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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역사를 뒤바꾼 치명적 말실수
이경채 지음 / 현문미디어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어렸을 때 남 앞에서 말 한 마디 못하는 순둥이였는데 지금은 어쩌다가 이런 직설적인 사람으로 변해 버렸는지...쯧쯧...말로 실수한 게 도대체 몇 번이야?
그래서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때 눈이 번쩍 뜨였었다. 고려, 조선시대 같은 그 옛날에도 말실수를 해서 큰 코 다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들이 신이 아닌 이상 한 두번정도는 실수를 했을거야!! 특히, 정치판이란 게 말을 용의주도하게 써야하는 곳이기에 더욱 실수가 잦지 않을까? 하며, 같은 동지(?)를 찾는 마음으로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했다. 물론, 정치인 중에는 말 한마디로 강동 6주를 도로 찾아온 서희같은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그들은 나같은 범인이 아닐테니 열외하기로 내 마음대로 정해버리고 말이다.
이 책은 일곱가지 일화를 담고 있다. 여말 선초의 풍운아 정도전의 말실수, 민무구의 옥사, 남이의 출세와 허무한 죽음, 신숙주의 골칫덩어리 아들 신정, 잘못된 선택으로 멸문지화를 당한 신수근, 사소한 오해가 낳은 동서 붕당, 사도세자를 죽인 나경언의 망언 등...여기에 나온 화를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권력만 믿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보다 지위가 놓은 사람들에게조차 오만방자한 말과 행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럴 때보면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것 같다. 개구리, 오챙이적 생각 못한다더니 부귀영화를 누릴 때에 혀를 잘못 놀려 일을 그르치니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 중에 사소한 오해가 낳은 동서 붕당이 인상깊었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나뉜 이유가 정말 사소한 오해였기 때문이다. 심의겸은 명종의 정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이라 외척으로 어느 정도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청렴결백으로 이름난 김효원의 이부자리를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의 집에서 본 것이 화근이었다. 그 날 하루 김효원의 장인때문에 윤원형에 인사드리러 갔다가 오랜 친구 이조민을 만나 과거가 얼마 남지 않아서 밤을 새워 공부한 것 뿐이었다. 명종의 외척세력인 윤원형에게 뇌물을 바친 것도, 빌붙으러 간 것도 아닌, 그저 우연히 하루 거기서 공부한 일을 가지고 심의겸이 오해를 했던 것이었다.
김효원은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일 뿐이지만 워낙 학문이 높아 여러 대신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그는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기도 하여서 그의 이름을 대다수 알고 있었고 과거시험에도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런데 여러 대신들이 입을 모아 그를 칭찬하자 윤원형의 집에 있었던 김효원의 이부자리가 생각난 심의겸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 말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선비란 모름지기 학문과 인품을 모두 갖춰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김효원은 윤 정승 집에 기거하면서 훈도 노릇을 한답니다." 순간, 아차했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이었다.
이 한마디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김효원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가 한직에서 성실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처리를 하자, 마침내 이조전랑이라는 요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름없는 선비일 뿐이어서 억울하게 당하기만 했던 김효원도 이제는 심의겸에 대한 불편한 심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심의겸은 성질이 거칠고 생각이 미련하니 요직에는 등용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심의겸도 불같이 화를 냈지만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효원이 이조전랑 자리를 다 마친 후, 그 후임자를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추천하자 김효원이 반대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집이 동쪽(건천동)에 있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집에 서쪽(정릉동)에 있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나뉘게 된 것이었다.
이 때부터 학문은 뛰어나나 상대적으로 벼슬이 낮은 동인 세력과 나이는 있지만 높은 벼슬을 가진 서인 세력의 갈등은 나날이 심화되었다. 서로 비방하고 헐뜯는 당쟁이 심해지자 두 당의 영수를 외직으로 내보내기도 했지만 오히려 각기 자기 세력이 결집하게 만들어 당쟁은 격화되고 있었다. 한편, 당쟁의 원인을 제공했던 심의겸과 김효원은 과거에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후회하고 책임을 통감했다. 그래서 당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서로끼리는 화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죽은 뒤에도 당쟁은 계속되어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갈라지고 서인은 노론, 소론 / 시파, 벽파 등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무심코 내뱉은 말 중에 이런 끔찍한 결과를 일으킨 경우가 또 있을까. 한 사람의 말실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피비린내나는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니 말이다. 이렇게 큰 사건을 겪어본 적은 없는 나이지만 참으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해서도, 그에 대해 함부로 혀를 놀려서도 안된다는 것을...나도 학원 강사로 있으면서 다른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원장님과 할 때가 있다. 이것은 험담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험담으로 보일 수가 있는 말이다. 내가 근무한 지 꽤 되다보니 원장님께서 새로 온 선생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앞으로 열심히 할 것 같은지 물어보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 사심이 개입될까봐 항상 어렵다. 그래서 그 선생님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다 알려드리려 노력은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인지...하지만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는 선생님과 같이 일해야 학원에 발전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해서 이야기를 할 때는 굉장히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말은 정말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