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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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20세기 위대한 사상가이자 한때 나치에 참여한 하이데거 철학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표지색이 마음에 든다. 무거운 주제에 어울리는 톤이다. 표지 한쪽에 사진이 있다. 한 남자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사진크기가 작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이 강렬하다. 처음엔 히틀러 사진인줄 알았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사진속 인물이 하이데거 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이데거가 히틀러와 이토록 닮았던가?!

한나 아렌트 외에는 잘 모르는 이름의 사상가들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이 네 명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이들은 모두 하이데거의 유대인 제자들이었다. 이 책의 원제는 Heidegger's Children 이다.

2001년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Heidegger's Children ) 초판이 출간된 이래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동화된 유대인 사상가'들과 마지막까지 자신의 심오한 사유길이 갖는 독일적 본성을 고집했던 철학자 사이의 우려스러운 친밀성에 관한 것이었다. (p. 8)

이 책의 원서는 2001년에 나왔다. 이 책의 시작은 1판과 2판의 머리말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머리말은 이 첫 페이지의 이 문장까지만 읽고 패스할 것을 추천한다. 머리말이 너무... 길고... 본문보다도 더... 어려웠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동화된 유대인 사상가들' 과 '자신의 심오한 사유길이 갖는 독일적 본성을 고집했던 철학자' 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이 이들 사이의 '우려스러운 친밀성' 이라고 여겨진다.

'1933년 하이데거는 히틀러라는 디오니시우스(시라쿠스의 폭군) 앞에서 플라톤을 극적으로 연기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총통을 지도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보란 듯이 나치 운동에 가담했다. (p. 45)' 그리고 플라톤이 디오니시우스를 철학자왕으로 만들겠다는 허상을 실패했듯이 하이데거도 히틀러를 지도하겠다는 망상에서 내쳐졌다. '국가사회주의의 끔찍한 악행을 하찮아 보이게 만드는 하이데거의 불온한 노력, 그것도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질적 가해자인 독일인들을 역사적 책임에서 면제시켜 주려는 노력은 그의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 고백과 결합되어 그를 더 이상 '훌륭한 사상가'로서 볼 수 없게 만든다. (p. 49)' 그러나 하이데거는 여전히 철학사에서 나름 탄탄한 지지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듯 하다. '[검은 노트]가 드러낸 바와 같이, 그의 철학은 국가사회주의의 교리와 실천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하이데거의 철학은, 해법을 제시하기는 커녕, 문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p. 51)' 그런데도 왜 여전히 하이데거의 철학는 논의되고 소환되는가? ''존재'와 '포에시스'의 이름으로, '이성'과 '근대성'에 대해 하이데거가 보여준 철학적 공격은 당시 소외된 젊은 세대 연구자들의 성향과 놀랍도록 잘 들어맞았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근원적인 것으로 부터 사유의 단초를 얻은 하이데거의 강력한 비판은 '이성과 근대 시대에 작별'을 고하기를 원했던 새롭게 부흥한 포스트모던 시대정신과, 그것도 근대에서 따라 나온 참상 및 파국과 매끄럽게 맞물렸다. 그렇게 하이데거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 이상한 정략결혼이 체결되었다.(p. 53)'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정략결혼이 이혼되지 않는 한 하이데거 철학의 생명력은 앞으로도 꽤 건강히 유지될지도 모르겠다. 근대성 이후 포스트모니즘과 니힐리즘은 아직 현대성으로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고, 일례로 하이데거의 극우적 엘리트주의는 트럼프를 미국대통령으로 만든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욕하면서도 완전히 버리지는 않고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는 철학이 하이데거 철학인 것인지도...

