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컬러 - 색을 본다는 것,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하여
데이비드 스콧 카스탄.스티븐 파딩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마바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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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와 영국의 대표적 화가가 만나 문학과 예술, 역사, 문화, 인류학, 철학, 정치학, 과학을 넘나들며 색의 세계를 탐구한다. 호메로스에서 피카소, 이란민주화운동, <오즈의 마법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흥미로운 소재들로 색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단지 색에 대한 담론을 넘어 세상과 예술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생각지 않았던 새로운 흐름에 휩쓸리게 될 때가 있다. 역사를 읽다가 철학을 읽다가 과학을 읽게 되기도 하고 문학을 읽다가 심리를 읽다가 그림을 읽게 되기도 한다. 그림을 읽다... 그랬다. 나는 그림도 책으로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그림도 책으로 읽다보니 '색'에 대해서도 관심이 갔다. 최근 '색채의 심리'를 읽고나서 더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이 '색'에 대하여 색의 의미에 대하여 알려주기를 기대했다.

차례를 보면 총 10가지의 색이 등장한다. 빨주노초파남보 라는 무지개 7색과 검정,흰색,회색 이라는 무채색 3색. 이 10가지 색은 사실 일상에서 접하는 온갖 색에 대한 기본색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 대해 색에 대해 뭘 배워본적 없는 내가 그저 책만 봤던 내가 10가지 기본색들에 대해서만 알아도 어디인가? 하지만... 이 책은 '색'을 말하고 있으나 '색'에 대한 책은 아니었다. '색'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색'을 통해보는 세상이야기랄까.. 하지만 그 세상도 내게서 너무나 먼 고차원적 세상이야기였달까;;;

색은 우리 대화에서 끝나지 않는 주제이자 영감을 주는 소재였다. 10년 동안 대화를 이어가면서 우리 스스로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는 회화와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기반으로 언어와 색의 관계를 학제를 넘어 탐구하는 학자들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색의 본질 자체에 골몰하며 생각과 이미지를 나누는 작가와 화가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러다보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에 대한 사색도 같이하게 되었다. (p. 11) -서문 中-

<뉴턴의 아틀리에>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물리학자 김상욱 과 그래픽 디자이너 유지원 이 같은 주제에 대하여 다르게 풀어낸 , 과학자는 예술을 보고 예술가는 과학을 생각하는 신선한 책이었다. <온 컬러> 라는 이 책도 비슷하다. 작가와 화가가 만나 '색'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 좀 많이 광범위적이고 좀 많이 사색적이라 쫓아가기 버겁곤 했다.

화학자는 색을 띤 물체의 미시물리적 속성에서 색을 찾으려 한다. 물리학자는 이 물체가 반사하는 전자기에너지의 특정 주파수에서 색을 찾는다. 생리학자는 이 에너지를 감지하는 눈의 광수용체에 색이 있다고 한다. 신경생물학자는 이렇게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서 처리한 것이 색이라고 한다. 물론 각자의 탐구분야가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생각이 서로 엇갈리는 것을 보면 색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혹은 현상과 심리의 불분명한 경계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이 경계의 한쪽에는 화학자와 물리학자가, 다른 쪽에는 생리학자와 신경생물학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p. 16~17)

색이란 무엇인가? 라는 색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색의 존재론적' 질문이 머리속을 둥둥 떠다녔다. 색은 보는 것인가? 그렇다고 여겨지는 것인가? 색이 있기는 한 것인가?;;;

