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이라는 화가는 유명하지만 내겐 고흐라는 화가를 떼어놓고는 별로 할 말이 없는 화가이다. 이국적인 미를 추구해서 타히티와 같은 원주민들이 사는 섬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 말고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나왔듯이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화가가 고갱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니 얼추 고갱에 대한 이미지는 그려졌다. 그 소설의 뒤에 나오는 해설에서 그런 내용을 얼핏 본 듯도 싶었는데, 그 소설을 본 지가 거의 6년이 넘은 상태라 바로 연결을 못 시켰다. 그 소설을 읽은 당시에는 고갱이라는 화가의 광적인 재능과 인생에 호감은 일었지만 그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었나 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고갱이라는 화가도 고흐만큼이나 비운의 화가였던 것을 새롭게 알았다. 그래도 고갱은 강인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흐만큼이나 비참하지는 않았을런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항상 빈곤하게 살았던 것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생전에 자신의 그림을 모두 모아 경매를 했지만 49점의 그림 중에 단 10점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게다가 그 당시엔 1백 프랑에 팔렸단다. 그런 그의 그림이 지금에와서는 판화는 2~3천 달러에서 출발하여 최고 6천 달러(단쇄판화 <앉아서 등을 보이는 누드의 타히티 여인>)까지 팔리기도 하고, 조각과 드로잉은 훨씬 높아 <타히타인>은 거의 1백만 달러에 육박하기도 하였단다. 회화는 더 비싸서 <백합 사이에>는 1천만 달러에 거래되었다고 하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지~ 그 많은 돈은 누구에게로 흘러가는지 몰라도 이것의 가치는 고갱에게라거나 하다못해 결별한 아내나 자녀들, 그와 동거한 많은 여인들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은가 말이다.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Art Book' 시리즈는 한 화가에 대해 설명해줄 때 그가 영향받은 화가와 영향 준 화가, 그 당시의 시대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기 때문에 유추하기가 아주 쉬웠다. 특히 영향을 주거나 받은 화가들의 그림도 같이 실어놓아서 쉽게 이해하게 되었다.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짧게 체류하면서 결성한 모임이 바로 '퐁타방 화파'인데, 인상주의의 주역이었던 고갱이 점차 종합주의와 클루아조니슴이라는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모양새를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림을 꼽으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사람은 야콥 메이어 드 한으로 고갱의 제자이면서 후원자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정물화를 잘 그렸는데 내 마음에 쏙 든다. 또 다른 그림은 페르디낭 뒤 퓌고도의 <등 아래 브르타뉴 소녀들>로 등불에 비쳐 투명하게 보이는 레이스 보네트의 표현이 아주 사실적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찍으니까 그런 투명함이 생생하게 나타나지 않아서 야콥 메이어 드 한의 정물화만 소개한다. 게다가 고갱이 조각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정말 신기했다. 모양이 너무 유려하고 멋지기 때문에 내 가슴이 설렐 정도였기 때문이다. 회화에도 정통하면서도 조각까지 잘 하다니 정말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싶다. 사실 베트탱 증권거래소에서 근무하면서 소일거리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그이기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알았을 것 같다. 누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아쉬워하지만 그것을 돌이켜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이라면 확고한 결단력이 없어서는 안될 테니까 말이다. 이런 고갱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런 성품을 지니지 못했던 고흐가 참으로 안쓰럽게 느껴진다. 또한 고갱은 인물화만 그린 것이 아니라 정물화도 가끔 그렸었는데 별로 자신이 있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성심성의껏 임했단다. 그의 성실한 태도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인물화보다는 그의 정물화가 더 마음이 끌렸다. 그의 인물화 중에서는 자화상이 제일 좋고 그 다음에는 거의 유일한 타히티의 젊은이의 그림이다. 내가 남자의 모습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타히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지만 아마도 그는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형화된 모습을 버리고 이국적인 곳에서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했고, 그것들과 함께 살다가 죽어간 것이 그에게는 평안이었는지도~~ 처음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색상과 소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그림이 있었기에 상징주의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은 너무 안타깝지만, 아마도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그의 그림에 원시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볼만 하다. 평안과 안주함에서는 절대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아름다움이 살아 숨쉬기엔 어딘가 부족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