한나 아렌트, 한스 요나스, 카를 뢰비트, 그리고 허버트 마르쿠제 이들은 스스로를 '유대 출신 독일인'이라 생각한 유대 문화에 기반을 두지 않은 유대인이었다. 철학적으로 훈련된 지식인으로서, 그들은 유대 문화 전통이 나닌, 신성한 게르만적 정신과 교양의 이념에서 구원과 의미를 찾고자 했다. 네 명 모두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비록 자신의 기념비적 작품인 [존재와 시간]을 1927년에 출간하기 전까지 이렇다 할 출판물이 없었음에도, 강연자이자 교수자로서의 재능은 이미 하이데거에게 상당한 명성을 안겨주었다. (p. 68)

하이데거의 제자들은 제도화된 정치적 반유대주의가 낳은 트라우마의 한가운데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비유대주의적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독일계 유대인의 경험을 설명할 때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주제는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대인들이 가장 성공적으로 통합되었던 바로 그 국가에서 어떻게 유럽 유대인의 몰살이 고안되고 실행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p. 94)

하이데거는 굉장히 카리스마 있고 강연을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하이데거에게 빠진 제자들의 모습은 역으로 하이데거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하이데거에게는 유대인 제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 유대인 제자들의 대부분은 본인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독일인이라 여기며 성장하고 교육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외부로부터의 구분으로 인해 자신들이 유대인으로 분류되고 신봉했던 스승은 유대인이라고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동화된 유대인'으로서 어느날 (갑자기) 독일인에서 독일인이 아니게된 상황은 그들의 철학적 질문이 되었고 뛰어난 성찰은 역으로 그렇게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낸 스승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이데거의 무엇이 젊은이들을 그토록 현혹시켰던 것일까... 시대상황 때문이었을까... 독일은 당시 유럽중에서도 유대인들이 가장 많고 가장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태동되었다. 이것이 과연 아이러니 일까 아니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일까...

근대는 '절대 죄악'의 시대였다. 이와 같이 모든 수단은 그 절대 죄악을 심연으로 몰아넣기 위해 정당화되었다. 하이데거와 그의 제자들은 모두 '전선 세대'에 속해 있었다. '전선 세대'들이 잠깐이라도 허무주의에 관심을 보인 것은, 어떠한 영구적인 가치가 구축되려면 그 전에 대규모의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당연한 귀결이었다. (p. 73)

하이데거는 정권이 쓰라린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나치당에 당비를 낸 당원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히틀러 만세!'라는 이른바 '독일식 인사'로 강의를 시작했다. (p. 77)

하이데거의 제자들은 그 프라이부르크 현자와 운명을 같이함으로써, 미래 철학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하이데거의 새로운 '실존' 철학은 신칸트주의, 헤겔주의, 그리고 실증주의와 같은 당대의 지배적인 독일 강단 철학의 진부한 아카데미즘을 좌절시켰다고 느겼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나치즘으로의 전향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제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그의 초기 실존철학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주의 기피게 재구성한다면, 그의 정치적 전환은 전면적인 단절로 보이지 않는다. (p. 79~80)

통일된 정치 세력으로서 반유대주의가 갖는 잠재력은 과소평가될 수 없었다. 베를린에 충성하는 것보다 고백적·문화적·지역적 분할이 종종 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되는 독일 정치의 독특한 성격을 감안할 때 말이다.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하는 것만이 '병-폐'로서의 근대성이 갖는 독성을 올바로 치료할 수 있었다. (p. 100)

1930년 히틀러가 권력을 손에 쥐고 나치가 반유대주의적 조치를 확대함에 따라, 의미 있는 유대인 정체성을 탐색하는 일은 독일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긴급한 문화적 의무가 되었다. (p. 107)

하이데거와 제자들은 이른바 '전선 세대'였다. 시민혁명은 실패했고 전쟁에도 참패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고 허무주의가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은 제자들에게 허무가 아닌 '의미'를 강렬하게 시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나치즘 전향은 이미 그의 철학속에 초기부터 잠재해 있었다고 한다. 하이데거와 제자들은 당시의 아카데믹적 철학계에서 이방인에 가까웠다. 하이데거는 본인의 철학이 주류가 되리라 자신했다. 그가 매일 외쳤을 '히틀러 만세'는 사실 본인에게는 '하이데거 만세'를 의미했던 것같다. 독일은 통일국가가 되기 전 아주 자잘한 조각들로 나뉘어졌던 나라였다. 수많은 공국, 대국, 백작령, 남작령 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있는 정치세력, 게르만족이라 통칭되지만 수많은 갈래의 민족의 통칭인 게르만족은 하나의 민족이라 부르기 어려웠으나 하나로 뭉치게 만들수 있던 상대적 유일종족, 반유대주의의 배경에는 '종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또한 독일은 유럽대륙에서 가장 형이상학적 철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당대의 그 어떤 철학보다 자신의 철학이 완전하다 여겼고 강렬한 카리스와 논리로 젊은이들에게 설파했다. 제자들은 죽을때까지 그의 철학적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만도 급급해야 했다. 하이데거의 유대인 제자들은 '반유대주의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유대인성을 발견 (p. 122)' 해야 했다. '아무리 그들이 노력한다 할지라도 민족 혹은 인종으로서의 유대인은 결코 독일인이 될 수 없었다.(p. 124)'