뜻밖에 이야기는 호메로스로 이어진다. 투키디데스가 '바위투성이 히오스섬의 눈먼 시인'이라고 부른 호메로스는 실제로 색을 기피했다. 호메로스가 쓴 세계 최고의 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는 색과 관련된 어휘가 극히 적게 나오고 몇 안 되는 것마저도 직관에 어긋나게 쓰였다. (p. 19)호메로스가 '와인처럼 짙은 바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중략) 이 단어를 호메로스는 수소(牛)를 묘사하는 데에도 썼다. 그러니까 그 단어가 어떤 색을 가리킨다면 적갈색에 가까운 색일 듯싶다. (중략) 호메로스의 시대나 요즘이나 바다 색깔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p. 20) 그리스인의 색각이 발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으로 본 색을 나타내는 어휘가 달랐기 때문이다. (p. 21) 사실 언어마다 색을 표현하는 말의 체계가 다르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색을 어떻게 감지하는가와 반드시 관련있다고 할 수는 없다. (p. 22) 특이점은 그리스인의 색 지각 능력이 생리적으로 덜 발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추상적 색채 어휘를 거의 쓰지 않는 문화에 원인이 있다. 고대 그리스 바다나 하늘에 파란색이 엄청나게 많긴 해도 바다나 하늘은 시시때때로 색이 급변하니까. 하늘도 바다도 색이 균일하지도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파랗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호메로스나 그리스인들에게는 필요 없는 단어였다. (p. 24) 그리스인들은 색에 반응할 때 색상보다는 명도를 중요시했다. (중략) 그렇다면 색채를 나타내는 단어는 우리가 본래 아는 속성에 붙인 이름인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속성을 알게 되었다고도 할수 있는 것이다. (p. 25) 다시말해 스펙트럼을 부분으로 나누는 어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다. 사람의 생리는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하고, 사람의 문화는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떻게 묘사하고 이해하는지를 결정한다. 색의 감각은 물리적이고, 색의 인식은 문화적이다. (p. 27) 모든 색이 근본적으로 환영이다. 색에는 색이 없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사실이다. 색에 있어서는 항상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p. 36)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하려는 이야기이다. 눈으로 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훨씬 더 많은 것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색을 보는가, 무엇을 보거나 본다고 생각하는가, 인지하거나 상상한 색으로 무얼 하는가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어떻게 색을 만들고 색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주제별로 나뉘거나 시간 순서대로 나아가지 않는다. 관심이 가는 작은 주제를 내키는 대로 다룬다. (p. 37)

정말 뜻밖에도 색에 대한 담론의 책이 호메로스에서 시작할 줄은 몰랐다. 고전읽기를 좋아하고 더구나 최근 <오뒷세이아>를 읽고 있는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니 <일리아스>를 읽을때에도 색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랬구나... 색을 표현한다는 것이 눈으로 본 색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었구나...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이었다. 색은 그저 환영이었나... 눈으로 보고 있지만 볼 수 없었던 그런 것이었나...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색' 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 놓은 이 부분들은 이제 겨우 '서론' 에 불과하고, 서론의 제목은 '색은 중요하다' 이다. 정말이지... 생각보다... 색은 훨씬 심도깊게 중요한 것 이었다!

1장 Red : 당신이 묻고 싶은 질문이 들린다. 색이 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 장미는 붉다

'빨갛다'라는 말은 발간 사물의 색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빨갛다'라는 말이 빨간 것을 가리킨다는 말은 명료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빨강을 시각적 특징으로 강력하게 경험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정의가 없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곤란해지거나 '빨강'이 정녕 무엇인가 의아해하지는 않는다. 의아해할 만한 게 있다는 생각조차 안 한다. 그런데 있다. 그게 색의 본질이다. 일단 이런 의문으로 시작해보자. 장미는 붉은가 아니면 그저 붉게 보이는 것인가? (p. 44~45) 색은 사물의 외양의 특별한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면인가? 어쩔 수 없이 '색'이라고 대답하고 싶어지낟. 그게 문제다. 색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늘 순환논법에 갇히는데 거기에서 대체 어떻게 빠져나올지 알 수가 없다. (p. 47)

빨강 이라는 색채가 주는 느낌처럼 강렬하게 1장은 색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한다. 뉴턴의 물리학적 발견에서 시작해서 '색은 실재가 아니'라는 철학적 탐구를 지나 인간만이 색에 이름을 붙일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추상화 능력으로 이어진다. 결국 색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2장 Orange : 무엇이 오렌지색인가? 아, 오렌지. 그냥 오렌지! - 크리스티나 로제티 <무엇이 분홍인가?> ; 오렌지는 새로운 갈색

어떤 언어에서든 색을 가리키는 단어는 언어인류학에서 '기본색 용어'라고 부르는 몇 개의 범주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이 단어들은 구체적으로 색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이름이다. 기본색 용어를 일반적으로 '색을 나타내는 단어의 최소 부분집합으로 어떤 색이든 그 가운데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라고 정의한다. (p. 69) 그러나 영어에서 '오렌지'는 기본색 단어 가운데 유일하게 다른 유사 하위 단어가 없다. 오렌지 범주에는 오렌지색밖에 없는데, 이 이름은 과일에서 왔다. (p. 71) 초서가 사용한 중세 영어보다 훨씬 이전 시기인 5~12세기에 쓰인 고대 영어엔 'geoluhread(노랑-빨강)'라는 단어가 있었다. 사람들은 오렌지색을 볼 수 있었지만 거의 1,000년 동안 영어로 그 색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단어를 합치는 것뿐이었다. (p. 72) '오렌지orange'라는 단어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naranga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아마 그보다 더 오래된 언어인 드라비다어의 naru(향긋하다는 뜻)라는 어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오렌지와 함께 이 단어도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옮겨갔다. 거기에서 유럽 언어로 전해져서 헝가리어로는 narancs, 에스파냐어로는 naranja가 되었다. 이탈리아어에서는 원래 narancia고 프랑스에서는 narange였는데 두 언어에서 초성 'n'이 사라져 각각 arancia와 orange가 된다. (p. 76~77)

