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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을 질주하는 법
가스 스타인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나에게 마음의 안식일 때도 있고, 피난처일 때도 있고, 그리고 도피의 대상이 되기도 하다.
나에게 이번 주는 정말 어디론가 숨어버리고만 싶었던 나날들이었다. 세상에서 내 모습이 절대 보이지 않게. 꽁꽁. 그럴 때마다 나랑 함께 한 것은 바로 책이었다. 바로 책 때문에 문제가 생긴 때도 있지만..=.= 이번 주는 무지하게 읽어댔다. 읽은 책은 무조건 서평을 쓰려고 마음 먹었던 나이지만 읽는 속도를 서평 쓰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무지 읽어댔다. 이 책 말고도 내 서평을 기다리는 게 세 권이나 더 있는데 오늘 안으로 쓸 수 있을까. 이렇게 밀려 있는 기분으로 책을 읽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다. 꼭 화장실에 가서 뒷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온 것처럼.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날 쏙 빨려들어가게 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중요한 회의가 있어 어떤 책인지 간만 보려 했었을 뿐인데 새벽까지 줄창 읽었다. 결국 그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이 책은 누가 봐도 전혀 후회할 수가 없는 책이다. 중요한 회의와 맞바꾼 책!!! 두둥!! <빗속을 질주하는 법> 제목만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를 것 같아 잠깐 풀이해보면 여기 주인공 데니는 카레이서이다.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대단한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멋진 남자인데 운과 배경이 없어 아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마른 땅보다 다른 카레이서들이 싫어하는 젖은 땅에서 더 잘 달리는데 그만큼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제목에 나온 '비'는 이것과 비슷하게 그의 인생에서 다가오는 어려움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데니는 잘 달릴 수 있겠지.
이 소설에서 가장 특이할 점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인데 그 관찰자가 주인공 데니의 개인 '엔조'라는 것이다. 어쩌면 여느 인간보다 더 사려깊고 철학적인 엔조는 나중에 꼭 인간으로 태어날 것을 꿈꾸는데 데니에게는 꿈과 인생을 나누는 동반자라 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날 데니와 함께 카레이싱을 논하며 인생을 즐기다가 아름다운 침입자를 만나게 된다. 데니가 푹 빠져버린 이브가 그 주인공. 이브의 등장으로 데니와의 교감을 나눌 시간이 줄어든 것은 불쾌했지만 데니를 위해서 참는 엔조는 그들의 딸 조위의 등장으로 더욱더 데니의 가족에게 헌신하게 되었다. 그런 엔조가 여느 개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 처음부터 이브와 엔조의 관계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데니가 빗속에서 젖지 않는 것처럼 운전하는 법을 알려준 뒤부터 엔조는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기로 했다.
내가 증명할 건 앞에 있다.
엔조에겐 이브는 비였고, 예측 불가한 요소였으나 그 모든 위험까지도 포용하기로 마음먹은 엔조는 이브와의 거리를 좁혀가기로 했다. 데니가 퇴근하면 항상 데니 곁에만 찰싹 붙어있던 엔조가 이브가 저녁을 준비하는 식당에 가서 어슬렁거리자 점차적으로 이브도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자신의 약점을 고치고 노력하여 두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상처만 핥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몇몇의 인간들보다 더 낫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엔조는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멋진 존재이다.
데니에게 일어난 첫 번째 시련은 이브의 죽음이다. 머리에 종양이 생긴 것을 너무 늦게 발견한 이브는 어린 딸 조위를 두고, 그녀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데니를 두고 먼저 떠난다. 그녀가 아팠을 때 데니에게 카레이서로 이름을 날릴 기회가 왔음에도 이브를 간호하기 위해 버린 데니를 두고 가버린 그녀.. 그것이 첫 번째 시련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번째 시련은 이브의 부모님이 조위의 양육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보통은 생물학적 아버지에게 양육권이 주어지기 마련인데 장모님의 친척 조카 중 한 소녀가 데니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신고했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실은 그 소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앙심을 품은 소녀의 농간이었지만... 재판에서는 그것을 밝힐 수가 없다. 성범죄자로 등록이 되면 아이를 잃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로 갈 수가 없어 카레이서로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그래서 데니의 양육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아이와의 방문일을 정하고 성범죄자로 등록되지 않도록 하는 회유책을 들이미는데...
세차게 퍼붓는 빗속에서 데니가 미끄러지고 있을 때 그의 동반자 '엔조'는 무엇을 했을까. 정말 엔조는 그의 동반자가 맞다. 그가 미끄러져 우왕좌왕 했을 때 그를 도와주고 정신차리게 해주었으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그만큼 그에 대해 믿는 뭔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테지. 엔조가 생각하는 데니는 어떤 사람일까.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데니는 절대로 섣불리 무릎 꿇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여기선 '사람'이 아니라 '개'이지만.^^ 그렇기에 바닥에서 무너진 데니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거겠지. 사람과 개와의 우정을 그린 책들의 모임이 있다면 아마 이 책이 일등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