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대한 감각 트리플 12
민병훈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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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하고 불연속적인 감각만이 유일한 논리로 작용하는 세계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 멈춘 소설의 세계

이 책은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 12번째 책이다. 이 책의 특징상 작고 얇은 책에 3편의 단편, 무엇보다 새로운 작가.

그 새로움이 이번 책만큼 강렬했던 적이 또 있었던가 싶다. 새롭다 못해 조금은 충격적인,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 멈춘 소설' 이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된 책이었다.

너는 잠에서 깨어나 밤새 가라앉았던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낮은 천장과 먹색으로 도배된 벽지를 보며 이곳이 낯선 이국의 방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코니에 서서 사진과 영상에서나 봤던 양식으로 건축된 시가지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예전 일들을 떠올린다. 누가 곁에 있었고, 주로 무엇을 했으며, 어떤 곳에 있었는지, 떠올리지만, 위상으로 겹쳐진 시공간속에서 너는 희미함을 느낀다. (p. 12)

<겨울에 대한 감각> 中

이미지들의 나열 속에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는 구분되지 않고 도마뱀이 다니는 낯선 이국의 방에서 눈이 너무 많이 내린 이곳까지 모두 아무런 경계가 없다. 작가는 겨울을 이렇게 감각했다는 것일까 겨울로 연상되는 사람관계에서의 의미를 상징한 것일까... 감각은 느껴지지 않지만 서늘한 소설임은 맞다.

한밤중에, 창문을 열었고, 담 너머 세상은 깊은 암흑에 빠져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입김이 흩어지는 창밖을 긴 시간 바라보는 것으로 갑자기 깨어난 새벽 내 지루함을 견디고 있었다. 이제 몇 시간 뒤 동이 트면, 암흑이 걷힌 산중에서, 요 몇 달간 나를 괴롭히던 여러 소리와 상황들이 다시 담 너머에서 밀려 올 것이다. (p. 41)

<벌목에 대한 감각> 中

'나'에겐 일년전 신문지면에 오를만한 사건이 있었다. 그후 고모 혼자 살던 집에 혼자 살고 있다. 이 집은 산 언저리에 있고 이 산에선 벌목이 진행중이다. 그나마 앞 작품에 비해 객관적 상황배경은 좀 파악할 수 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보다는 '나' 가 벌목에 대해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는 서사는 앞 작품의 '겨울' 과도 연결되고 뒤에 나오는 '불안'과도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트리플' 시리즈 구성에 맞춤한 3작품이긴 하다.

나는 산페르난도 항구 선착장에서 항해에 합류할 요트를 기다리고 있다. 선장은 입국 절차에 대해 미리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p. 70)

잠깐 내려다본 바닷속은, 낮은 암흑으로 일렁였다. 선장과 선원은 보이지 않고, 나는 밤바다에서, 이제 모든 게, 다시 처음처럼 가라앉길 기다린다. (p. 94)

<불안에 대한 감각> 中

이미지적 소설문체다 보니 안그래도 단편에 대한 이해력이 딸리는 나로서는 서사를 알게 해주는 문장을 집착적으로 찾아가며 읽게 되곤 했다. 누가 어디에서 언제 무슨일이 어떻게 왜 벌어졌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은유와 상징을 넘어선 저자의 표현방식은 너무나 생경했다. 단편 3작품 뒤에 실린 [에세이-당신을 통한 감각론] 은 사실 저자 자신에 대한 소개글이다. 일종의 '작가의 말' 이라고 봐도 될법한. 하지만 저자는 '나' 라고 하지 않고 '당신'에 대해 설명한다. 그 '당신'이 곧 '나' 저자 인데...

이제,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말을 당신만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서투르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당신은 소설에게 당신의 손을 빌려준다. 당신은 감각에게 당신의 입술을 빌려준다. 당신은 모든 것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에 대한 감각이 여기로 오고 있다. (p. 107)

<에세이 - 당신을 통한 감각론> 中

저자인 '나'는 '내' 이야기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나'의 말을 '나'만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기에 서두르지 않고 '내' 소설을 쓴다. '내' 소설은 '나'의 손으로 쓰여지고 '나'의 감각은 '나'의 입술로 말해진다. '나'의 모든 것에게 '나' 모든 것을 준 셈이다.그렇게 '나'의 감각이 여기 이 소설에 실렸다.

저자에게 소설이란 '나' 만의 이야기인 것일까... 의아해 질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의 '해설' 을 이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읽게 될 줄이야.

여기 실린 세 소설을 읽었을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좀처럼 읽어내기 힘든 그의 글 앞에서 난감함을 느끼기도 했다. 읽다말다 몇 차례 반복하던 끝에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지금 이 읽기를 방해하는 것들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다. 읽는다는 것은 쓰여진 것을 받아들이는 일대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행위가 아니다. (중략) 읽히지 않는 민병훈의 소설은 의식이라는 만들어진 심연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원초적인 표면을 재현한다. 시각으로, 청각으로, 촉각으로 감각된 것들이 무차별적으로 '현상'하는 가운데 이 소설이 재현하는 것은 독해할 수 없는 표면으로 이루어진 무의식이다. (p. 112~113)

민병훈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싶었지만,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욕망이었음을 이제 안다. (p. 122) 불친절하고 불연속적인 감각이 나를 나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논리로 작용하는 세계,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 멈춘 소설의 세계, 민병훈이 심연을 지배하는 작가의 자리 대신 선택한 것은 모두에게 그들의 자연을 돌려주는 작가의 자리다. (p. 124)

<해설 - 감각을 위한 논리 (박혜진 문학평론가)>

줄거리가 없는 소설이라니 낯설다. 시도 아닌데 줄거리가 없다니.

이미지로 진술하는 소설이라니 낯설다. 시적 상징이나 은유도 아닌 그저 이미지라니.

문학평론가도 좀처럼 읽어내기 힘들었다는 작품에 대해 그 작품을 쓴 작가의 무의식을 유추하며 읽어야 한다는 건 독자에겐 모험이다.

이러한 모험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읽혀지지 않는 글에 대한 방해물을 생각하고 읽고, 읽는 내용에 대해 이해하려는 습관을 돌이켜보고, 소설읽기가 주는 감동에서 멀어져보는 경험이 의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감각' 이란 애초에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므로 비록 쓰여진 글이라 읽기는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러한 낯선 문장들이 내게 전해오는 서늘하고 외롭고 불안한 감각을 느낀 것으로 이 책은 온전히 읽은 셈이 된 것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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