한나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 둘 다 독일의 참사에 대해 설명했다. 두 사람 모두 나치즘을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것이라기보다 유럽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p. 111)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관계는 다정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하게 착취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나이, 사회적 지위, 그리고 배경에 차이가 있음을 감안할 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둘의 관계를 시작한 것은 하이데거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열여덟살의 아렌트는 자신보다 거의 두배나 나이가 많은 남자가 체현하고 있는 가공할 만한 정신을 경이로워했다. (p. 119) 당시 하이데거는 독일 대학에서 생활하는 것을 금지당한 채였다. 그의 명성은 나치의 협력자로서 가졌던 지위로 인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으며, 그는 믿을만한 홍보업자와 친선대사를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아렌트는 이 목적에 딱 들어맞았다. 국제적 명성을 가진 유대인 지식인이자 전체주의에 대한 주요 비평가로서 그녀의 지지는 하이데거의 나치즘과 관련된 집요한 비판을 막아내는데 도움을줄 수 있었다. (p. 141)

저자는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문제점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네 명의 유대인 제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네 명의 제자들에게 공평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네 명의 제자 중 유일한 여성이자 유일하게 스승을 용서한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는 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 하지만 나머지 세 명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사상'에 초점을 맞췄다. '마지막까지 아렌트는 하이데거에게 속박되어 있었다. 죽기 1년전인 1974년에, 그녀는 가까스로 절제해서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아무도 당신이 했던 방식으로 강의할 수 없고, 당신 이전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p. 121)' 한나 아렌트에 대한 폄하적 표현들에 대해 부분적인 반감에도 불구하고 한나 아렌트의 모순적인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긴 하다. 일종의 그루밍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렌트에게 있어서, 아우슈비츠는 독일 역사 혹은 독일민족의 특성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중략) '부르주아지'의 최후의 결과인 폭력적 군중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오직 독일의 폭력적 군중만이 그런 끔찍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p. 156)' 는 한나 아렌트의 (어쩌면) 무감한 태도에 나는 일부 공감한다. 유대인학살이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것은 맞다. 독일이 잔인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왜 일본은 해석하지 않는가? 유럽사상가들은 유대인학살 에만 너무 관심을 집중하고 따라서 독일의 파국적 행태에만 분노한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도 독일 못지않게 잔혹했다. 유럽사상가들이 유대인학살 피해만 논의하는 한 그들의 사상이 세계적 사상이 되기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세계사엔 유럽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하늘은 가치와 의미의 시금석이 되기를 그만두었고, 그 대신 척도로 자리한 것은 '인간'이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느낌이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뢰비트가 주목한 바와 같이 '19세기 중반 이래로, 유럽 역사가들은 더는 진보의 패턴을 따르지 않고, 쇠퇴의 패턴을 따랐다.' (p. 177) 뢰비트에게 니체는 유럽의 도덕적·지적 허무주의에 대한 첫번째 예언자였다. (p. 181) 뢰비트에 따르면, 니체의 영원회귀설은 '힘에의 의지'의 이념 속에서 구체화된 니체 자신의 의지주의자로서의 상상을 포함하며, 유럽 니힐리즘 담론을 교정하는 데 필요한 교설에 해당한다. (p. 182) 뢰비트의 스토아주의는 '동양의 지혜'와 많은 부분 공통점을 갖는다. 그는 나치가 지배한 유럽을 피해 피난처를 삼은 일본에서의 5년의 체류기간(1936~1941)동안 동양적 지혜와 너무나 뜻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 183)

