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 사랑을 이해하는 철학적 가이드북
로버트 C. 솔로몬 지음, 이명호 옮김 / 오도스(odos)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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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이면 결혼한 지 만 23년이 된다. 사귐의 시간이 1년 반, 사귐이 있기 전 얼굴만 알고 지내던 시간이 1년이었으니 내 삶의 절반은 남편과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졌다. 내 생애 가장 큰 기쁨과 의미를 찾은 시간이었고 또 가장 큰 아픔과 나락을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함께 성장해가는 모습을 축복하기도 했고, 아이가 아니라면 부정하고 싶은 시간이기도 했다. 좋을 때는 결혼하기 잘했다 싶다가도 사랑해서 결혼한 삶을 부정하고 싶은 만큼 진저리칠 때도 있었다.

 

지난 20여 년, 내가 사랑을 하긴 한 것일까? 라는 물음이 자주 생긴 때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을 만났다. 마냥 좋을 때는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20년 넘는 세월동안 지지하고 격려하며 살았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노력해야 할까 회의감이 들 때면 지난 시간들을 뚝 떼어버리고 만남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하나마나한 생각,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품기도 했다.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을 쓴 로버트 C. 솔로몬은 열정, 감정, 사랑, 연애의 재발견, 느낌 등 감정철학과 관련한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 철학적 사고를 할 때 가장 광범위한 주제가 사랑이라 생각한다. 사랑은 OO다 라고 명쾌하게 정의하기도 어렵다. 책을 펼쳐 서문을 읽고 목차를 훑으면서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겠구나 싶다. 그만큼 사랑은 난해하기도 하다.

 

시시때때로 사랑이라 느끼는 많은 영역, 사랑으로 알고 시작했으나 시작도 과정도 종착지가 사랑이 아니었던 사랑에 대한 오류, 끌림으로 시작해 사랑에 빠지기까지, 사랑하면서 진정한 자신으로 설수 있어야 하며 그 사랑을 지속하기까지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함께 했던 사람들의 도움까지 모든 것을 동원해 모호한 사랑에 대한 재발명을 이룬다.

 

책을 읽고 나니 어떤 모양의 끌림이던 사랑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순간부터 안주하는 사랑이든, 조각난 사랑으로 끝나는 순간까지 실상 사랑이 빠져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제각각 부르긴 하나 그것이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는 범위에 있기도 하고, 스스로 사랑이라 정의하긴 하나 금방 내팽개칠 수 있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사랑이 시작되고 있다고 여기거나 사랑에 빠졌다고 여기는 순간, 사랑이 변했다고 하는 모든 순간들에 대해 점검하듯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사랑을 철학적으로 사고, 분석한 이 책의 결론은 사랑(사랑이라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라면)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기보다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남편은 사랑이 자란다’, ‘사랑이 쌓인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찌 보면 남편은 철학적 사고를 거치진 않았으나 사랑의 본질은 꿰뚫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저절로 자라거나 저절로 쌓이지 않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면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올 텐데 라는 아쉬움은 있으나, 머리로 알고 말로 표현했으니 사랑이 더 자랄 것이란 기대를 품어본다.

 

80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사랑은 당연히 동일할 수 없겠으나, 자라고 쌓이는 사랑으로 더 좋은 사랑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심어주는데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이 좋은 매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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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침실로 가는 길
시아 지음 / 오도스(odo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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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진도 안 나간다. 글씨가 너무 작은 것도 아니고, 어려운 문장으로 구성된 것도 아닌데 책 읽기가 이렇게 어려울 수가. 1권의 책을 49장으로 나누어 썼기에 한 장씩 읽기에 부담도 없는데, 한 사람이 살아온 일생이 너무 무겁고, 만연했던 성추행과 욕설, 인격을 무너뜨리는 독설 등,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골목 싱크홀에 빠져 발목이 꺾이는 바람에 인대가 파열돼 수술하고 입원했던 일주일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이 책을 완독하기가 너무 어려웠을 것이다. 같은 병실을 사용하는 환자들, 수시로 오가는 병원 전담 인력, 식사 제공 인력, 청소 인력 등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데 책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푸른 침실로 가는 길이란 제목과 괴물을 사랑한 한 여자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문구가 적힌 띠지 때문이기도 했다. 얼핏 보면 장르소설보다 더한 분위기가 풍기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손에 오래 들고는 있었지만, 어렵게 완독했다는 데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낸다.

