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시아, 그 바람이
신해영 지음 / 청어람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람이 불고 있다. 어디에서도 부는 바람.

어디로도 통하는 바람. 에테시아, 그 바람이.

 

아련하지만 도달하기 어려운 추억을 그렇게 말할까. 바람이라고~

나를 휘감아 이제껏 도달해보지 못한 그 어떤 곳으로 데려가는 바람이라고.

민영은 오빠에게 그리스 거물 기아니스 Y. 이아코바키스와의 거래에 통역을 부탁받아 에브게니아란 세계 최대 규모의 크루즈에 탑승했다. 

루즈에서 맡았던 바닷바람은 한국의 짭짜름한 소금기를 품지 않고 습기가 거의 없어 쾌청한 바람이었다. 아마 그래서 에테시아는 스물여덟 살의 민영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애원하고 구걸했던 그런 과거의 민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현실을 망각할 수 있게 했던 그런 기회였는지도.

 

한국계 입양아란 사전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그런 정보가 무색하게도 태어나면서 귀족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외모와 명령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의 특유한 무심함과는 또 다른, 작은 동작에서 보여주는 푸른 예기가 이아코바키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민영은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바람이, 에테시아가, 그녀의 인생에 불어왔다.

 

에테시아란 지중해 동부 그리스 및 소아시아 지방에서 4월에서 10월에 걸쳐 북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이다. 이 바람은 아조레스 고기압의 동쪽에 돌출한 봉우리 부분에서 아라비아 부근의 저압부로 불어오는데, 풍속은 그리 강하지는 않으나 지속성이 있어서 항해의 장애가 되어 왔단다. 그래서 이 바람은 강수량이 거의 없는 쾌청하고 건조하고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데, 한국과는 전혀 다른 바람이라 이 소설에서 일상에서의 탈피를, 추억과도 같은 아련함을 나타내는가 싶다. 꽁꽁 묶여놔서 자신에게 일말의 가능성을 주지 않는 민영은 입양아다. 다섯 살 때 한 번 파양된 경험으로 사랑받기 위해 구걸했던 어린 시절을 가진 그녀는 완벽하게 보이는 한 가정에 입양되었어도 그 상처가 지워지지 않아 스물여덟이 된 지금까지도 그다지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 완벽한 성공가도를 걷고 있는 양오빠 서준희에게만 제외하고.

 

남녀간의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의 인생에 남자는 오로지 서준희였던 단조로웠던 그녀의 인생에, 기아니스 Y. 이아코바키스라는 바람이 불어왔다. 한국인이면서 한국어는 전혀 못한다는 그는, 이아코바키스 가문의 실질적인 오너로 세상을 주무르는 대단한 권력자다. 차세대 대한민국 리더라 불리며 경제부 차관의 보좌관인 준희가 그의 크루즈 시장에 발을 들이밀려고 야심차게 준비한 카드가 바로 그녀, 서민영이었다. 어떤 경로로 얻은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실력자인 기아니스가 바로 그녀를 찾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해준 마리아의 딸이라는 그녀가. 서준희에게는 이번 사업에 서민영이란 카드말고는 들이밀게 없었다. 그 카드가 잘 활용되면 국가적으로도 좋은 일일 것이고 안 되더라도 그만일테지만, 그 바람을 맞게 될 민영이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에게 끌리지 않았다라면 거짓말일 테고, 15일간의 짧은 여정일 뿐인 일탈에 민영은 그가 제안한 하룻밤에 동의했다. 그녀가 누군가를 만나서 마음을 주기까지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는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 또한 그녀에게도 이것은 게임일 뿐일 테지만,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상황에, 낯선 충동도 허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로서는 전혀 손해가 아니라고. 하지만...가슴 깊이까지 스며들던 아름답고 아름다운 서늘한 눈만은 가슴에 남았던 것은 어찌할까.

 

그녀가 느끼는 아주 작은 인력을 그도 느끼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인력 후에는 필연적으로 척력이 온다고 그렇게 자위했지만 그렇게 끝나지만은 않았다. 그 날밤, 그의 비서가 뒷처리를 확실하게 한 이후로 그녀 마음에 계속 바람이 불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연히 그와 마주쳐도 그에게 관심갖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에게서 어떤 기별이 올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어도, 마음만은 달랐나보다. 준희의 일도 성사되지 않았고, 그와의 일탈 후유증으로 멀뚱멀뚱 갑판에 기대만 있는 그녀의 마음은 스산하기 이를데 없었으니까. 그저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재미없이 살아가는 것 뿐이니.

 

반면, 그저 한 번 즐긴 것뿐이라고, 게임판에 나온 졸을 한 번 손에 넣은 것뿐이라고, 평소 느끼던 경멸만을 느끼면 된다 생각했던 기아니스는 그녀가 가고 난 후부터 그저 짜증이 났다. 그런 여자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 신경이 쓰인 그녀이기에 손이 가는데로 그저 뻗었고, 그녀를 잡고나서야 짜릿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나서 크루즈에서 내리는 날인 7일 동안 그녀를 납치해버렸다. 서준희와의 점심 약속을 마치고 난 후에. 그리고 둘만의 사랑놀음. 그가, 그녀가 마음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그렇게 마음에 서로를 담고 그렇게 불 같은 나날을 보냈지만, 뿌리 깊이 드리운 민영의 불안에 둘은 아쉽게도 헤어졌다. 사실은 민영이 화를 냈지만, 그건 더 깊이 사귀면 상처받을까봐, 기아니스가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을까봐 그리 생각하곤 미리 쳐내버린 것. 평생 무언가를 원하지도 않을 것이고, 주어진 대로만 살아갈 것이라는 민영을 보는 준희는 사랑하는 동생이 그렇게 시름시름 말라가는 것이 안타까워 여러 노력을 한 끝에, 그를 기아니스 Y. 이아코바키스를 데려온다, 한국에.

 

끝내 한국에 온 그를 거절해버린 그녀는 이제 고맙다고, 이제 마음 속에 넣고 그를 음미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그를 보낸다. 바보같이~

설명하는 방법을 몰라서, 평생 누군가에게 설명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미숙하고 서투르고 낯설어 하는 그를 그렇게 버려둔다. 하지만 민영이를 사랑하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가 용기를 내도록, 사랑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것이라고, 누구나 밖에서 보면 그럴싸해보여도 안에서는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인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가족이 있기에, 다시 민영은 사랑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 고결해보이는 사랑은 평생 사랑이란 감정을 모르고 살았고, 그래서 사랑을 얻으려 노력해보지도 않았던 두 사람에게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닮았던 그들에게 내리는 하늘의 선물일까, 아니면 바람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