오렌지색은 있었지만 그 색을 표현하는 단어는 오렌지라는 과일이 유럽에 들어오고나서야 생겨났다. 언어학적으로 시작한 오렌지색에 대한 담론은 반 고흐의 '색채가'적 시도가 표현된 그림을 거쳐 클랭의 '모노크롬 회화'를 지나 바넷 뉴먼의 '더 서드' 라는 작품으로 마무리된다. 저자에게 있어 영어의 역사적 과정과 현대미술에서의 오렌지색은 그렇게 연결되지만 나는 그저 고흐의 그림에서 새로운 오렌지색을 발견한 것이 기뻤을 따름이다.

3장 Yellow : 흐린 노란색 조합은 내 피부색이 아니오, 내 형제들이 그렇다고 믿게 만든 것일 뿐. -프랜시스 나오히코 오카 <파란 크레용> ; 노란 위험

교육받은 서양 사람들도 동아시아인을 직접 접해본 적은 거의 없었으므로 비슷하게 생각했다. 13세기 말부터 18세기 말까지 거의 500년 동안, 대부분 사람들이 조지 워싱턴 처럼 아시아인은 '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60년 까지도 프랑스 외교관이 일본인에 대해 '우리만큼 희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물론 동아시아인은 실제로는 희지 않다. '유럽인 피부색'이라는 사람들이 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다 곧 중국인이 '노랗다'고 불리게 되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인들은 노랗지도 않다. 권위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1판(1910~1911)이 출간될 무렵에는 중국의 방대한 인구 가운데에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나, 그래도 백과사전에는 중국인 가운데 '노란색이 가장 많다'라고 기록되었다. (p. 97)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시아인이 서양인 눈에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상대로 보일 때에는 희게 보인다. 16세기 중국과 일본에 간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서양의 도덕적 가치와 경제적 이익에 위협이 되는 듯할 때에는 노래진다. 상상한 도덕적 특성이 상상한 피부색과 뒤섞인다. (중략) 색소가 아니라 편견 때문에 만들어진 노란색이었다. 하지만 일단 아시아인이 노란색이 되자 그 색은 당연시되었다. 부정확한 편견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인 듯 보이게 되었다. (p. 101)

동아시아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사실 이 표현은 한중일 딱 3나라를 지칭한다. 그리고 몇십년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일본 딱 두 나라는 지칭했다. 유럽인들에게 동아시아인의 이미지는 이 두 나라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두 나라의 폭발적인 변화는 그들에게 위험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동아시아인은 '황인'이 되었다. 피부색으로 시작한 노란색 이야기는 '살색' 이라는 크레용을 거쳐 고대 그리스 의학에서의 4체액설을 지나 '제유' 라는 현대작품에 이른다. 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실 인류의 피부색은 그렇게 다양하지도 그렇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4장 Greens : 내 손을 작은 텃밭에 심는다 - 나는 푸르게 자랄 거야.-포루그 피로호지드 <또 다른 탄생> ; 알 수 없는 녹색

아무튼 녹색이 생태학적 관심을 뜻하는 색이 되었다. 그렇다고 녹색이 환경주의 말고 다른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p 124) 녹색은 역사적으로 무함마드와 관련 있는 색이다. 무함마드는 녹색터번과 녹색망토를 둘렀고, 그가 사망했을 때 수놓인 녹색옷으로 시신을 덮었다고 전해진다. 녹색은 10세기부터 12세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북아프리카 전체를 다스린 파티마왕조의 색이었고, 이어 이슬람교 시아파의 표지가 되었다. (p. 126) 정치가 색으로 구분되는 이유는 빤하다. 색은 알아보기도 쉽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오고 여러 다양한 형태와 맥락에 적용될 수 있다. (p. 128) 정치에 쓰이는 색은 모두 각자 유래와 역사가 있으나, 역사는 너무나 다양한데 기본색은 몇 개 안되다보니 색과 정치의 연결이 종잡을 수 없기도 하고 서로 상충하거나 자꾸 바뀌기도 한다. (p. 134)