 

시아가 엄마의 끊임없는 악다구니와 폭력 속에서 어린 나이부터 죽음을 생각하고, 성인이 되면서 돈을 벌려는 목적이 깔끔한 죽음이었을 만큼 암울한 시기를 보낸다. 엄마에 대한 모든 기억이 안 좋은 건 아니다. 엄마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평생 충실했기에 억울할 수도 있다. 아빠에 대한 기억은 의외로 좋게 표현되었으나 성장과정에서 보여주는 가부장적 권위와 때때로 휘두르는 폭력도 예사로 넘길 수 없을 정도다. 몸이 약했던 언니도 마찬가지다. 날카롭고 영악하고 나쁜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가족이 모두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가진 재주를 이용해 숨 쉴 틈을 만들어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이렇게 시아의 가족을 정리하다보니 우리 가족의 모습이기도 하고, 친구, 이웃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아가 겪은 것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오히려 애교 있는 가족의 이야기가 많이 떠오르기도 했다. 때문에 가족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족이라는 이미지에 맞게 다가가려는 사람들, 가족은 결코 따뜻하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람들, 가족이라는 환상적인 이미지에 기생해 잘될 때는 나 몰라라 하고 어려울 땐 뻔뻔하게 가족인데 그것도 못해줘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이러이러한 것, 물보다 진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일상적인 언어와 육체의 폭력에 노출되어 성장한 시아가 누구나 그러하듯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자신을 함부로 하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만큼 극한 상황에서 온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노력해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을까. 때문에 글을 읽으며 고구마를 먹다 얹힌 것 같은 순간이 많았어도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는데?’하는 궁금증을 품게 만들었다.

 

보통의 사람들도 이루기 쉽지 않은 학력에 커리어를 갖춘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시아의 시련이 끝난 건 아니다. 본인이 온전하지 못했을 때 태어난 딸과의 관계도 어렵고, 평생 욕으로 자존감과 자신감이 결여된 채로 살게 만든, 이제는 늙기까지 한 엄마는 여전히 곁에 있다. 자신을 힘들게 한 만큼 되갚아 주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시아는 신앙의 도움으로 엄마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끔찍했던 엄마의 모습을 닮지 않고 사랑하게 됨으로 자신까지 괴물이 되는 것을 막았다. 그래도 함께 살아가는 동안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한 순간에 바뀌지 않는 존재이고, 내가 바뀌었다고 해서 상대도 같은 속도로 변화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취해 잠든 엄마가 깨어나면 씻을 물을 길어오는 위트릴로가 가족이라는 이름에 묶여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시아 역시 공감을 했던 것 같다. 위트릴로의 엄마 수잔 발라동이 그린 푸른 침실을 책 제목으로 사용한 것을 보니. 아마도 시아는 가족으로 맺어진 엄마와 딸에게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해하고 지지하며 곁에서 지켜봐 주겠지. 같은 경험을 했어도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닌데, 시아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과 성찰을 끊임없이 했기에 지금은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잘 살아왔다는 메시지를 이 책으로 전달해주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는 좀 덜 깨지면서, 덜 우회하면서, 덜 아파하면서 살 수 있기를 축복하고 싶다.

딸은 선량했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라 딸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로 살아나갈 것이다. 나는 다만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줄 뿐이다. 그게 내 역할이었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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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오늘 하루 - 일상이 빛이 된다면
도진호 지음 / 오도스(odos)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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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 쓴 사람 상 주고 싶다!”



 

퇴근한 남편이 식탁 위에 올려놓은 책을 보고 한마디 한다. 아마도 오늘 참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온듯하다. 아직 펼쳐보지도 않은 책의 제목만으로 남편이 고단한 하루에 대한 위로를 받는 것 같아 이런 게 글의 힘이고, 책의 힘이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누군가는 무심코 지나갔을 거리, 지하도, 계단,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지나는 수많은 풍경들을 사진으로 찍고 단상을 남긴 괜찮아, 오늘 하루를 한 장씩 넘기다보니 작가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사뭇 크다는 걸 느끼게 된다.


 

코로나19로 온통 혼란스런 2020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대면이 어렵다보니 전화, sns로 소통하는 사람들과 가장 많이 하는 말도 하루하루는 지겨운데, 신기하게도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거다. 한 달 열심히 일해 받은 월급을 정말 아껴가며 쓸 데 쓴다고 했는데도 어느새 빈 지갑과 빈 통장을 보며 돈이 다 어디로 갔나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처럼, 기록하지 않은 지난날들은 부단히 애쓰며 살았을 지라도 한 달, 1, 2, 5, 10년 전으로 무수히 빠르게 흘러온 세월로만 여겨질 뿐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함으로 남게 된다.

