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이 고독을 즐길 능력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홀로 마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더 깊숙이 알고싶지도 않았기에 되도록 자신과 맞닥뜨리는 상황을 피했다. 자신의 재능과 온기와 발랄함에 불을 붙이려면 사람들과 부대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혼자 있으면 얼어붙은 채, 성냥갑속에 갇힌 성냥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 P11

이런유형의 여자들은 열정적이면서도, 멜랑콜리에 젖은 고상한 모습뒤에 자신의 격정을 숨길 만큼 노련했다. 그는 당장 여자의 눈을들여다볼 수는 없었기에 일단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눈썹을 감상했다. 눈썹 아래 둥그스름한 콧날로 유대인임을 알 수 있었지만,
고상한 형태의 코 덕분에 옆모습은 또렷했고 관심을 끌만 했다. 머 - P13

낙관적으로 보이는 유일한 사실은여자가 계속 시선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녀가 그의 시선에 저항하면서도 당황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그녀가 아이와의 대화를 기이하리 만치 세심하게, 마치 관객에게보여 주려는 듯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라고 강요하듯 들이대는 평온함이야말로 여자가 평정심을 잃고 있음을 의미했다.  - P14

오늘 밤 조금이라도 친분을 틀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여자의 냉담한 태도는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이런 저항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불확실한상황은 그의 욕망을 타오르게 했다. 어찌 됐건 상대를 발견했으니,게임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 P15

너는 너무 착해 보이는구나. 두툼한 책을 끼고 다니는 샌님 같아 보여, 내가 네 나이 때엔 엄청난 사고뭉치였지. 매일 저녁바지가 찢어진 채 집으로 돌아가곤 했단다. 너무 착하기만 해서는안돼!"
- P19

"개를 좋아하니?" 남작이 물었다.
"아, 아주 좋아해요. 할머니는 바덴에 있는 저택에 사시는데 개를 한 마리 기르세요. 우리가 거기 가면 개는 온종일 저만 따라다.
녀요. 하지만 우리가 거기 가 있는 건 여름철뿐이에요."
(개는 누가 자길 좋아하면 귀신같이 알지) - P19

남작은 손쉽게 아이의 신뢰를 얻었다. 딱 반 시간 만에 불안하게 펄떡대는 뜨거운 심장을 손에 넣은 것이다.  - P22

에드거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이의 마음은 행복감과 어린아이다운 절망감으로 어수선했다. 이날 그의 삶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처음으로 어른들의운명에 끼어들게 되었다. 졸음에 취한 아이는 자신이 아이임을 잊었고, 단숨에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 P25

남작은 여자의 권유로 모자의 점심 식탁에 함께 앉았다. 건너편에 마주 앉다가 이제 함께 앉는 사이가 되었고, 아는 사이에서친한 사이가 된 것이다. 여자와 남자와 아이의 목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삼중창이 시작되었다.
(역시 츠바이크) - P29

미모가 기우는 해처럼 찬란히 불타오르고, 어머니 대접을 받을지 여자 대접을 받을지를 두고 선택을해야 할 마지막 기회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그런 시기였다. 그런 선택의 순간에는 이미 오래전에 답이 정해져 있던 것처럼 보이던 삶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며, 자석의 바늘은 에로틱한 체험을 바라는 마음과 아주 체념하자는 마음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파르르 떨게 된다.  - P30

에로틱한 성향이 강한 남자는 자신이 여자들의 마음에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평소보다 곱절의 매력을 발산하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랬다.
배우가 눈앞에 있는 청중이 자신의 연기에 빨려들었다고 느껴야만 혼신의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P33

마치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움켜쥐고 더듬다가 다시 놓아 주는 듯한 느낌이었고 형언할 수 없는 욕망이 일며 피가 뺨으로 솟아올랐다. 그러다가 그가 이내 다시 밝게, 소년처럼 해맑게 웃는 바람에 욕망을 드러내는 소소한 행동은 아이들장난처럼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 P36

