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에게 물을 (양장)
새러 그루언 지음, 김정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나에게는 서커스에 대한 기억이 없다. 실제 눈 앞에서 본 적도 없을 뿐더러 텔레비전 속의 서커스 공연도 그다지 즐겨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화려해보이는 겉모습 이면에 뭔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들이 있을거라는 어린 아이의 막연한 혐오감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한 볼거리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난쟁이, 거인, 뚱보 등 기상천외한 사람들이 있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서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구경거리가 되었겠지만 그래도 인간을 구경거리로 삼는다는 그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기에. 텔레비전이나 영화같은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는 서커스가 유일한 오락거리라는 사실도 서커스에 대한 거부감을 씻어주진 못했다. 어쨌든 그런 광대 역할을 하는 자들은 약자이니까.

 

그런데 이 소설을 보고 서커스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배우'와 천막을 치거나 동물을 보살피는 '일꾼'들 사이에는 강자와 약자의 분명한 경계가 있다는 것과 일꾼은 동물들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 '배우'는 아무리 못난이여도, 정상인의 범주에 들지 못하더라도 좋은 숙소를 제공받고 좋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수 있고, 월급도 꼬박꼬박 받을 수 있지만 '일꾼'들은 기차의 화물칸에서 거적때기를 깔고 자야하고 씻을 물조차 제공받지 못하고 식사도 허름한 식탁에서 해야할 뿐더러 월급도 제때 받을 수 없었다. 그 받을 월급이 많이 밀리면 달리는 기차에서 '빨간불'을 당한다는 사실은 대표적인 인권유린의 모습이었다. '배우'의 자리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지만 '일꾼'은 보충이 가능하기에 - 더구나 미국은 대공황 시대이기에 - 가차없이 인간을 물건처럼 달리는 기차에서 던져버리는 모습은 정말 상상하기도 싫다.

 

이런 대공황 때 기차로 이동하는 <벤지니 형제 서커스단>에 합류하게 된 '제이콥'은 수의사 공부를 하다가 만 상태였다. 어쩌다 보니 갈 데가 없어져 마지막 시험을 보지도 않은 채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이 인연이 되어 많은 군상들을 만나며 인간에 대해, 동물에 대해, 사랑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는다. 그가 모든 것을 생생히 전해주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미 아흔 살이나 먹어버린 '제이콥'이다. 아흔 살, 아니 아흔 세 살의 '제이콥'이 삶이 진행되는 중간 중간에 서커스단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놓는 것이다.

 

처음엔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건 속으로 빠져들기만 하면 다시 현재로 내팽개치고 다시 집중해서 사건 속에서 '제이콥'이 되어 초조하게 지내다보면 어느새 현재로 튕겨나오니...그런데 그런 구성이 뒷부분에선 진가를 발휘한다. 처음엔 무기력하게 있었던 '제이콥'이 서커스단에 대한 기억을 하나 둘씩 끄집어내다보니까 청년시절에 느꼈던 열정과 활력을 되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치매가 아닐까 걱정하고, 마음에 드는 간호사의 이름을 계속 기억못한다는 것에 절망하고, 새하얗게 센 머리에 쭈글쭈글해진 피부가 보기 싫어 거울을 안보게 되는 노인의 심리를 놀랄만큼 정확하게 그려냈다.

 

서커스의 생리라는 게 거짓으로 환상을 만들어 거짓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라는 '오거스트'의 말처럼 진실이 아니여도 그것을 그리워하고 환상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속성을 "서커스"로 보여주었다. 지금도 서커스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향수와 그리움, 환상을 선사하는지는 알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볼 때마다 그런 아련한 그리움 속에 잠길 것 같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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