세계 어느 나라든 녹색당 이라고 하면 환경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정치집단을 의미한다. 나도 녹색은 환경적인 색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녹색은 아일랜드에서 이란에서 다른 의미의 정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색으로 구분되는 정치세력은 녹색 뿐만 아니라 빨강, 파랑, 하양 등 색으로 자신들을 표현하곤 했다. 하지만 빨강은 왕가의 색이자 저항의 색이기도 했고 파랑도 녹색도 그러했다.색은 또다시 색이 지니고 있는 '의미'로 인해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있었다.

5장 Blues : 리노 다코타 네 마음에 친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네가 날 홀린 줄 알면서 나한테 전화도 안 하지 그래서 우울해 펜톤 292 -마그네틱 필즈 <리노 다코타> ; 우울한 파랑

감정에도 무지갯빛이 있지만, 스펙트럼의 여러 색 중에서도 파란색이 가장 압도적인 감정의 색이다. (p. 144) 14세기 말부터 파란색은 낙담과 절망의 색이 되었다. 아마 청색증이라는 병과 연관 지어 이런 정서를 유추하지 않았나 싶다. (p. 145) 파랑은 초월의 색이다. (중략) 비슈누의 파란 피부, 치유의 힘이 있다는 파란 부처, 시크교도들이 쓰는 파란 터번, 유대인들이 기도를 드릴 때 쓰는 숄의 파란 줄무늬, 이스탄불에 있는 아름다운 블루 모스크 등을 보아도 파란색과 초월성의 연결이 보편적임을 알 수 있다. (p. 154)

블루스 라는 음악으로 시작해서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지나 또다시 클랭이라는 화가에게로 온다.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 라는 색이름이 있다는데, 오렌지 색 때도 그랬지만 캔버스를 온통 같은 물감으로 칠해놓은 작품에서 그렇게 많은 의미를 꺼낼 수 (혹은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인 파랑은 내게 결코 우울하지도 초월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6장 Indigo : 인디고, 인디고잉, 인디곤. - 탐 로빈스 <지터버그 향수> ; 쪽빛 염색 / 죽음

적어도 영어권에서는 뉴턴 이전에 '인디고'를 색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뉴턴은 프리즘이 여러 색으로 분산시킨 빛에 일곱 가지 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색'이라고 생각한 것에 '오렌지' 와 '인디고'를 더했다. (p. 169) 뉴턴이 인디고를 색으로 '본' 뒤에도, 한동안은 여전히 염료였다. (p. 170) 인디고 염색은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중략)즙을 짜낸다. 즙을 햇볕에 내놓고 증발시키면 꾸덕해지는데 이걸 조각조각으로 자른 것이 우리가 보는 형태다. 유럽인들이 흔히 본 '형태'는 고체 덩어리였다. 그래서 초기 영어사전 중 하나인 1616년에 나온 사전에 '인디고'가 '터키에서 들어온 돌로 파란색 물을 들이는 데 쓴다'라는 잘못된 정의가 실렸다. 이 오해는 그 뒤 백여년 동안 자주 되풀이된다. (p. 174) 18세기에는 이 염료에서 나온 색을 '인디고'라고 부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보통 '네이비(해군)블루'라고 불렀다. (p. 188)

빨주노초파남보 라는 무지개색에 들어가 있듯이 그동안 그저 '남색' 이라고 불렀던 색이 언제부터 '인디고' 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이 인디고 색은 만들어내기까지 엄청난 수고가 필요했고 과거에 그 엄청난 수고를 담당한 이들은 '노예' 였다. 플렌테이션 노예농업이라고 하면 목화나 사탕수수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인디고 농장이 훨씬 더 힘든 노동을 필요로 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디고 색을 가장 많이 썼던 유럽에서 이 색이 인디고 라고 불린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인디고 라는 식물이 염료가 되기까지 들어간 노예노동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나조차도 인디고 색 보다는 네이비 색이 더 편하게 불렀던 배경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7장 Violet : 그자들의 망막이 병들었다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 보랏빛 박명

