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두의 우연한 현실 사계절 1318 문고 54
이현 지음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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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1318문고는 사계절에서 나온 열세 살에서부터 열여덟 살까지의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꾸며놓은 현대문학선이다. 이 녀석과 내가 만난 지도 꽤 된 것이 벌써 햇수로만 해도 6년째다. 처음 봤던 책이 아마 미리암 프레슬러의 <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였던가. 독일 소설답게 정말 건조한 문체로 진행되는 고아 아닌 고아 소녀가 행복을 감지해가는 이야기가 가슴 벅차게 그려진다. 얼마 전에 봤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다른 남자> 때문에 "독일 문학은 다시는 안 봐!"라고 생각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도 역시 독일 문학이다. 또한 논술지도사 수업에서 필독서로 만난 게리 폴슨의 <다리 건너 저편에>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내겐 사계절 1318문고가 너무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부터 찾아서 보게 된 것이 신시아 라일런트의 <그리운 메이 아줌마>, 페터 헤르틀링의 <크뤽케>, 로버트 뉴턴 펙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코닉스버그의 <거짓말쟁이와 모나리자>, 게리 폴슨의 <손도끼>, 지크프리트 렌츠의 <아르네가 남긴 것>, 커플책으로 크리스티앙 그르니에의 <내 남자친구 이야기>와 <내 여자친구 이야기>까지 아주 빠져서 읽었다. 처음엔 외국 작가들의 책만 즐겨 찾았었는데, 한국 작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들어 많이 생겼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점차적으로 한국 소설에도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수필집으로 엮은 <사람 사이에 삶의 길이 있고>와 <조금만 눈을 들면 넓은 세상이 보인다>도 있고, 박상률 님의 <봄바람>, <나는 아름답다>, <밥이 끓는 시간>이나 채지민의 <내 안의 자유>, 한창훈의 <열여섯의 섬>까지 다 좋았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 바로 이현의 <영두의 우연한 현실>인데 아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사실 언니 방에서 뭘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이게 사계절 1318문고란 것을 알고 바로 업어와버렸다. 이 책을 보면 요즘 청소년 문학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래도 현재 청소년 아이들의 현실에 반영된 이야기여야 하기 때문이겠지만, 난 조금 씁쓸했다. 더 이상 잔잔하고도 심오한 이야기보다는 약간 자극적이고도 말초적인 이야기만 보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어쨌거나 요즘 청소년 문학의 현주소를 볼 수 있었단 것으로 만족한다.
 
단편집으로 된 사계절 1318문고는 처음인데, 이야기는 총 여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친구이기만 했던 이성에게 좋아하게 되었다가 고백도 못하고 실연하게 된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어떤 실연>, 이 책의 표제작이자 다중 우주이론을 토대로 한 <영두의 우연한 현실>, 강간과 사랑의 사이를 고민하게 되는 십대 소년을 다룬 <빨간 신호등>, 우주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바쁜 현실을 비판하는 <로스웰주의보>, 정리해고를 당하고 나서 알콜 중독으로 도피해버려 한 가정의 꿈과 희망을 무너뜨린 한 가장의 죽음을 통해 부모와 자식간의 올바른 소통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그가 남긴 것>, 청소년 인권 문제에 화두를 던지는 <오답 승리의 희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 깜짝 놀랄 정도로 적나라한 청소년의 현실을 보여준 <빨간 신호등>이나 무너져가는 가계 경제로 인해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있을까 생각하게 해준 <그가 남긴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의식을, 성교육을 하지 못해 우발적으로 강간을 저지르게 되는, 그러나 그것이 왜 잘못인지도 혼란스러워하는 한 십대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이 과연 바른 것일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왔던가, 자문하게 했다. 영어 좀 더 잘하고, 수학 공식 하나 더 외우고, 수행평가 챙기는 것이 다가 아닌데.... 사실은 인간을 어떻게 대하고, 여성을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같이 의논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일 텐데 우리네 가정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부모-자식이 얼마나 있을까. 암암리에 야동을 구해다 보는 것이 일상사가 되고, 그것에게 주워들은 성지식이 전부인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바른 성의식을 심어줄 수나 있을까. 나도 어른이지만 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시킬 수가 있을까. 민망하다고 쉬쉬하고 넘어가버리면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뭔가 문제는 생기고야 말 것이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지만 정리해고를 당하고 그 울분을 소주로 풀다가 당뇨 합병증을 얻어 끝내 죽은 한 가장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공부는 꽤 잘했지만 아버지의 입원비용과 약값으로 가정 경제가 기우는 탓에 상고로 전학을 간 딸은 중학교 때부터 알바를 하며 아둥바둥 살아가려고 애쓰는 반면, 아버지와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술이나 먹지를 않았으면 당뇨로 병원 신세는 안 졌을 것인데, 그랬다면 엄마가 고생스럽게 나가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집이 넘어가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하며 아버지의 무능력한 모습을 극도로 격렬히 증오했다.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아버지는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다고...꿈도...희망도...행복도... 한탄하며 오열하는 딸을 보면서 돈을 못 벌어다 주는 가장은 그렇게 무시해버려도 될 존재인지, 아니면 해고를 당했다고 자신의 삶을 그저 그렇게 포기해버린 그런 아버지를 비판해야 할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그저 다만 그런 아버지가, 그런 자녀들이 너무 불쌍했을 따름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감정적 공허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런지, 나는 그게 제일 걱정되었다. 아마도 내 어딘가에도 그렇게 메말라버린 눈물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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