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21세기와 소통하다
안희진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 살아가는 이유를 단적으로 말하면, 바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가 보통 행하는 '일'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행복에 더 멀어지게 하는 것일까.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식을 해야 한다. 많이 먹지 않고 몸을 많이 움직인다면 많이 먹고 적게 움직이는 것보다 더 몸에 좋을 것이다. 사랑을 베풀어주어야 하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측은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을 믿고, 정직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가치가 모두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혹 오히려 인간의 굴레가 되어 부자연스러워지지는 않을까. 장자는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추구하는 것 자체가 모두 그 이상에서 멀어지게 하는 허울이라고. 정직해야 한다는 말은 정직하지 못하다는 말에 상대적이고, 청렴하다는 말은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에 상대적이기 때문에 반대급부를 항상 의식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반대편을 의식하는 관념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이런 가치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한 진정한 것이 아니다. 이런 가치는 그 내면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명분처럼 밖에서부터 생겨난 것이기에 진정한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 이런 명분에만 매달리다 보면 이것을 자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강요하게 되기 때문에 그 폐해는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봐도 그렇지 않은가. 배타적 종교집단이나 그와 유사한 민족단위의 정치조직들이 추구한 '순수함' 때문에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생각이 진정한 것이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정직하기 위해서는 정직하다는 생각을 머릿속으로는 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환공이 관중에서 그의 후임으로 청렴한 포숙아를 재상으로 하면 어떠겠냐고 물었을 때, 관중이 포숙아는 절대로 안된다고 했을 때는 바로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자신도 포숙아는 청렴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는 신념이 너무 강한 나머지 다른 신하와 어울리지 못할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왕께도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 진정 청렴하기위해서는 머릿속에 실날만큼도 청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 재상자리에 어울린다고 말이다. 또한 머릿속으로 생각한 관념이 진짜가 아닌 이유를 우리가 익히 아는 고사성어를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커다란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을 가진 '대기만성大器晩成'은 원래 연유되었던 노자 41장을 보면 원래는 대기면성大器免成 이었다. "진정 커다란 그릇에 완성됨이란 없다"란 뜻을 가진 이 고사성어를 보면 완성됐다고 하면 더 이상 큰 그릇이 아니라고 풀이된다. 그러니까 진정한 실체는 인간이 생각하는 한계와 표현하는 범주를 벗어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커다랗다'고 하면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을 수 있으므로 작은 것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릿속으로 한계를 정해놓는 순간 그 범위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장자가 말하는 진정함이란 훨씬 근본적인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묵묵히 행하는 청소부나 만두 빚는 아저씨나 기계공은 자신이 세계에서 제일로 청소를 잘해, 만두를 잘 빚어, 기계를 잘 고친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하는 것, 추구하는 것,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가져야 할 행복의 근원인 것이다. 뭔가 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 고집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거나 혹은 본인의 자유 의사를 무시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얄팍한 행복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행복은 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