하지만 에드거는 농담을 듣고도 웃지 않았다. 다만 상대를 가늠하는 시선으로 남작을 바라볼 뿐이었다. 애달프게 파고드는 아이의 시선은 남작의 영혼까지 들여다보려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생긴 걸까? 둘 사이는 달라져 있었다. 에드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불안히 눈을 굴릴 뿐이었다. 에드거의 마음속에서 작은 망치가격렬히 쿵쿵댔다. 처음으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 P46

아, 이 비밀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이 비밀만 알아내면 난모든 문을 여는 열쇠를 갖게 될 테고 더는 어린아이 노릇을 안 해도 될 텐데, 어른들은 내 앞에서 모든 걸 숨기고 감추려 들지만, 내가 이 비밀을 알아내기만 하면 더는 날 따돌리고 속이지 못할 거야! 지금 알아내야 해! 이 무시무시한 비밀을 반드시 알아내고야말겠어."
- P48

상큼한 초록빛 침엽수들이산을 뒤덮었고 골짜기에는 늦봄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에드거는 눈 한번 돌리지 않고 마차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만을보고 있었다. 강렬한 시선을 낚싯바늘 삼아 두 사람의 오가는 눈빛깊숙이에 잠긴 비밀을 낚아 올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뜨거운 의심만큼 지능을 예리하게 벼리는 것은 없다. 미성숙한 지능의 소유자는 흔적이 모호하게 흐려지면 온갖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간혹 세상 - 우리는 이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으로부터 아이들을 분리하는 것은 얄팍한 문 하나뿐이어서, 우연히 실바람만불어도 이 문은 벌컥 열리고 만다.
- P48

에드거는 다시 아이가 되었다. 어제처럼, 그전처럼 다시금 작고 온순한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 P50

"아무것도 아녜요." 아이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아이 역시이제 비밀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증오, 두 사람에 대한 끝없는 증오였다.
- P52

에드거는 더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이제 순수하고 명료한 감정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것은 증오와 노골적인 적대감이었다.  - P53

아이는 까만 푸들로 변신한 악귀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그들 주위를 뱅뱅 돌며 증오라는 무서운 그물을 엮고 있었기에, 그들은 그물 안에 갇힌 채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56

에드거는 머리를 조금 비스듬히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 P58

아이의 힘은 증오로 단련되어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비밀에 손이 묶인 두 사람보다 더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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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1-22 0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출간된 슈바이크 선집중 한 권이네요. 소설과 전기 중 어떤게 좋을지 모르겠어요. 번역이 좋은 책이면 좋겠습니다.
미미님, 주말엔 날씨가 조금 덜 춥다고 해요.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청아 2022-01-22 00:11   좋아요 2 | URL
<광기와 우연의 역사>빼고는 소설만 쭉 읽어봤는데 아직까지 다 넘 재밌었어요. 이 책도 번역 매끄럽고요.ㅎㅎ 단편이라 하루 한두편씩 읽으려해요. 서니데이님 오늘 푹 주무시고 즐거운 주말되세요^^♡

scott 2022-01-22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드거는 머리를 조금 비스듬히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미미님 이 책을 읽는 찰나의 순간 요렇게 포!착!📸
⠀⠀ᕱ🎀ᕱ
“ପ(„ơ ᴗ ơ„)ଓ”

청아 2022-01-22 08:00   좋아요 1 | URL
우앗!!토끼사진사에게 포착되었네요.ㅎㅎㅎ
역시 츠바이크예요.첫번째 이야기 감탄하며 읽었어요*^^*👍

바람돌이 2022-01-22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벌써 읽고 계시군요. 저도 곧 시작하렵니다. ^^

청아 2022-01-22 18:33   좋아요 1 | URL
매일 한두편씩 읽으려고요! 첫 작품 빠져들어 읽었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