 


날마다 보는 시계의 바늘, 달력의 어느 한 날, 늘상 다리를 대신해주는 자동차를 보면서도 그것들 각각의 의미나 나 자신과의 관계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쳐 왔는데, 사진을 통해 새롭게 그것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자칫 무의미함으로 치부되는 순간순간에 신선함을 주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생일날 일하면 소가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하며 해마다 생일에 휴가를 쓰는 남편을 떠오르게 하는 51일의 단상, ‘노동해야 하는 노동절이라니!’에서는 웃음이 팝콘처럼 튀어나오기도 하고 쉬지 못하는 노동자의 비애가 느껴져 안타깝다.



 

삼복의 어느 더운 날 오후, 시계를 보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요? 나만의 시간이 있을까요?’라는 글을 남긴 작가의 맘에 무한 공감이 되는 건 나 역시도 그러한 시간을 수십 년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일지도.



 

풀 한 포기에도 애정을 드러내는 사진과 글에서는 나도 정말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에 빠지게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도진호 작가처럼 소소한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고 짧은 글을 옮기는 걸 즐기던 때가 있었다.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외출을 하더라도 사람을 만나기보다 해야 할 일만 하고 돌아오는 게 일상이 되다보니 특별할 게 없고, 무기력한 느낌마저 들었는데, 이러한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소중한 시간이 될 테니 어떤 형태로든 기록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지난 수년간의 기록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그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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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생 교과서 한국사Q 2 -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 용선생 교과서 한국사
사회평론 역사연구소 지음, 뭉선생 외 그림, 이우일 캐릭터 / 사회평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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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가 출간된 이후 수년간 초등학교와 도서관에서 역사 수업을 진행하며 나 어릴 적에도 이렇게 재미있게 역사를 알려주는 책이 있었더라면 학교생활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겼었다. 한국사든 세계사든 건조하기만 한 교과서를 통째로 읽듯 강의하는 선생님들에게서 역사에 대한 흥미도 재미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회 장소를 잘못 알고 가 축구 우승후보였던 학교가 결승전을 치룰 수 없게 되어 용선생이 방과 후 역사 선생님으로 좌천(?)된 특이한 이력으로 시작되는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구수한 옛날이야기처럼 역사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책을 읽는 것은 나인데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용선생인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용선생과 함께 하는 아이들은 실제 학교나 도서관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연상되어 웃음이 나기도 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용선생 한국사라 하더라도 10권 분량으로 양이 상당한데, 한국사 전체를 학교나 도서관에서 원하는 다양한 차시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최근에 나온 ‘용선생 교과서 한국사Q'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역사 공부를 하는 어린 역사 탐구가들에게 반가운 책이 될 것 같다.




선사시대부터 조선 전기, 조선 후기에서 현대까지 2권으로 정리된 책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역사교과 과정에 맞추어 각 12차시로 나누어 수업이 가능하도록 목록이 짜여져 있다. 총 24차시니 반년이면 한국사 전반을 훑어볼 수 있게 되겠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는 5학년 시기에 맞춰 한 학기를 교과서 단원과 맞춰 진행한다면 더 차분하고 단단하게 기초를 다질 수 있어 보인다.




단원별 핵심질문과 핵심키워드, 핵심문제풀기, 생각하며 글쓰기,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로 구성되어 있어 한국사 책을 읽고,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며 배운 것을 정리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특히 생각하며 글쓰기는 역사 속 배경으로 새롭게 이야기를 구성해서 무한한 상상을 더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이를 토대로 글쓰기를 하면 굳이 배운 것을 따로 강조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다.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라면 이야기로 풀어내고 만화나 마인드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리를 해도 될 것이고.




코로나19가 얼른 종식되어 내년에는 아이들과 길게 만나 함께 수업하고픈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 기다림의 지루한 시간 안에 나도 다시 한 번 한국사 책을 정독하며 교과서 한국사Q를 들여다봐야겠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솔직히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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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는 책 - 읽기만 하면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는
김경윤 지음 / 오도스(odos)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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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찾는 카페 주인장에게서 책 한 권을 선물받았다. 일반적인 책 사이즈보다 작고 얇은데, 종이의 질이 좋고 글이 적으며 그림이 많다. 휘리릭 넘기니 20분도 안되어 다 읽었다. 어려운 단어도, 해석이 필요한 문장도 없다. 간간이 참신한 표현도 눈에 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눈앞에 놓여있다면 지루하지 않게 그 시간을 때울 수 있을 만큼. 그런데 궁금했다.


‘이런 책은 어떤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올까? SNS에 올리면 책 만드는 사람 눈에 띄어 연락이 올까? 아니면 글쓴이가 출판사에 투고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자기 돈 내고 찍는 걸까?’


카페 주인장의 답이 명쾌하다. 반반. 글을 쓰는 것도, 책을 만드는 것도, 유통되는 것도 어려울 게 없다. 어려운 게 없는데 왜 마음이 불편할까?