근대 니힐리즘에 대해 스토아적 답변을 했다는 뢰비트는 심지어 일본에 5년간 살았다. 그런데 대체 일본 어디서 살면서 어떤 모습만 보았길래 일본제국주의의 잔혹성은 못보았는가? 당대의 내로라하는 사상가였다면서 유대인으로서의 피해망상 해결하는데만 그쳤던 것인가? '하이데거가 그렇게 많은 재능 있는 유대인 학생들을 지도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들 학생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하이데거 역시 그들을 그렇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전적으로 동화된 독일인으로 보았다. 하이데거는 나치의 생물학적 반유대주의 견해를 결코 공유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에 대한 그의 혐오감은 전통적인 문화 질서, 즉 대체로, 문화적으로 동화되거나 세례받은 유대인들을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 (p. 194)' 뢰비트는 뮌헨에서 동화된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개신교로 개종한 예술가였다. '뢰비트는 자신이 근대 정치적 극단주의가 갖는 파우스트적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스토아적 거리두기의 태도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의식을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극단적 발상이다. 이는 역사를 의미 없는 우연성의 영역으로서 포기하는 태도를 받아들인다. (p. 219)' 뢰비트는 일본제국주의 사회에서 '역사를 우연성의 영역'으로 깨달은 것일까? 시대를 제대로 읽으려 하지 않은 도피적 거리두기가 아니었을까? '뢰비트는 기원전 3세기 신조에 만족한 채로 있었다. 기원전 3세기 신조를 근대에 와서 주창한 학자로는 괴테, 헤겔, 부르크하르트가 있다. (p. 220)' 뢰비트는 끝내 독일인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의 경우는 다수의 우파 지식인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당시 우파 지식인들 상당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본질에서 비독일적이며, 만일 독일이 바이마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본래 독일 전통인 '위대한 정치(니체)'를 열망한다면 '국가의 권위주의적인' 해법이 필요할 거라고 확신했다. 더욱이 하이데거는 항상 자신을 독일의 관료들 사이에서의 일반적 관행을 급진적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의 변변찮은 배경을 감안할 때, 그는 상류층 교수들 사이에서 불편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실증주의, 신칸트주의, 혹은 지식가회학 같이 당시의 지배적인 지적 경향과 맞지 않는다고 느낀 하이데거는 '반지성적 지식인'이라는 페르소나를 선택했다. 하이데거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그가 어째서 철학적·정치적 급진주의에 끌렸는지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p. 197) 하이데거와 국가사회주의는 실존론적 급진주의를 공유했다. 역사적 위대함이라는 목적에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전통과 가치를 '무화시키는'방식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철학적으로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범주들을 '해체'시키려 했다. (p. 201) 당시 독일을 지배하던 정신적 분위기는 실존론적 니힐리즘이었다. 단호한 결단의 파토스가 의무적인 관점으로 보이는 기분 말이다. (p. 208)

하이데거 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될 수록 놀라웠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면 하이데거식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하이데거가 여전히 논의되는 이유이려나... 해체 이후의 건설에 대한 논의는? 일단 뒤로 밀린다. 하이데거 라면 자신이 지도하는 일인(히틀러)의 독재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현실적 건설을 했다고 치자 지금의 하이데거들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1920년대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의 지지자로 변절한 이후, 신앙을 잃은 가톨릭 신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였던 하이데거는 확실히 원래의 신앙으로 복귀했다. 도처에 신학자들이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p. 225) '기초존재론'의 고질적인 윤리적 결함에 대한 요나스의 날카로운 비판은 이후 하이데거 연구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p. 226) 이주로 맺어진 조국의 지배적인 지적 경향에 타협하지 않았던 요나스는 벤야민이 두려워했던 운명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국 내에서 지배적인 철학 학파인 논리 실증주의, 언어 분석, 그리고 실용주의는 바꿀 수 없는 그의 주된 접근법이었던 유럽 형이상학적인 성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p. 232)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으로부터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미국 사회는 그가 도망쳤던 사회보다 확실히 더 나았다. 그러나 때로 요나스는 영혼의 상태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한때 미국 사회를 보편적인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정치적인 덕목들, 즉 경건함, 자립, 투철한 공공심, 시민참여, 뿌리 깊은 공동체는 소유를 미덕으로 삼는 무자비한 개인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p. 273)

