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글은 쓸 수 있는데 자기가 쓴 글조차 읽지 못한다면...? 만약 그 사람이 글 쓰는 것으로 먹고 사는 작가라면...?

 

정말 독특한 병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보통 읽기와 쓰기는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글은 쓸 수 있으나 그 자신이 방금 쓴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질환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실서증 없는 실독증이란 것으로 '알렉시아 사이니 아그라피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뇌졸중의 여파로 좌뇌에 위치한 시각 피질의 특정 영역이 같은 쪽의 언어 영역과 연결이 끊어졌을 경우에 생긴다. 완전히 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따라그리거나 손으로 만져보면 그 글자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언어 장애라 볼 수 없고, 단순히 단어 맹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질환을 이미 책을 열 권이나 냈을 정도로 잘 나가는 추리소설 작가인 하워드 엥겔이 앓았다. 바로 추리작가가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신문의 글자가 엉뚱한 나라의 글자로 인식되어서 뇌졸중이 아닌가 의심한 그는 모든 것을 처리하고 조용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그의 예상대로 그도 모르게 뇌졸중을 앓아 그 후유증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란다. 좌뇌 부분이 조금 손상된 것은 단어 맹증과 함께 시야의 1/4 정도도 같이 앗아가버려서 오른쪽 위부분은 보이지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우리 인간은 적응력이 뛰어나서 자신이 얼마만큼 시야가 가려진다는 것을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저 그 위치에 있는 어떤 물건이 안 보임에 따라 본인의 시야가 좁다는 것을 인식할 뿐, 평소에는 멀쩡할 때와 똑같이 시야가 다 보이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정말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스스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알지 못할 귀중한 정보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정보는 이 질환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알려줄 수가 있지만 이런 인식적인 부분은 오로지 환자 본인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 소중하다. 사실 이런 질환이 있다는 것도 이런 환자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뇌의학 분야이기에 하워드 엥겔에게 발병하기 전까지는 많은 연구가 되지도 않았다. 의학계에서는 그의 출현이 새로운 뇌의학 분야를 선사해 준 셈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작가인 환자가 자신이 어떻게 실독증을 극복해왔는지, 실독증과 함께 진행된 기억상실증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말해주는 현재진행형 분투기이다. 뇌신경학과 분야에서 대단한 권위를 가진 올리버 색스 박사가 쓴 다른 책에서는 객관적으로 어떤 뇌신경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있는지 알려주기만 했다면 이 책에서는 환자가 어떻게 느낄 것인지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것은 작가라는 그의 훌륭한 묘사 능력에 있을 것이다. 특히나 놀랐던 것은 그가 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진단을 받고 나서 도착했던 요양원에서 세 달이나 있었는데도 그 때의 기억이 뒤죽박죽이라는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의 집에도 다녀왔고, 길에도 나갔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 자신이 며칠만 있고 나왔던 것처럼 중간 기억이 사라졌던 것을 떠올리는 저자를 보면 좀 신기했다. 사람 얼굴도, 날짜도, 약속도 잘 기억할 못할 뿐만 아니라 알파벳이 전혀 엉뚱한 글자로 보이기까지 해 정말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가 책에 쓴 대로 글을 읽지 못하는것은 수많은 정보로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데 말이다. 그런 상황을 그는 소설의 집필로 극복해냈다.

 

물론 처음에는 독서지도사와 재활훈련 치료사, 간호사 등이 성심성의껏 그를 보살폈다. 자신을 담당하는 트레이너와 간호사의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어서 노트에 적어놓기도 하고, 연상 기법을 이용해서 머릿속에 붙잡아놓으려고 했던 그의 수많은 노력을 보노라면 역시 인간의 적응력에 대해 경외함까지 들었다. 재활치료가 다 마무리되어 이제 도와주는 사람 없이 자신의 집으로 온 다음부터는 아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하나씩 극복하기로 했다. 아직까지 부엌은 정신 없는 곳이라서 음식은 다 아들이 만들어주는데 그 외에는 집안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단지 매일 구독했던 신문지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끊었던 것 빼고는. 글은 아예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한 페이지를 보는데 다섯 시간 정도가 걸릴 뿐.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상하게만 보였던 알파벳이 이제는 알파벳처럼은 보이게 되었고(여전히 의미는 파악할 순 없어도),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을 터득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렇게 그저 숨만 쉬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소설을 쓰기로 한다. 물론 자신이 쓴 글을 읽을 수가 없기에 퇴고를 하기에 불편함이 있겠지만, 일단 저질러놓고 본다. 우선 컴퓨터에 적응하기 위해 켜고 조작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교정을 보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인데 그가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쓴 두 권의 소설은 바로 그렇게 나왔다. 몇 배나 더 시간을 걸려서 만든 그의 소설을 보면 인간의 위대함과 끈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워드 엥겔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만 즐기는 평범한 인간이지만,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무한한 끈기를 가진 절대 범상치 않은 인간이기도 하다. 정말 대단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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