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인 절차는 그것으로 끝이다. 그는 몸을 틀어 거실로 앞장을 서고, 입구를 바라보는 소파에 허리를 곧게 펴고앉는다. 내가 오른쪽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앉으면 그가 묻는다(하지만 열에 아홉은 수사학적 질문이다).
"자, 오늘 밤엔 키플링을 읽어볼까?" - P10
피그말리온(서점)은 문학 애호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주인인 릴리 레바흐 부인은 나치의 참상을 피해 탈출한 독일인이었는데, 유럽과 북미권의 최신작들을 부지런히 구해서 가져다놓았다.
부인은 출판사의 도서목록을 비롯한 문학 자료를 열심히 탐독했고, 그렇게 해서 찾아낸 책과 단골의 취향을 연결시키는 재능이 있었다.
내게도 장사를 하려면 자기가 파는 상품을 알아야 한다면서 입고되는 신간들을 읽으라고 종용했지만, 그런 일에 나를 설득하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 P11
보르헤스는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이 작가가 되리라는걸 알았고, 그의 소명은 집안의 신화로 받아들여졌다. 어찌나 유명했는지 1909년에는 이웃에 살면서 보르헤스의부모와 친분을 나눴던 시인 에바리스토 카리에고(EvaristoCarriego: 1883~1912, 아르헨티나의 시인)가 레오노르 부인의 열살짜리 책벌레 아들을 시로 읊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 저 꼬마아이 당신의 자긍심이자, 지금 머릿속에서 월계관을 향한 가벼운 열망을 느끼기 시작하는 저 아이는 꿈의 날개 위에 두 번째 수태고지의 산물을 싣고 빛나는 포도알을 노래의 포도주로 담아내야 한다.
- P21
조카의 말에 따르면 보르헤스는 평생 동안 잠자리에들기 전에 똑같은 의식을 반복했는데, 그 의식이란 한참씨름을 하며 기다란 흰색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눈을 감고 영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이었다.
그의 세계는 오롯이 언어로 채워졌고, 음악과 색과 형상은 좀처럼 그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보르헤스는 그림에 관해서는 줄곧 장님이나 다름없었음을 여러 차례 고백했다. - P22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거니는 걸 좋아한다. 처음엔 남부 지구였고 그러다 인파가 넘치는 도심으로 이어졌는데, 쾨니히스베르크의 칸트처럼 보르헤스도 거의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이런 표현이 참 좋다.) - P26
우주를 도서관이라고 부르고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상상한다고 실토한 사람의 서재치고는 그 규모가 실망스러웠는데, 어떤 시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란 단지 지혜를3모사(模寫)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책이 넘치는 공간, 책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책장, 원고더미가 길을 막고 빈 틈새마다 빼곡한 잉크와 종이의 정글을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와서 보면 몇 귀퉁이에만 얌전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50년대 중반이었으니 아직 젊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1936~, 페루의 소설가, 정치인)가 보르헤스를 찾아갔다가 집이 소박하다면서, 거장께서 왜 좀더 품위 있고화려한 곳에 살지 않느냐고 물었다. 보르헤스는 그 말에심기가 몹시 상했다.
"리마에서는 그러는지 모르겠군." - P27
그는 생각이 짧은 페루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허세부리는걸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러나 몇 안 되는 그 책장에는 백과사전과 각종 사전부터 시작해서 보르헤스가 읽은 책의 정수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보르헤스의 자긍심이었다.
(이것 때문에 망구엘 선생도 ‘정수‘ 만 모으기로 결심한 것일까.)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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