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The Present
정다움 지음 / 발해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사람은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으러 살아가는 거예요. 바로 시한부 인생인 거죠. 그 기간이 하루가 될 수도 있고 일 년이 될 수도 있고 30년, 60년, 길게 100년을 산다고 해도 그 끝엔 언제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거지요. 돈이 많든 적든, 화장이 돼 육신의 재가 훨훨 뿌려져도, 아무리 넓은 땅을 차지하고 묻혀도 결국은 다 똑같은 끝인 거죠.”

 

인간의 삶을 시한부 인생이라고 여기며 오늘 꼭 재미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하는 여자, 서재인.

미래를 바라보며 성공을 이루었으면서도 과거의 한 자락이 발목을 잡아 엉거주춤 멈춰선 남자, 이준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아마 운명적이었을까. 운명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걸까.

 

외국계투자회사에 다니는 재인은 촌스러우면서도 묘하게 그녀에게 어울리는 뽀글이 파마를 하고 몸매를 전혀 드러내주지 않는 회색 슈트에 바닥에 딱 달라붙을 만한 펌프스까지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오늘도 어김없이 씩씩하게 하루를 산다. 지하철에서 변태 때려눕혀야지, 대현그룹의 회장이 쓰러지신 것이 금융계에 어떤 현상을 일으킬 수 있을지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야지, 사내에 새로 부임한 지사장의 속내와 그를 둘러싼 여러 정황을 파악해야지...

천재적인 기억력과 그로부터 파생된 정확한 분석력과 추리력으로 어딜 파고 어딜 건드리면 돈이 될지를 아는 그녀는 사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은연중에라도 도움을 준다. 아마도 그녀의 부서에 있는 직원치곤 그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좋은 학벌에 좋은 능력에 뭇 여성들의 질투를 받을 만도 하지만 도움을 줬다고 생색을 내지도 않고 어느 때라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그녀에게 질투하는 여사원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뽀글이 파마가 가장 큰 공헌을 했지만.

 

뉴욕 본사에 발령난 전 지사장 대신 새로운 지사장이 부임을 했다. 그가 바로 이준하. 십대 때 떠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느 한 사람 표정이 있는 사람이 없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고국과의 조우를 한 그에게 뽀글이 여성의 변태 때려잡는 모습은 환상적으로 유쾌한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모른 채로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다니.

이래서 운명이라는 말이 생긴 걸까. 바로 그 뽀글이가 그의 회사에 다니다니, 그것도 압도적인 기획안을 제시하고서, 그것도 자신의 목구멍을 조이고 있는 바로 그 대현그룹에 대한 기획안을 제출하고서 말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시나리오를 뛰어넘는 그 기획안으로 그 뽀글이, 아니 서재인은 지사장의 대리가 되었다. 물론 많은 사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뽀글이와 자연스런 일처리로 윗사람들에게 그다지 깊이 각인되지 않았던 그녀는 하루아침에 파격승진을 했던 것.

 

솔직히 요즘에는 가시적인 매력이 없으면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자신의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질투하게 될 상황을 막고자 화장도 안 해, 쇼핑도 안 해, 그야말로 폭탄인 상태로 지내는 그녀, 재인의 매력에 준하는 푹 빠졌다. 처음에는 특이한 외모 때문에, 그러다 비범한 능력으로, 마지막으로 그녀 주위에 맴도는 멋진 남자들로 인해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결정적인 이유는 감히 그 누구도 눈을 직접 마주치지 못하는 그에게 할 말은 다 하다가도 그가 힘들 때는 단지 몇 마디로 마음을 따스히 감싸주는 그런 마음씀씀이 때문일까.

 

과거의 상처로 인해 아파하는 준하에게 재인이 해준 말.

아홉 살 때부터 미련이 남지 않도록 매일 매일 재미있는 일을 하려고 했던 재인의 인생 모토.

 

“사람들은 무심하게 오늘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꼭 해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내일이 안 올 수도 있다는 걸 자꾸 잊어버려요. 만약 내일이 없다는 걸 미리 안다면 오늘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러니 내일 당장 인생의 끝이 온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게, 미련이 남지 않도록, 매일매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거예요.”

 

대놓고 부아가 치밀도록 밉상으로 말을 해도 싱글싱글 넘어가버리고, 양다리를 걸치냐는 비아냥에도 꿋꿋한 재인에게 남자의 자존심으로 버텨보지만 더 이상 당할 재간이 없다. 처음부터 남자를 자신의 인생에 들여놓을 생각이 없었던 재인은 그저 상황에 맞게 맞장구쳐주고 두루뭉술 넘어가려고 했지만 자존심도 버리고 달려드는 준하에게 당할 재간은 없는 셈.

그렇다고 이렇게 싱겁게 이루어질까. 아니다. 준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재인을 이해하려면 끝까지 봐야한다. 그녀의 가슴 깊이 묻어있는 두려움을. 그 두려움을 이겨냈을 때야 비로소 과거에 얽매여 살았던 준하에게도, 현재만을 위해서 살았던 재인에게도 새로운 인생이 열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정말 오랫만에 내 가슴을 적시는 멋진 로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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