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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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노서아 가비라니~~ 표지에 커피 마시는 여주인공을 뻔히 보면서도 '노서아 가비'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었다. 이렇게나 눈치가 없다니... 그것은 보시다시피 '러시아 커피'를 말하는 것이란다. 고종이 살아있던 시절에 조선은 일본도 호시탐탐 노렸고, 청나라도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오고, 러시아도 가까이 있으려고 했던 그 시기라 러시아 커피가 흘러들어왔을 것이다. 이 혼란한 시기에 대대로 역관인 집안에서 역관을 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노서아 가비를 알았던 여주인공은 그 검은 액체를 홀린 듯이 바라봤었다. 너무 어려서 맛을 못 보았지만 아버지가 한 모금이라도 줄라치면 고개를 힘차게 내젓던 그녀는 자신이 상상하던 그 맛이 아닐거란 두려움에 노서아 가비의 향에만 한껏 취해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앞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긴밀해질 것이라는 아버지의 명대로 러시아말을 틈틈히 배워오던 여주인공은 어느 날, 러시아로 홀홀단신 흘러들어가야 했다. 역관이었던 아버지가 나라 물건을 가지고 도망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평생 나라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던 아버지의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일단 아버지가 대역죄인이 된 터라 그의 딸은 노비가 되어야 했기에 그녀는 부랴부랴 러시아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러시아말을 한다고는 해도 동양 여인이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크나큰 땅 러시아에서 살아가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천성적으로 말로 다른 사람들을 끌 수 있었던 그녀는 자신이 세계를 돌아다닌 탐험가라고 속이고서는 여러 카페에서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파티가 있는 날에는 마음껏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삶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따냐는 무엇이든 위조할 수 있는 천부적인 능력 때문에 얼음여우단과 함께 서유럽 귀족들에게 숲을 팔아먹는 사기를 치게 되었다. 협박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그냥저냥 살아갈 수 있었던 지라 한가롭게 그렇게 사기단으로서, 노서아 가비 애호가로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은 이반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마음을 흔들었던 그는 조선인이었다. 처음엔 얼음여우단의 일을 하던 중에 다른 귀족을 데리고 그가 나타났다. 한눈에 다른 숲 사기단임을 알아본 그녀는 그와 말을 하다가 조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시했다. 귀족들에게 두 배로 받고 그 돈을 갖고 튀자고. 그렇게 배신하기로 말을 맞춘 그와는 어딘지 모르게 통했다. 사기꾼으로서 다른 사람을 백퍼센트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본능적으로 마음이 가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으니까. 그 일은 아주 위험했기에 도움을 청한 장군에게 죽을 뻔했다. 하지만 구세주처럼 짠 하고 나타난 이반 덕에 목숨도 구하고 그가 조선인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선 애인이 되었다. 새로 갈범이란 사기단을 만들고 호기롭게 일을 여러 차례 벌렸었는데, 조선 사신이 러시아에 나타난 일로 이 사기단이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누구의 손에 계획된 것인지 짐작은 가지만 확증은 없었다. 모두 죽어버렸으니까. 어쨌든 다른 단원들은 죽었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조선으로, 이반의 품으로, 고종의 바리스타가 되었다.

 

사기꾼은 진실해선 아니 되고 정직해선 아니 되고 일이 끝난 후 같은 곳에 머물러서도 아니 된다.

삶의 원칙을 바꾸면 큰 낭패를 보는 법이다. 내게 궁궐이 가당키나 한가.(p. 192)

 

조선의 새벽별을 바라보며 출근해서 아침마다 고종에게 노서아 가비를 끓여다 바치는 일을 하는 따냐는 왕의 친구가 된다. 노서아 가비가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고종이 그녀에게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친구가 되어달라고 청했던 것!! 통역관으로 근무하는 이반도, 러시아 외교관인 베베르, 이완용도 다 그를 이용하려고 옆에 붙어있는 것임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러시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따냐에게서 친근함을 느꼈던 것일까. 하지만 따냐도 마찬가지였다. 사기꾼은 사기꾼인 법이지만, 왕후를 먼저 보내고 쓸쓸히 지내는 고종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래서 따냐는 그녀의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이반과 따냐는 서로 사기꾼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이였기에, 묻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그녀의 판단대로, 믿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 그렇다면 남는 것은 결국 커피밖에는 없는 걸까. 사랑보다도 남는 것은 결국.... 그것?! 그래, 그것은 그래도 배신하지는 않는다.

 

어쩜, 첫단추가 그랬기에 서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여기지만, 그래도 사랑은 흔적을 남긴다. 아무리 사랑이 아니였다고 생각하고, 그의 울부짖음이 끝내 자신의 추악한 욕망만을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랑은 사랑이었던 걸. 하지만 쿨한 그녀였기에 그런 모진 세월을 다 이겨내고 이렇게 살아남았지 않았을까. 약한 나라에 태어나 한 번도 왕이 될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왕이 된다면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던 고종 황제를 추억하면서 씁쓸한 커피나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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