내가 부러워하는 대상이 있는데 모두가 글을 쓰는 작가다.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다양한 직업을 거쳤던 비카스 스와루프가 퀴즈쇼라는 기막힌 소재로 정규업무를 온전히 소화하면서 두 달 만에 썼다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심지어 영화도 대박남), 10대에 학교를 탈출해 절도와 부랑을 일삼다 교도소를 드나들던 장 주네는 사형수, 도둑일기 등을 썼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한국 근현대 100년 세월을 아우르며 수난 여성 5대의 이야기를 쓴 최진영, 중졸 학력에 폭력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 동안의 독서의 영향이었던지 시면 시, 희곡이면 희곡, 소설이면 소설 모두 평단의 좋은 평을 받거나 재판에 회부되어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장정일 등등. 사고의 방식, 글을 직조하는 능력,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 모두 부러워 미칠 지경이다.


작가가 부럽다는 건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고, 부러워하기만 30여년이니 내가 엄청 게으른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생각 없고 욕심 사나웠다면 일을 치고도 남음이 있겠으나 중심을 잡아주는 것 역시 책이다. 불쏘시개 이외의 용도가 없어 보이는 책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만난 보석 같은 책 중의 하나가 애니 레너드의 ‘물건이야기’다. 추출, 생산, 유통, 소비, 폐기의 다섯 단계를 거치는 물건의 일생에 대해, 20년 간 쓰레기를 추적하며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존중하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할 기회를 주는 책이다. 이토록 지구와 지구인에 유용한 책이 있을까 싶은데도 작가는 고민을 했다. 이 책의 가치가 이 책을 만드는데 쓰이는 나무의 가치보다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아는 게 무섭다고 지속가능한 세상에 대한 고민의 결론은 내게 쓰고자하는 욕구가 있지만 그것을 정리해 책으로 낼만큼의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하니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작가 장정일이 재판이 끝나고 자유로워지자 새로운 글을 써야한다는 구속감이 들었다는데, 나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는 것이다. 써도 누가 책을 내줄 것도 아닌데 시답잖은 고민을 하는 내가 웃기다.


이런 나를 다시 충동질하는 책을 만났다. 책 이름도 재밌다. ‘읽기만 하면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는 책 쓰는 책’. 26권의 책을 낸 관록 때문인지 술술 읽힌다. 겉보기에는 평등한 관계인 듯 보여도 말하고 듣는 관계가 불평등하다면 그 안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일부 특정한 사람만이 자발적 읽기를 통해 글을 해석하고 더 적은 수의 사람만이 글을 쓰는 사회는 결코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는 글은 공감을 자아낸다.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글과 댓글을 보며 자신의 생각을 폭력적이지 않고 온전하게 글로 표현할 줄 아는 사회가 얼마나 까마득한가를 날마다 확인하고 살기에.


작가가 책을 쓰는 방식을 여과 없이 말과 도표, 마인드맵, 사진 등으로 보여준다. 책을 쓰는 목적과 원고를 쓰는 것 같은 글 쓰는 방법은 물론이고, 자신이 쓴 책을 출판하고 싶은 이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다양한 경로 소개도 인상적이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출판사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15년 전쯤 안산예당 아카데미에서 글쓰기를 배울 때 함께 교육을 들었던 이들 대다수가 작가를 꿈꾸고 있었는데, 이 책이 그때 나왔더라면 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과, 그들은 원하는 작가가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2020년에는 의도하지 않게 두 권의 책을 만드는데 참여했다. 한 권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져가는 동네에서 오래 살아온 이들을 인터뷰해 마을을 기록하는 것이고, 한 권은 4.16 세월호 참사 이후를 돌아보고 의미 있는 주제를 선정해 아카이브 한 것이다. 이를 통해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분명 의미 있는 기록인데도, 책 쓰는 책의 저자가 나열한 좋은 책의 조건 안에 들어가는가를 생각해보았다.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 ▶새로운 정보나 깨달음을 주는 책 ▶인생의 맛과 멋을 알게 하는 책 ▶독자를 돌아보게 하는 책 ▶ 용기를 북돋는 책 ▶ 더 나은 개인, 가족, 공동체, 사회를 위하여 분투하는 책


나는 이 부분이 김경윤 작가가 돋보이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글쓰기로 안내하면서 아무나 책을 낼 수 없게 만드는 장치라고나 할까? 그러니 일단 마음껏 써보시라. 그리고 생각하라. 내가 쓴 책이 좋은 책의 조건 안에 들어가는가를. 그런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책이라면 나무에게, 편집자에게,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독자에게, 이 외에 책과 관련한 모든 사람과 자연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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