직업에 정착하지 못한 그는 목사였다가 의사가 되기도 했었는데 술을 먹지 않는 그가 보기에 성찬식용 와인을 마시고 헤롱거리는 성직자 때문에 포도주스를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웰치 주스이다. 그래서 웰치가 부자가 되는 동안 평생을 바쳐 연구한 이프레임 볼은 안타깝게도 새로움 품종을 또 만들려다가 사다리에 떨어져서 요양하다가 죽었다. 이렇게나 안타까운 일이!! 그는 정말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사람인데 말이다.

 

그 외에도 많은 독특한 사람이 있는데, 너새니얼 호손조차 안타까워했었던 여류 작가도 있다. 바로 딜리아 베이컨인데, 어릴 적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녀는 커서는 역사, 문학, 과학을 가르치면서 보냈다. 그녀의 수업은 진보적으로 각 학문의 분야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면서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뛰어난 지적 능력과 감수성과 작가로서의 성공할 수 있는 재능도 있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는 허구적인 인물이고 월터 롤리, 애드먼드 스펜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합작으로 작품을 만든 것이란 생각이었다. 지금도 심심치않게 나오는 그 이야기는 바로 그녀에게서부터 시작된 것!!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영국으로 갔던 그녀가 외적 증거를 찾아내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면 좋았을 것을, 끝까지 내적 증거를 사용해서 증명한답시고 6백 쪽이 넘는 『셰익스피어 희곡 철학 해설』을 썼으나 앞뒤가 모순된 내용이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 책을 쓰면서 현실과 과거를 오락가락 하는 그녀의 정신은 붕괴되어 버린 것. 사실 그녀와 서신을 교환했던 호손은 그녀의 창의력과 빛나는 지성에 찬사를 보내고 그녀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끝까지 지지해주었는데, 완전히 망가져버린 그녀를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했었는지... 정말 셰익스피어가 허구란 생각에 그렇게 매몰되지 않았다면 인류를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었던 지성인이었는데, 인류 전체를 위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의 헛된 욕망도 자제해야 할 것 같고,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것은 좋으나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증거를 들어 증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프레임 볼 같은 경우에는 정신은 멀쩡했으나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해 피폐해진 경우이지만 딜리아 베이컨의 경우에는 학문의 열정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준 꼴이었기에 인간의 열정은 무서운 것이 아닐까 싶다. 미치지 않고서야 학문의 업적을 달성할 순 없겠지만, 항상 다른 것과의 항상성을 유지해서 자신을 가다듬는 것이 필요할 성 싶다. 마지막으로 이 열세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니까 인류가 이만큼 성장한 것이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었음을,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진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