어느 언어에서든 바이올렛과 퍼플을 대체로 구분하는 것 같다. 색조로 구분한다기보다는 환한 정도로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바이올렛은 퍼플의 안쪽에 작은 불을 켜놓은 색이라고나 할까. (p. 192) 현대 미술은 그 빛을 내는 보라색으로 시작되었다. 1874년 파리에서. 4월 15일에.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날을 꼭 집어야 한다면 그날이 그럴듯한 날이다. 무언가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제나 허위에 가깝다. (p. 193) 무엇보다도 미술계를 분개하게 만든 것은 사실 어떤 색이었다. 바로 보라색이다. (p. 194)

'purple' 이 자주색 이고 'violet'이 보라색 이라고 한 저자의 글을 보며 여지껏 내가 퍼플을 보라색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뭘까 어지러웠다. 여하튼 저자는 인상주의파에서의 보라색 혁명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상주의파의 화가들이 쓰는 보라색을 보며 위스망스는 '그자들의 망막이 병들었다'고 말했다 한다. 비평가들이 분개할 만큼 인상주의 작품에 보라색이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뚜렷한 대상을 그렸던 그림에서 '대상과 화가 사이에' 있는 것을 그린 인상주의파 그림과의 차이점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한 색이 바로 보라색이었다. 마네는 보라색을 '대기의 색' 이라고 했다. 모네의 팔레트에서도 보라색은 빛을 발하는 색이었다. 공기에, 빛에 색이 있는가? 없다. 아니 있어도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이것을 그렸다.

그때는 예술이 빛의 착시 현상에 푹 빠지기보다는 세상의 근본적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색은 안을 칠하는 데에만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선의 권위를 확인하는 이른바 '도의적 색'이라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상주의 회화에서처럼 색이 추가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주요한 것이 되어버리면, 다시 말해 색이 회화의 주제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도의적이지도 진실하지도 않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색은 유혹적이고 기만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색이 인상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한 것이고 비판자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이 되었다. 비판자들은 나무는 보라색이면 안 되고 세상은 색의 '얼룩' 보다는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p. 206) 그럼에도 미술사에서 현대예술의 시초로 꼽히는 사람은 언제나 세잔이다. (p. 211)

나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당대 비평가들에게 뭇매를 맞았던 이유가 뭉개지듯 그리는 화법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었다. 뚜렷하지 않은 그야말로 인상을 그린 그림이라서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색' 에 집중해서 의미를 알고 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럼에도불구하고 인상주의 파의 '색' 보다 세잔의 구성이 더 인정받는 점에서 여전히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비주류인가 싶었다. 사실 일상에서 가장 장식적인 활용도가 높은 작품들은 대개 인상주의파 화가들의 작품인데 말이다.

8장 Black : 검정은 가장 기본적인 색이다 -오달롱 르동 ; 기본 검정

오드리 햅번이 1961년 영화 <티파티에서 아침을>의 첫 장면에서 입은 몸에 달라붙는 검정 새틴 슬리브리스 드레스보다 더 유명한 드레스는 세상에 없을 듯 싶다. 이 드레스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리틀 블랙 드레스 LBD 다. (p. 217) LBD는 순수한 가능성의 드레스다. 누구든 사회적 격차를 좁히고 오직 한순간이라도 없앨 수 있을 거라고 꿈꾸게 하는 드레스다. 검은 옷은 언제나 그런 역할을 해왔다. 계층을 지우는 일종의 사회적 연금술을 수행한다. (p. 222) 검은색은 겸허하기도 하고, 과도하기도 하다. 빈곤의 색이자 과시의 색, 경건함의 색이자 변태성의 색, 절제의 색이자 반항의 색이다. 화려한 색이면서 우울한 색이다. (p. 224) 인간의 시각기관은 에너지의 특정 파장을 감지하여 처리하고, 우리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각 경험에 색 이름을 붙인다. 그걸 색이라고 부를 수는 있으나, 이 파장들 가운데 검은색에 해당하는 파장은 없다. (p. 228)

검정색 옷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검정옷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옷이다. 여러 의미에서. 옷을 통해 보는 검정색의 다양성은 그 다층적 양명성에도 불구하고 어렵지않게 다가왔다. 하지만 검정색은 사실 색이 아니다. 빛이 없는 일종의 암흑이다. 검정을 관념적 색으로 볼 경우 종교성으로 이어진다. 말레비치의 <검은 정사각형> 이라는 그림은 이콘이라는 성화를 거는 위치에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한가지 색만 칠해놓은 그림을 도통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9장 White : 우리는 아직 이 흰색의 주술을 풀지 못했다. -허먼 멜빌 < 모비 딕> ; 하얀 거짓말

