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 그림과 나누는 스물한 편의 인생 이야기
이명옥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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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나누는 스물한 편의 인생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인간이라면 한 번쯤 느낄 수 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서 그림과 함께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일기와 같은 책이다. 그림이라면, 화가라면 덮어놓고 좋아하는 나로선 대환영일 만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그림이란, 무심코 스쳐지나갔던 인생의 한 부분에 대해서 꼭 집어 알려주는 자서전과 같다. 내가 남과 똑같지 않다고 내심 차별을 두고 생각하면서도 - 그 차별이 나를 우월하게 생각하는 건지, 열등하게 생각하는 건지는 아직은 몰라도 -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런 사소한 감정을 느끼는 다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그런 안도감이 드는 것을 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열등하게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흔히 길로 은유되는 【인생】편을 보노라면 길의 화가라 불리는 이영희 화가가 떠오른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황톳길을 주로 그리는 그녀의 그림에는 무수하게 은유되는 수많은 인생이 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깨끗하게 포장된 아스팔트길보다는 인적이 드문 비포장도로나 인간의 흔적만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오솔길을 주로 그리는데, 그것은 화가가 바로 거기에 인생이 숨어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섬세한 표현을 위해 이영희 화가는 극세필용 붓을 많이 구비해놓고 끊임없이 그리고 그린다고 한다. 다른 현대적인 표현 방식을 빌리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노동력으로만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는 흡사 그녀의 그림 속의 황톳길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영희 화가가 길을 그린 것처럼 고흐도 구두 한 켤레를 그혔다.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화가마다 깊게 다가오는 소재나 표현양식이 다른 것처럼 똑같은 인생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데 있어 이영희와 고흐가 다른 소재로 그린 것은 세상을 관계로 인식하는 동양인과 세상을 명사 대 명사로 인식하는 서양인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내심 생각해본다. 어쨌든 길과 구두에서 느껴지는 감동만큼은 동서양의 구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 다음으로 솔깃했던 화가는 '행복의 화가'란 별명을 가진 르누아르이다. 평생을 아름다운 그림만을 그려 행복한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던 르누아르의 그림은 정말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법할 그림이다. 『뱃놀이 일행의 오찬』을 보면 젊음, 친구, 사랑, 대화, 여유, 음식, 술, 과일 등등 흥겨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고 부르짖는 르누와르 본인의 생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그 그림은 바라보기만 해도 흥겨운 기분이 들게 한다.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는 또 어떤가. 화목한 가정이라는 부제가 붙을 만큼 인자하고 선량한 부인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남매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지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평생 행복한 그림만을 그렸는데, 혹자는 그에 대해서 인생의 한 면만을 본 화가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모습이 예술가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삶 속에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다가올찌라도 그것을 견뎌내고 이겨내면 행복한 순간이 꼭 찾아온다는 희망을 주지 않는가 말이다. 그가 유명 화가였던 샤를 글레르의 제자로 있던 시절에, 스승과 맞부딪쳤을 때 그가 한 말이 그의 예술관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주었지 않았나 싶다.

 

"너는 오직 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구나. 정말 그런가?"

"물론입니다. 선생님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p. 98)

 

진짜 르누아르가 위대한 점은 그렇게 아름답고 밝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때, 그가 류마티즘성 관절염과 중풍에 걸린 상태라는 점이다. 자신의 처지가 힘들고 아프더라도 세상을, 인생을 아름답게 보았던 그였기에 그런 아릅답기만 한 그림이 공허하지 않고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드러내주지 않았나 싶다. 단지 그림만 예쁘게 그렸던 환쟁이가 아니라 삶을 아름답게 생각했던 위대한 예술가란 것은 여기에 차이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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