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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전
쓰카 고헤이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사실 <비룡전>은 한 달여 전에 읽었던 소설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던 줄거리가 내 마음 속에 정리가 되지 않았던 탓인지, 아니면 여주인공에 대한 이유모를 배신감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쉬이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글을 쓰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 이해되지는 않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랑이야기가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야 나를 놔주지 않던 가슴 먹먹한 사랑이야기를 글로 옮겨보는 용기를 내본다.
시코쿠 섬의 한 재벌가의 사생아인 간바야시 미치코가 그 주인공이다. 다카마쓰의 기생이었던 어머니와 시코쿠의 산림왕이라고 불리던 간바야시 재벌의 장남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가 일찍 죽는 바람에 네 살이란 어린 나이에 아버지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재력가일지는 몰라도 너무나 인색한 사람이었기에 고등학교까지만 보내주겠다고 하고 식모들이 묵는 두 평도 안되는 다다미 방에 그녀를 지내게 했다. 배다른 오빠들도 차가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아버지는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14년 동안 그야말로 그림자처럼 살았다. 그 때 한 명의 오빠라도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어린 그녀의 아픔을 다독여주었다면 그녀가 그렇게 비극적으로 죽지는 않았을 것을.
문학을 좋아하는 그녀가 의대로 전공을 바꾸게 된 계기는 엄마가 이름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의대로 목표를 정하자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복형제가 고졸이면 부끄럽다는 오빠들의 말에 겨우 생활비와 등록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진다.
그림자처럼 살던 그녀의 삶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그 당시 대학가 불어닥친 ‘학생운동’때문이었다. 그 운동 때문에 동경하던 ‘가쓰라기 준이치로’도 볼 수 있었고 지방에서 상경한 어리버리한 그녀를 자상하게 챙겨주고 웃게 만들어준 ‘기노시타 히로유키’도 만날 수 있었고 그녀가 죽어서까지 같이 있고 싶은 ‘야마자키 잇페이’도 만나게 해주었다. 아니, 이 세 명의 남자가 그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항상 남는다. 만약 간바야시가 좀더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지 않아도 남을 사랑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만 있었다면, 확실하게 자기 이권을 챙기고 그것을 남에게 주장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맥없이 죽지 않았을거라고.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건 그녀의 주위에 일어나는 사건을 읽을 수 있는데 그녀의 내면에 있는 목소리를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뜻이 있고 의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학생운동의 리더가 되어 버리지를 않나, 가쓰라기를 위해 몸을 팔지를 않나, 가쓰라기에게 반해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준 기노시타에게 순결을 바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위해 돈까지 버는 것 등 남자에게 이용당하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더 대단한 것은 경시청 제4기동대 대장 야마자키를 이용하기 위해 여성의 모습으로 잠입을 해서 정보를 빼돌리는 일이었다. 그것이 정녕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조직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란 말인가. 정말 그럴 수 있단 말이야? 자신의 신념이 한 조각조차 들어가 있지도 않은데...여기에서 간바야시는 허수아비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한 쪽도 엿볼 수가 없었으니.
그러던 간바야시가 마음을 보여주는 장면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다. 그녀는 기동대장 야마자키의 집에 잠입해있을 때 첫사랑 ‘가쓰라기’에게도, 자신에게 다정하게 챙겨준 ‘기노시타’에게도 느낄 수 없었던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야마자키는 도쿄대 수석으로 합격한 간바야시와 지적 수준이 한참이나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그녀와는 다르게 사랑이 가득한 집에서 살아왔기에 그 둘은 안 맞아도 정말 이렇게나 안 맞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하철에서는 상습적으로 여자의 몸을 더듬고 중학교를 덜 나온 그이지만 이 소설 속에 나온 남성들 중에서는 가장 멋있다. 혁명을 외치면서도 자신의 이권을 보장받기 위해 권력자를과 틈틈이 거래를 해온 ‘가쓰라기’나 친절로 위장을 해서 나중에는 여성을 등쳐먹고 사는 ‘기노시타’나 혁명을 위해 아내를 거리의 여자로 만든 ‘기타지마’ 등은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큰 이상을 무리하게 실현시키려고 하지 않고 현실에서 착실하게 살아가려는 ‘야마자키’가 차라리 내 눈에는 멋있게 보였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희생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희생 대상이 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야마자키에게 접근한 그녀는 조직에서 연락도 없고, 사랑하는 가쓰라기도 연락이 없어 점점 초조해지자, 따뜻한 야마자키의 청혼에 승낙해버린다. 사실 그에게서 나온 유쾌함과 친절함이 한 번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만들지 못했던 간바야시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첫사랑 가쓰라기와 만들지 못했던 공감대, 그가 형성해주지 못했던 안락함을 야마자키가 제공해주었기에 평생을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에게는 바로 야마자키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인정한다. 그 때 그녀가 야마자키의 청혼에 승낙하면서 했던 말이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때려도 좋고 발로 차도 좋으니까 절대 나가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나는 갈 곳이 없어요.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당신과 같은 무덤에 묻히게 해주세요
