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역사상 오랜 난제 중 하나인 푸앵카레의 추측을 풀어낸 러시아 수학자가 있다. 그레고리 페렐만. 100만 달러라는 상금이 걸려 있었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했다. 왜 돈을 받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우주의 비밀을 쫓고 있는데 어떻게 백만 달러를 쫓겠는가?"
오늘, 오래 미루었던 일을 하나 처리했다. 친구는 힘들었겠다 위로했는데 생각보다 수월했고 끝마친 후에는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미루었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나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는 친구들. S가 둘 있다. 어떤 선택의 순간 앞에서 이들은 유독 명료해 진다. "와 어떻게 그게 돼?" 나는 매번 신기하다. 그럼 나를 놀라게 한 새로운 상황에 대해 S인 친구가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들려 준다. 들을 때는 나도 그러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면 대체로 난 늘 하던 대로 행동한다.
궁극적인 위협은 외부로부터, 근본주의적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과 도덕적 해이, 명확한 가치관과 확고한 참여, 헌신과 희생정신의 결여에서 온다는 비판이다. 지젝은 라캉의 '행위' 개념을 빌려 진정으로 윤리적인 행위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삶의 과잉'이며, 기꺼이 목숨을 걸 만한 무언인가가 있다는 자각이다. 목숨을 걸 만한 삶의 과잉은 자유, 명예, 존엄성, 자율성 등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한 과잉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과잉'이다. 그런 과잉이 없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게 아닐뿐더러 삶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의 과잉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위다. 212
이 대목을 읽으면서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흔히들 '사랑하는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완전해진 듯한 착각, 상대의 모습에 씌워진 콩깍지,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당장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듯한 충만함. 그 사람으로 인해 우주가 가득 찬 듯한 환각, 셀 수 없는 비이성적인 감정들이 쏟아진다. 그러니 정상이 아닌 상태고 지속되어서는 일상생활을 이어가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런 '과잉'상태를 겪은 후, '상실'의 순간을 통과해야만 그 중간에 위치한 현실이란 땅 위에 발 딛고 선 자신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이 미친 상황을 경험하지 않고는 얻어낼 수 없는 결론이다.
인력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요즘 생각하고 있다. 내가 무슨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결국 하고야 마는 일들과 내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들. 양 극단 사이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바뀌는 성향,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극단은 어떤 면에서 서로를 보완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무언가를 버려야 다른 무언가를 얻을 수 있고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해 봐야 사랑이 그것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극단적인 무엇은 그것의 반대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페렐만이 돈과 명예를 보잘것없는 것으로 대할 수 있는 건 우주의 비밀을 푸는 작업을 최대의 가치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최근에 직접 겪고 보니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그뿐이다. 헤헷.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부로에게 겨우 두 켤레의 양말을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졸라대는 배달부에게 볼펜을 주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그럴 수밖에 없지.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엮는 일 따위는 쉽게 할 수 있어. 사랑하지만 않는다면.......' 97
전쟁으로 눈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로 인해 실어증, 간질을 앓게 된 동생과 타국의 난민촌에서 살게 된 오마르. 어딘가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원망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며 살아가다가 학교에 들어간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조금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고향에 돌아가면 농사를 지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다니지 않았다. 막상 학교에 가보니 불가능할 것 같던 동생과 떨어져 있는 것도 그에게는 가능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현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잠시라고 생각했지만 난민촌에서의 생활은 몇 년으로 이어졌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소수의 사람들은 유엔과의 인터뷰를 통과하면 정식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아 미국이나 캐나다에 정착할 수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오마르와 동생 하산은 미국으로 가게 된다. 어렵지 않은 영어로 채워져 있어서 수월하게 읽었다. 오마르가 기회를 얻게 된 점은 감동적이었지만, 뒤에 남은 친구들. 특히 오마르 보다 더 똑똑하고 꿈도 명확했던 마리암이라는 여자아이가 부모에 의해 나이 많은 남성과 결혼을 강요당하고 어느새 배가 불러 있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딸을 낳았는데 마리암은 절대 자신처럼 살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오마르를 위해 지어준 시는 그런 그녀의 상황 때문에 더 아름답고 슬펐다. 어린 나이에 죽을 뻔한 위기와 끝이 없을 듯한 절망을 경험한 오마르는 자신이 어떤 기회를 얻은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러니 아직도 난민캠프를 찾아가고 그들을 돕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