저자는 한스 요나스를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추구한 생철학자' 라고 표현했다. 요나스는 철학이라기 보다는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듯 하다. 그러한 윤리적 성향이 강한 요나스의 철학은 생애 말기에 이르러서야 인정받았다. 1987년 84세의 요나스는 독일 서점가협회의 명망 있는 평화상을 받았고 독일 연방공화국의 수훈 십자훈장을 받았다. 1993년 89세의 나이로 뉴욕의 집에서 사망하기전의 10여년이라는 기간이 그의 지적 유산이 대가를 받은 기간이라고 한다. 도덕적 통찰이 필요했던 시대가 어제오늘이야기었겠는가마는 자본주의사회가 강력해진 때에서야 '생철학'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 일까... 요나스의 철학은 신학에 대한 성찰 과 '궁극적 질문'을 상기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데,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가장 무시되는 분야가 그런 윤리가 아니었을지... 어찌보면 요나스 사상 또한 하이데거의 독재를 벗어나기 위한 무기력한 선택은 아니었을지...

1927년, 겉으로 보기에는 뜬금없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등장했다. 이 작품은 강단철학의 진부한 아가데미즘과 의식적으로 결별함으로써, 철학적 탐구를 위한 전례 없는 풍부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같았다. 신칸트주의, 논리 실증주의 등, 철학계의 지배적인 양상은 역사적 시대가 직면한 방향감각의 상실을 체계적으로 무시했다. 반면 하이데거 철학은 위기의 분위기를 존재론적 탐구를 위한 '존재적' 출발점으로 끌어안았다. (p. 277) 마르쿠제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역사성에 대한 논의는 실제 역사에 대한 관심을 담기에는 여전히 지나치게 형식적이었다. 궁극적으로 역사성에 대한 기초존재론의 주장은 가짜-구체철학임을 보여주었다. (p. 289) 그와 동시에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주의자와 하이데거주의자가 역사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 유사성을 갖는다는 점에 강하게 사로잡혔따. 이들 두 학파 사이의 화해 가능성은 이 유사성에 달려 있었다. (중략) 말하자면, 본래적 실존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일반적으로 가능한가? (p. 290) 그러나 마르크스와 달리,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명백하게 비민주적인 '귀족적 급진주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 극복(니체)'이나 '본래성'의 목표를 선택된 소수, 즉 정신적으로 선택된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p. 295~296)

허버트 마르쿠제는 실존론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좌파하이데거주의로 사상의 흐름을 보인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철학도 사상도 잘 모르는 나로서도 하이데거의 극단적 엘리트주의와 마르크스의 극단적 서민주의는 전혀 연결될 수 없어 보였다. 가능하지 않을 연결을 가능하도록 시도해본것이 마르쿠제가 선택한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반박법이었을까? '하이데거는 수치스러운 줄을 모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연합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행위들이 나치가 저지른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p. 325)' 하지만 하이데거의 제자들은 스승의 철학에서 느낀 유의미성을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그리고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본래성은 정신적 엘리트에게 제한되는 가능성이다. 마르쿠제에게 있어서, 물화를 초워라는 능력은 이론적으로 재능있는 사람들, 즉 지적 엘리트들의 영역이다. (p. 332)' 라는 점에서 더욱 포기가 어려웠으리라 생각되긴 한다. 하이데거와 네 명의 제자들은 모두 엘리트주의 라는 공통프레임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에 대한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이데거는 1934년 5월에 대학 총장직을 사임했다. 그의 짧지만 결연한 정치 진출은 적지 않은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하이데거는 철학적으로 교만했으며 정치 경험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무능했다. (p. 336) 하이데거는 인간의 지적 능력보다 더욱 근원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 이전의 성향과 기질들(기분, 도구, 언어, 실천적 참여와 상황, 타자-와의-공동 존재 등)임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보편 개념에 대한 치명적인 불신을 드러냈다. 보편 개념은 그가 파괴하기를 희망했던 서구 형이상학 전통의 상징에 해당한다. '진리' '도덕성' 그리고 '선'과 같은 개념들은 플라톤적 지적 곡해에 해당하는 것으로, '존재'에 대한 '표상'의 독재를 상징한다.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에 따르면, 플라톤은 진리의 장소를 사물 그 자체의 '비은폐성'으로부터 '생각' 혹은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으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서구 철학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p. 337)

