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낳은 뽕나무 - 사치와 애욕의 동아시아적 기원
강판권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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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를 뽕나무 하나로 볼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아주 신기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중국의 역사들, 혹은 새로운 역사들이 모두 뽕나무 하나로 귀결될 수 있다니 말이다. 뽕나무를 10년 간 연구한 저자가 이렇게 야심차게 『중국을 낳은 뽕나무』라는 책을 냈다. 얼핏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제목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개가 절로 주억거리게 될 것이다. 특히나 중국을 가리키는 영어단어 '차이나'가 비단을 가리키는 '지나'라는 말에서 왔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진시황제의 '진'에서 음역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바로 '중국을 낳은 뽕나무'라는 제목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의 대표격인 나라가 로마 제국이었다면, 아시아의 대표격인 나라는 바로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중국의 역사를 뽕나무 하나로 본다는 건 뽕나무의 위상이 그만큼 높다는 것일 테니 자아~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자.

 

중국의 역사가 하, 은(상), 주에서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나라로 이어지는 것은 다들 아실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2070년대 시작된 하나라 때부터 비단을 짰다는 것은 다들 아실런지~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라는 고고학적인 증거로 겨우 은나라의 존재를 인정받았지만, 그 전대의 하나라는 이렇다할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어 전승되는 최초의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가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사기》 〈하본기〉 같은 문헌의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라 우임금이 도읍한 산서성 해주의 안읍에서 가까운 하현 서음촌에서 중국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채도 문화의 유적과 포주 만영현에서의 앙소 문화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하나라가 중국 최초의 왕조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게다가 1926년에 발견한 하현 서음촌 유적지에서는 사람이 반으로 갈라 실을 뽑아낸 듯한 누에고치 껍질이 발견되었단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고치임에는 분명하지만 과연 누에고치인지는 논란이 일었다니 50%의 확률이긴 하지만, 하나라의 뒤를 잇는 은나라와 주나라의 시대에 고도로 발달한 잠상 관련 유물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누에고치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 하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잠상이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우와~ 대단한 나라일세~ 사진으로도 보았지만 은나라 때의 무덤에서는 옥으로 만든 누에가 출토되기도 했고, 갑골문에서도 잠상에 관련된 문자가 많이 나온다. 이렇게나 오랜 세월 이어져내려온 잠상기술이니 중국의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거란 예측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흔히 비단길로 불리는 서역과의 무역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비단은 중국의 위상을 높여줄 하나의 도구였다. 로마와의 교류에서도 비단은 으뜸이어서 로마의 의복체계를 바꿀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머나먼 서역까지 중국의 비단이 전해진 것은 바로 중국과 아둥바둥 세력을 겨루었던 흉노족 때문이었다. 중국의 힘이 다소 약해졌을 때는 비단 등의 공물을 바치면서 서로 유대관계를 도모해왔는데, 비단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받았던 흉노족이 다른 나라에게 가서 물건으로 맞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나라는 물론이고,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청나라, 명나라까지 교역품의 일순위로 비단이 빠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뽕나무 재배와 잠상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었다. 《맹자》 〈양혜왕〉에도 "5무의 집 가장자리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세 먹은 사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다"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을 만큼 잠상업은 농가의 수입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니 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잠상을 장려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나. 잠상업을 잘 일으키기 위해서는 잠상 관리사를 배출하기도 하고, 농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여기 나온 농서는 나라에서 만든 것은 아니고, 관리로서 몇몇 개인이 스스로 편찬한 것이 대부분인데, 인류 최초의 농서인 《범승지서》는 지금부터 대략 2000년 전의 농서이다. 우와~ 범승지가 편찬한 《범승지서》는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지는 않고 북위 사람 가사협이 쓴 《제민요술》에 일부 인용된 것만 남아있는데, 이 책에 제시되어 있는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높이는 방법 중 구전법은 청대까지 영향을 줄 정도로 획기적이었다. 2000년 전에 그런 지혜가 있다니~ 그리고 인류 최초의 종합 농서인 《제민요술》는 화북지역 농업 기술의 전모를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선조들의 여러 노력들이 모여서 찬란한 중국 문화를 만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왠지 좀 부러웠다.

 

대외적으로도 비단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중국 내에서도 화폐로 사용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았던 물품이었다. 그러니 비단을 많이 생각하는 지역의 화려함이란 거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을 것이다. 운하의 종착지인 항주는 다섯 겹을 껴입어도 사마귀가 보인다는 고급 비단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온 거리마다 비단을 휘장으로 두른 집집에 등이 켜졌다는데, 서양에서 온 마르코폴로에겐 얼마나 별천지로 보였을지 상상도 안 간다. 그런 위상과 부를 안겨준 뽕나무가 이제는 약용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니 정말 쓸모도 많은 나무다. 이렇게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보고 나니까 중국이 중화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뛰어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질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바로 뽕나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막연하게나마 든다. 이제 우리나라도 그런 뽕나무 연구 전쟁에 매진한다고 한다. 대단한 연구 결과가 쌓여있는 중국을 따라가기에 바쁘겠지만 우리의 근성도 알아주지 않는가. 앞으로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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