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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혁명 - 로렌스 시선집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D.H. 로렌스의 외설 시비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그외의『아들과 연인』『무지개』『연애하는 여인들』등을 아쉽게도 아직 난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시선집을 보고 나니 왜 외설 시비가 있었을지 상상이 간다. 시에서도 농익은 듯한 에로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 소설이랴 더 말해봐야 무엇하겠나. 사실은 이 시선집을 보기 전에 책 뒷장에 있는 해설집을 보고선 그의 일생이나 그의 작품에 더욱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로렌스가 과거 자신의 프랑스어 선생의 부인이던 여섯 살 연상 프리다 폰 리히트호펜 위클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 배경을 이해하고 나니까 그의 시 전반에 흐르는 이상기운을 손쉽게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위의 눈총을 못 이겨 그들은 대륙으로 도망치고, 프리다의 이혼이 마무리된 즉시 결혼을 했지만 세 아이를 버리고 선택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이 얼마나 파장을 일으켰을지 눈에 선하다. 그런 결함을 안고 시작한 사랑이기에 내가 상상했던 편안하고 아득하고 보호받는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위험하고 날카롭고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사랑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로렌스의 시를 보면 사랑을 하면서도 아쉽고 불안하고 심지어는 원망에 섞인 탄식까지 들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뒤돌아본다>를 보면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는 모성애는 저주해야 마땅할 감정이 되었고,
롯의 아내! ----- 아내가 아닌 어머니. / 난 당신의 모성에 악담 퍼붓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소. / 저주받아 소금기둥이 된 당신. / 난 당산으로 인하여 모성을 저주하게 되었지 / 욕먹어 마땅한 이기적인 모성이여! /
<어둠속에서>를 보면 상대에게 느낀 사랑이 마력으로 작용하여 자신을 홀렸다고 비난하고,
"당신 뭣하러 창가로 갔소? 왜 잠들지 못하오? / 어떻게 날 깨웠소? ----- 아니 왜, 왜 울고 있소?" / "나는 당신이 두려워요, 정말, 정말로 두려워요! / 당신에겐 날 허물어뜨리는 뭔가가 있어요--------!" / "당신은 꿈을 꾸었고 아직 잠에서 덜 깼소, 이리 내게로 와요." / "아뇨, 난 개어 있어요. 당신, 당신은 잔인해요." /
<메달의 양면>을 보면 사랑 때문에 증오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하기도 하고,
당신은 날 사랑하기에 / 날 증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 하하! 당신은 날 지극히 / 사랑하기에 / 날 극도로 증오할 수도 있는 법. / ...(중략)... / 의심할 여지 없이 나 이승을 하직하면 나를 따라 / 당신도 죽음의 세계를 찾는 건 필연 / 하지만 당신의 사랑보다 증오가 더 거세게 분출되지 않을까요? / 격정에 싸여 끝 모를 당신의 증오가? /
<그녀도 내게 그렇게 말했다>에서는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버럭대기도 한다.
"날 감촉하려고도 감상하려고도 하지 말아요. / 그건 일종의 추행일 수 있으니까. / 울타리에 있는 족제비를 쓰다듬기 전 당신은 두 번 생각해야 했어요. / ...(중략)... / 내겐 당신을 주저케 하는 게 아무것도 없나요? / 진실로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어요. / 그런데 왜 당신은 내 안에 도사린 그것들을 무시하나요?----" /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은 사랑이 너무 강해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가정을 깰 정도의 사랑을 서로 느꼈다면 그것은 바로 운명이 아닐까. 그렇다고 내가 가정을 깨는 사랑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운명적인 사랑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운명적인 사랑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을 끊임없이 원망하고, 끊임없이 증오하고, 끊임없이 불안에 떨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이 사랑에도 분명 아름답고 황홀하기 때문에 그런 어두운 감정이 배가 되어 다가올 테지.
<동자꽃>에선 사랑의 환희가 있고,
사랑의 빛은 불타오른다. / 수줍게 웃으며 동자꽃 꽃술 장밋빛 그늘에서 사랑의 전쟁 무르익고 있기에. /
<봉인 일곱 개>에선 사랑을 보호하려고 하고,
무쇠 키스로 만든 강철 키스 갑옷을 그대에게 입혀 / 어떤 유혹에도 그대 쓰러지지 않게 할 거에요. / ...(중략)... / 각각에 강력한 봉인 붙여진 채. 그리하여 내 불굴의 의지로 / 엮은 사슬 그댈 철저히 휘감는다오, 결코 포기하지 않는 내 안에서. /
<디종의 영광>에선 사랑하는 그댈 노란 장미에 빗대어 묘사하기도 하고,
아침 햇살이 머물러 / 어깨 위에서 하얗게 반짝이고 / 그녀의 몸 선을 타고 흐르는 농염한 황금빛 그림자는 / 그녀가 스펀지를 집으려 허리를 굽힐 때 / 불타오르고, 출렁이는 젖가슴은 요동친다. / 활짝 핀 노란 장미 / '디종의 영광'처럼. /
<아침 식탁에 놓인 장미꽃>에선 사랑의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그녀 날 보고 웃으며 말한다. / 내가 아름답다고. 나 그 흩어진 장미꽃잎을 보며 / 불현듯 깨닫는다, 내 안에 있듯 그들 안에 있는 / 새날이 캐낸 자아 얼마나 멋진가를. /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에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했을런지는 끝내 알 수가 없지만 그런 격동의 삶을 살아낸 아주 아름다운 시을 읽었다. 모호하고 잡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시가 이렇게 선연하게 다가오기는 또 처음인 것 같다. 아마도 사랑이 그런 영향을 끼치는 것이겠지. 상상하기도 조차 어려운 사랑을 이렇게 알기 쉽게 표현해준 그의 표현에 새삼 감탄한다. 그러나 그의 시엔 사랑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힘들고 우울했던 그의 삶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시를 태우다가 친구의 만류에 반만 남은 그 시를 보면 없어진 그 부분이 더욱 큰 울림을 주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
섬망에 빠진 여인이 분노를 토하는 호리한 회초리 소리, 휘감아 생채기를 내는 / 가죽 허리띠의 험악한 소리. 드디어 그 소리, 선혈이 낭자한 / 침묵에 다른 소리 잠재운다. 물푸레나무의 비명 거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