이제 우리는 부부가 된 거네요. 이제 나는 외톨이가 아니에요. 죽어서도 당신하고 같은 무덤에 묻힐 수 있겠지요. 만약 내가 싫어지고 다른 사람이 생기더라도...... 내가 죽으면 한 귀퉁이라도 좋으니까 당신하고 같은 무덤에 묻히게만 해주세요. 나는 갈 곳이 없어요. 부족한 몸이지만 끝까지 잘 부탁합니다. - p. 369 - 370
그녀의 이 말은 정말 내 가슴을 울렸다. 네 살 때 아버지 집으로 와서 온갖 천대를 다 받고 자라 이 땅에서 홀홀단신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어떨까. 이제야 야마자키를 만나 부부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그제서야 그녀가 꾸준히 사랑을 갈구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금방 끝이 나버렸다. 그녀가 야마자키에게 일부러 잠입했단 사실을 알게 된 야마자키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아기가 태어나고도 한 번도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온갖 욕설과 폭력... 하지만 그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나가라고 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녀의 이복오빠들이 그를 찾아가서 경멸을 했던 것!!! 여기서 더 마음이 아픈 것은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이었다. 아기도 때리고 그녀도 때리던 그가 자신의 마음을 울면서 드러냈을 때 그의 사랑이, 철없고 생각없어 보였던 그의 사랑이, 그렇게나 숭고했고 따뜻했고 절절했다는 것을 소리쳐 보여주었다. 학생운동의 리더였기에 아기를 낳고도 시위현장에 가야하는 그녀를 보는 야마자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녀가 다쳤을까 죽지는 않았을까 항상 노심초사하고 가지 말라는 말을 꾹 참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소리치는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시위현장에서 널 만나지 않기를 간절하게 빌었어. 오로지 그것만 빌었지. 만나면 나는 납이 든 이 경찰봉으로 네 아름다운 얼굴을 후려쳐야 해. 하지만 내가 한 번이라도 너한테 혁명을 그만두라고 말한 적 있어?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알아? 사랑한다고, 옆에 있어달라고, 너를 떼어놓고 싶지 않다고, 너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라고. 너를 잃으면 나도 죽을 거라고.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지 알아? 나가! 그게 계속 나를 배신해온 네가 나한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성의야. - p. 479
같은 무덤에 묻힐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던 그녀의 요청도 무시하고 나가라고 소리치는 그의 마음이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처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들려준다. 동정이 싫어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만을 사랑받고 싶었던 그녀의 오기가 그녀의 사랑을 파괴해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야마자키와 가쓰토시는 자신에게 간절한 존재임을 알려주었다.
정말 당신한테 폐만 끼쳤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가쓰토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낳은 아이예요. 나는 당신과 지낸 날들이 행복했어요. 그리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요. - p. 481
그로써 오해로 빚어졌던 부부싸움은 막을 내리고 2 ․ 11 대투쟁의 하루 전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서로를 그렇게나 간절하게 필요로하고 있었지만 각자 모른 채 오해 속에서 지내다가 기동대장과 학생운동의 리더로서 만나야 할 결전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딱 하루...딱 하룻동안 사랑하는 부부로서 평온한 마음으로 밥을 지어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간바야시의 꼭 가야한다는 말을 눈물을 흘리면서 듣는 야마자키...이 둘의 삶이 왜 이리 기구한지.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안다고 하던가. 왜 사랑을 확인하자마자 서로가 적이 되어버려야 하는지.
그 시대의 상황이 이런 비극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지만 우선 무엇보다도 간바야시의 살아온 환경이 어려웠기에 이런 비극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인생은 한 순간의 의지를 상실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게 되기 마련이니. 처음부터 줏대도 없다고 생각해서 읽는 내내 불만만 쏟아놓게 만들었던 간바야시가 사실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아다녔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했다고 해서 그녀의 모든 행동을 다 용납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잘 살아가는 인물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