하이데거의 오만함에는 점점 더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존재와 시간]이 보수 혁명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론이 사실상 존재의 내용, 즉 양 대전 기간의 시대정신에서 유래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내용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p. 343)' 하이데거의 철학은 세계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이루어졌다. 역사도 그렇지만 철학도 그 시대를 연결짓지 않고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이데거 철학을 양 대전 기간의 시대정신과 연결지어서만 생각해본다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현재와 연결지으려 하는가... '하이데거는 결코 골수 나치가 아니었다. 그는 독일의 '국가 혁명'을 생물학적 발판이 아닌 존재론적 발판 위에 세울 필요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서구 역사에 대한 독일의 비범한 세계사적인 공헌을 위해) 독일의 배타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성했는데, 이러한 배타주의가 인종적·생물학적 용어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그러한 정당화는 19세기 과학주의나 생물학주의 논리로 후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 실존에 대한 모든 물음은 궁극적으로 '존재물음'과 함께 성립하거나 몰락했으며, 그런 이유로 결코 과학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만 답할 수 있었다. (p. 345)' 하이데거의 배타주의가 늘 시시때때로 현실속에서 재현되기 때문인 것일까...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가장 풍부한 '역사성'을 소유한 민족은 독일인이다. (p. 350)' 그리고 지금 세계 곳곳엔 자신들이 가장 풍부한 역사성을 소유한 민족이라 생각하는 나라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알게모르게 하이데거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확실히 [존재와 시간]의 시야에 만연해 있는 실존론적 허탈감은 독일 특유의 유산이다. 그가 사용하는 많은 염세적 비유들은 종교적 구원의 전망을 벗어던지고, 철저하게 현실에 입각한 실존론적 존재론의 요소를 새긴 독일 낭만주의의 자산이자 업니다. 하이데거적 불안은 이전 시대의 희망과 위로가 시대착오적이면서 비양심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으로 보이는 시대에 염세적인 낭만적 감수성을 표현한다. (p. 413) 실존론적 사상이 갖는 '명백한' 특징이 있다면, 민주적 정치 문화의 중심적 에토스인 '공공의 이성'의 가치에 대한 헌신이 부족하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중략) 하이데거와 그의 철학적 후계자들이 보이는 공공 이성에 대한 신뢰의 결핍은 확실히 부분적으로 양 세계대전 사이의 방향감각 상실에 의해 과잉 결정된 세대적 현상이다. 만약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깨뜨림으로써 명예를 부여받은 시대가 있다면, 바로 그 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실존론적 패러다임'이 갖는 시대적 관련성을 알아내고자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결점은 눈감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p. 428)

'공공의 이성'의 가치를 중시하는 저자로서는 하이데거와 네 명의 제자들 중에서 유독 한나 아렌트에 대한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었을 것같다. 나도 '공공의 이성' 이 '염세적인 낭만주의'에 밀리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하이데거 철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글항아리, 2016)에서의 지젝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진지한 철학적 분석에서 외재적 비평은 내재적 비평에 근거해야 한다' 지젝은 월린을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비평가들이 자칫 하이데거가 근대성의 기본 교의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근대성의 핵심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인간중심주의' '민주주의' '진보' 와 같은 가치는 생명공학적 발견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가 던지는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에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은 낡은 기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젝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사상을 독일 민족주의적 보수 이데올로기로 직접적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이데거의 철학체계는 이들 원천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탈맥락화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태 하이데거주의자들이 생겨나는 것이 그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p. 436)' 라는 옮긴이의 설명과 비슷한 내용을 읽으면 하이데거 철학의 위험성이 더 느껴진다. 솔직히 나는 그냥 하이데거 철학이 무시되었으면 좋겠다. 회자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하이데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이데거를 철학사에서 성급하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지 않을까. (p. 437)' 라는 옮긴이와 같은 의견이 많기에 여전히 이렇게 하이데거 관련 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피할수 없다면 즐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지적 토양이 하이데거 철학을 즐길만큼 그렇게 탄탄한 것인지에 대해 불안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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