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봉황 선덕여왕
김용희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 드라마가 나온다고 선덕여왕에 대한 소설이 줄줄이 나오는 와중에 이런 역사고증서가 나왔다. 처음엔 그저 표지도 이쁘고 제목도 맘에 들고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기라길래 이때껏 역사 소설이 부담스러워 미루던 걸 멈추고 골랐는데 그만 소설이 아니였다. 어머나!! 겨우 용기를 낸 소설이었는데~~~ 허나 태생이 소설 속에 감정 이입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인간인지라 오히려 내겐 딱인 책이었다. 1,400년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문헌 등을 참고하여 밝히는 일이 어찌 쉽겠냐마는 이 책을 찬찬히 살펴보니 선덕여왕에 대해서 우리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들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넘어갈 수 있었다. 특히나 초등학교 때 <김유신>의 위인전을 읽고 막연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어릴 적 환상이 여지없이 깨지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위인들의 거의 대부분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뗄래야 떨어질 수 없는 장군이나 정치가가 대부분인 것 같다. 외국의 위인들은 과학자에, 교육가에, 음악가 등등 정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등장한 것 같은데 말이다.

 

신라 27대 왕으로 부임했던 선덕여왕(덕만공주)은 어릴 적부터 많은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자연스레 보면서 성장해왔다. 그것은 작은할아버지이셨던 25대 진지왕이 폐위되고, 아버지 26대 진평왕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는데 24대 진흥왕의 부인인 사도태후와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큰 몫을 한 미실궁주가 그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덕만공주에 대한 기록 중에는 <삼국사기>에 너그럽고 인자했으며 두뇌가 명석했고 행동은 민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화랑세기>에는 용과 봉황의 자태와 위용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랬던 덕만공주가 여성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녀가 왕으로서 가져야할 능력과 미덕을 차차 키워가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덕만공주의 자매들에 대한 기록이 확실치가 않다. <삼국사기>에는 덕만공주가 장녀라고 되어 있으나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가 언니고 덕만공주는 차녀로 나온다.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는 보통 셋째로 알고 있는데 기록이 전혀 없어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그 당시에 백제와 신라는 수차례 전쟁을 벌였기에 국적을 초월한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선화공주가 지었다고 알려진 미륵사지 석탑에는 선화공주의 유물이 아닌 백제 사택적덕의 따님인 왕후의 유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라고 생각했던 내 상상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다. 쩝~ 또한 신비스러운 것은 덕만공주의 출생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진평왕의 생몰연대와 덕만공주의 언니인 천명공주가 낳은 아들 김춘추의 나이로 대략 계산을 해보면 선덕여왕은 대략 45세 전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왕위에 올랐단다. 얼마나 힘들게 올랐으면 자기 아버지가 13살에 올랐던 왕위를 중년의 나이에 오르게 된 것인지~~!!

 

여기서 신라 최고의 팜므파탈이라 할 수 있는 미실에 대해서 설명이 빠지면 섭할 것이다. 미실에 대한 소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가 이 책을 읽고는 정말 충격에 빠졌다. 그 당시 신라에서는 여성이 남녀관계의 음사를 잘하는 것이 흉이 아니라 자랑거리였다니~~!! <화랑세기>에 있는 기록을 보면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하고 명랑하였으며 아름다워서 백화의 영검함이 뭉쳐져 있는 미실은 총 일곱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그 중 왕만 해도 세 명이나 되어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26대 진평왕과 모두 관계를 맺었고, 남편인 세종(지소태후의 아들, 6세 풍월주), 사다함(5대 풍월주), 설화랑(7대 풍월주), 동륜태자(진흥왕의 큰아들)와도 관계를 맺었단다. 특히나 신기한 건 이 당시에는 근친혼, 형사취수제, 자매혼 등과 같은 왕실의 혼인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가 이웃인 백제와 고구려보다 문화적 진화가 늦어서 그렇다는데, 신라에서는 친인척간의 혼인으로 모계를 계승하는 대원신통(미실 쪽)이나 진골정통(덕만공주)을 이어가려고 했단다. 그래서 미실이 그렇게나 많은 남자와 성관계를 맺어도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능력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미실이 살아있었다면 덕만공주는 여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계통이 아니니~ 미실이 70세 전후 쯤에 세상을 떠나고 진골정통인 만호태후의 보호를 받는 마야부인과 진평왕의 시대가 되어서야 그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마야부인은 덕만공주의 언니인 천명공주에게 후사를 받아 왕위를 계승하려고 마음을 먹고 진지왕의 아들 중 용수와 결혼을 시켰다.(이게 바로 근친혼이지~) 그러나 천명공주는 용수의 동생인 용춘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다시 한번 용춘과도 동침을 했다고~~ '정숙' 뭐, 이딴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신라 왕실의 사람들은 후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마야부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전히 판도가 뒤바꿔버렸다. 진평왕은 자신을 닮은 덕만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으로 천명공주의 후사가 왕위를 잇지 못하도록, 또는 덕만공주가 왕위에 올랐을 때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궁궐 밖으로 내보내고 덕만공주와 용춘을 결혼시키고 왕위를 잇게 했다. 사실은 용춘이 미실과 같은 계통인 대원신통이었기에 그가 풍월주가 되거나 풍월주가 되기 전 과정인 부제를 발탁할 때 능력은 차고 넘쳤음에도 용춘이 뽑히지 못한 것은 진골정통 계통인 만호태후가 덕만공주 등의 진평왕의 자식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용춘은 덕만이 왕이 될 것을 알고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덕만의 사신이 되어 그녀를 후원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덕만과 용춘이었기에 서로 든든한 아군이 되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그렇게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혹자는 그녀의 정치력이 약해서 재위동안 사찰밖에 지은 일이 없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과연 선덕은 그것만 했을까. 불교가 한 나라의 근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백성들의 지지가 필요할 것이다. 왕이 그저 사찰을 지었다고 해서 그게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완전 도루묵이 아닐까. 그런데 그녀는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 큰 사찰을 지어서 그 주변으로 시장이 열리게 해 경제를 활성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정신적 구심점까지 만들어둔 것이다. 민간신앙에 머물렀던 백성들의 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 아닐까. 또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구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 어찌 성군이 아닐까. 선덕여왕이 유폐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부인사에서 아직까지도 '선덕여왕 숭모제'가 열리는 것을 보면 혹자들의 평처럼 선덕은 정치를 못한 왕은 아님에 분명할 것이다. 상대등 비담의 선덕여왕에 대한 반역도, 호국공신으로만 보였던 김유신의 활약도 숨겨진 베일처럼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지는 확실히 알지는 못해도 선덕여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이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근친혼이 당연시될 정도로 미개했던 그 당시에 백성을 위한 구휼이 있었다는 것만 봐도 그녀는 정말 시대를 뛰어넘는 성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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