'흰색은 모든 색이 섞인 색이다' 이게 흰색에 관한 첫번째 거짓말이다. 뉴턴의 프리즘은 '흰빛'이 어느 정도 구분 가능한 색들의 연속체로 나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색을 프리즘으로 한데 모으면 다시 원래의 흰 빛이 된다. 그렇지만 보통 빛을 흰색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흰색이 모든 색을 섞은 것이라는 말이 빛에는 들어맞을지라도 물감을 섞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흰색은 무엇인가? 검은색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했지만 흰색이 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리학자들은 흰색도 검은색과 마찬가지로 색이 아니라고 말한다. (p. 243) 흰색은 무결한 순수의 색이며 완전한 면죄의 색이고 빈 페이지의 색이고 깨끗한 출발의 색이다. 그러나 이것은 흰색에 관한 두 번째 거짓말이다. 흰색은 유령의 색이기도 하다. 백골의 색이다. 구더기의 색이다. 흰색은 창백하게 질리게 만드는 색이다. 미래를 약속하거나 과거를 응시하는 대신 겁먹게 하고 메스껍게 하기도 한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멸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를 등 뒤에서 찌른다' 이게 세번째 거짓말일 것이다. 두번째 것의 다른 버전이기는 하지만, 흰색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둘 다 거짓말이다. 색에는 의미가 없다. (중략) 색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색이 어떤 의미라고 말해 색이 의미를 띠게 만든다. 시각기관하고는 큰 상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p. 245)

저자가 색과 빛을 혼용할 수록 저자의 이야기는 심도깊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혼란을 종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색의 의미에 대해 알고자 읽은 책에서 색은 의미가 없다고 답해주니 나로서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지만... 그러나 색에 대한 들쭉날쭉한 저자의 담론에는 분명 새로운 발견들이 있었다. 흰색에 대해서는 주로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이야기를 한다. 흰 대리석으로 칭송받는 고대작품들이 사실 채색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다시한번 캔버스를 온통 한가지색으로 칠한, 여기서는 흰색으로만 칠한 그림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내 머릿속은 하얘져 갔다.

10장 Gray : 회색은 슬픈 세상 색이 추락해 들어가는 곳 -데릭 저먼 <채도> ; 회색지대

'사진은 사실상 포착된 경험이다' 라고 수전 손택이 말했다. 그런데 이 '사실상'이 문제다. '포작된 경험'이긴 한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진은 회색조로만 이루어진 포착된 경험이었다. 그런데 경험이 정말로 그 사진처럼 보이는가? 색은 어떻게 하고? 탁월한 예술 비평가 존 버거는 좀 더 정확하게 사진은 '본 것의 기록'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사진은 대상의 이미지라기보다 기록에 가깝다. 흑백사진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p. 267) 이런 사진을 보통 '흑백'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흑백은 아니다. 얼룩말이 흑백이고 사진은 아니다.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회색 톤들을 나타내기에는 '흑부터 백까지'가 더 적절한 말일 것 같다. 흑백사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회색이니까 '회색' 사진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p. 270)

이 책을 읽으며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었던 문장이었다. '얼룩말이 흑백이고 사진은 아니다' ㅍㅎㅎ 맞는 말이다.

회색에 대해서는 '흑부터 백까지' 의 색으로 표현된 '회색사진' 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진이 담아낸 의미 혹은 상징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컬러의 시대가 왔음에도 여전히 흑백사진들이 찍히고 도로시가 컬러의 세계를 여행하고도 회색의 집으로 돌아왔듯이 색에 대한 담론은 어쩌면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색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675년 왕립학회장 헨리 올든버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뉴턴은 자기 눈이 '아주 날카롭게 색을 구분하지는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무지개에서 일곱 색을 본 적도 있지었지만 보통은 빨강, 노랑, 녹색, 파랑, 보라 다섯 가지만 보였다. 그런데 온음계는 일곱 음으로 이루어진다. 천지창조도 7일 동안에 이루어졌다. 무지개는 우주적 조화의 징표이니, 일곱 색이 있는 게 마땅했다. 그래서 뉴턴은 빨강과 노란색 사이에 주황색을 추가했고 (보았고?) 파랑과 보라 사이에 남색을 넣었다. (중략) 뉴턴은 자기가 본 색에 둘을 추가하는 게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생겨난 것이다. 과학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믿음의 산물에 가깝지만. (p. 31) 무지개에서 실제로 일곱 색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일곱 색을 본다. 색에 있어서든,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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