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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속의 문맹자들 - 한국 공교육의 불편한 진실
엄훈 지음 / 우리교육 / 2012년 5월
평점 :
‘읽기부진을 겪는 아이들은 그 원인이 무엇인가와는 상관없이
수업에 강한 염증을 느낀다. 이들에게 수업시간은
학습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관리하고 때워야 하는 시간이다.’
-본문中-
초등 고학년만 되어도 하루 6교시 수업이 대부분이다. 해석이 안 되는 말과 글로 인해 안 그래도 긴 수업시간을 더 길게 느끼고 힘들어 할 아이들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현장에서 체험한 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학년별로 잘 짜인 학과공부가 아니라 개인차를 고려한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위 글은 이 같은 아이들이 보통의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동안 느낄 자괴감이나 두려움, 분노, 위축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 역시 중고등 학생 시절, 영어 시간이 끔찍하게 두렵고 힘들어 어떻게 그 시간을 모면해야 할까 궁리하고, 다른 과목을 제법 잘 했기에 당연히 영어도 잘할 거라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행여나 나의 부족한 부분을 들킬까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과목에만 막혀도 학창생활이 즐겁게 느껴지지 않는데, 읽기 부진으로 인해 글을 다루는 모든 과목에서 보통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얼마나 끔찍할지 절로 상상이 된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지만 모든 사람들이 고등학교 졸업은 기본으로 생각하고, 대학입학도 당연한 거라 생각하는 시대임에도 읽기 지원이 필요한 아이들의 수가 상당하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학부모와 알고도 형편이 어려워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실을 인정하고 도우려 해도 전문가나 선생이 적고 아이들의 의지도 이를 따르지 못해 첩첩산중이다.
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국어 수업을 담당하며 읽기 부진아들을 만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한 결실이 담긴 ‘학교 속의 문맹자들’을 읽으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읽기 장애와 읽기 부진 학생들의 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만들어 관심을 끌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된다.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헌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소중한 날들을 무의미하고 슬프게(이마저도 인식하지 못하고) 보내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좀 더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그로 인해 더 나은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자가 직접 국어 수업을 했던 중학교와 이후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읽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초등학교 아이들을 현장에서 만나 읽기 부진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서술한다. 그리고 읽기 부진을 공부 못하는 아이는 어디에나 있다고 인식하는 교사와 문제를 지닌 아이의 지도에 힘쓰다 보면 다른 아이들을 지도하기 어렵다는 수긍은 되지만 아픈 현실을 드러낸다. 여기에 신체적, 정신적, 인지적으로 장애가 없는 아이가 고학년이 되도록 문맹으로 남아 있는 기막힌 사실을 집어내며 학교 속의 문맹 문제를 단지 공부 못하는 아이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근원을 해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읽기 발달 과정의 이해와 학교 속 문맹의 이슈화, 제도와 정책 마련 등 문제 해결을 위해 생각해야 할 일이 많다.
미국에서는 40여 년 전, 정상의 IQ를 지닌 남성이 13년에 걸친 정상적인 학교 수업을 받고도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의 읽기 능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교육부와 공교육 담당 장학관, 교육청 등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읽기 문제에 대한 학교의 책임에 대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사실만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의 문제인식과 해결에는 최소 40년의 격차가 있고, 이 기간 안에 한 세대를 넘어 고통 받는 아이들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학업 성취도 평가 등을 도입해 기초학습 부진아를 판별하고 이들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도입해 효과를 달성하려고 하지만 교육자들 사이에서 예상되거나 행해지고 있는 불편함이나 부담감 때문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있다.
저자는 무수히 많은 걸림돌 가운데 문제해결을 위한 원칙은 ‘아이로부터 출발하라.’라는 단 한 가지 공리뿐이라 말한다.
‘문제를 겪고 있는 아이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일이며,
그 아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교육받을 권리를 되돌려 주는 일이며,
인권을 지닌 인간으로 온전히 대접하는 일이다.’ -본문中-
아이로부터 시작하다보면 아이의 문제를 파악하는 방법과 문맹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전문 교사 양성, 조기 지원 시스템과 같은 부수적 원칙들이 나올 수 있다고.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산을 옮기는 일도 첫 삽을 뜨면서 시작된다. 이 책으로 인해 문제를 인식했으나 해결이 요원하다고 해서 불편해도 애써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가정과 학교, 교육부 등 관련 주체들이 책임을 떠넘기거나 변명만 늘어놓지 말고 한 걸음 내딛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