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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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사회주의, 포퓰리즘, 인종차별, 문화권력, 디지털 정치, 기후위기…

전 지구적 이슈에 대한 지젝의 재기발랄하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통찰

 

 

슬라보예 지젝

지은이 소개글에 따르면 저자는 현대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슬로베니아 출생으로 파리와 런던, 뉴욕 그리고 한국의 경희대학교를 오가며 종횡무진 활약한 저자는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인 통찰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저자가 여러 언론 매체에 기고한 짧은 글들을 묶은 이 책은 그러한 지젝의 통찰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책의 제목이 된 '천하대혼돈'도 이런 바탕에서 나왔다. 이 표현은 세계를 끊임없는 모순의 충돌로 이해한 마오쩌둥의 사상을 응집한 것이기도 하다. 질서와 안정은 정치의 소멸을, 대혼돈은 정치의 출현을 의미한다. (중략) 이 책에서 지젝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의 귀환이자 또한 정치적 주체의 호명이다. (중략) 그 정치의 도래에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용기이다. 제작의 말을 받아서 우리가 행동을 결정할 차례이다. (p. 7) -추천의 글 中-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있게 탐구한 책이 아닌 이런저런 글을 모은 책은 대부분 맥락을 파악하기가 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더구나 지젝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철학을 좀 공부한 사람들만 알법한 전문개념들도 사용하고 있어서 더 현학적으로 다가오는 문장들로 인해 이해하는데 많이 버거웠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굳이 다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대충 넘기면서 핵심만 파악해보면 지젝의 통찰은 제법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자유주의적 서구가 다른 세계에 기준을 부과하는 일은 더는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삶의 방식은 동등한 것으로 취급될 것이다. (p. 17) 이러한 새로운 '관용'을 뒷받침하는 슬픈 진실은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더는 해방된 인류라는 긍정적 전망을 이데올로기적 꿈의 형태로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략) 포퓰리즘은 바로 이 실패의 증상, 그 헌팅턴식 질환이다. (p. 18)

과거에는 우월한 나라가 있고 그렇지 못한 나라가 있을때 우월한 나라가 열등한 나라를 도와주는 관용을 통해 세계적 평등을 추구했다면 지금은 저마다 모두 우월한 나라라고 자칭하며 동등하게 취급하는 대신에 서로에 대한 관용은 오히려 없어진 셈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인류의 해방에 대해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세계적 평등을 추구하는 보편주의가 사라지고 저마다 자국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게 된 지금의 세계는 포퓰리즘이 득세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을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난관에 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모두 망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치명적 위험이 있다. 여기서 누가 결단을 내릴 것인가? 과연 누구에게 결단을 내릴 자격이 있나? 이 시점에는 직접적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 거시적 안목에서 과학척 추론을 근거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이미 생태적 교란의 효과를 느끼고 체험하고 있다해도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직 실제로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 탓으로 인간은 그 모든 정신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의 보편성에도 기본적 충위에서는 그저 지구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생물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략) 지구온난화의 교훈은 인류의 자유가 지구 생명체의 안정적인 자연적 변수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했다는 점이다. (p. 21)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어도 우선순위를 똑바로 세우고, 전쟁으로 차지하려는 바로 그 지구가 위험에 처해 있는 참에 지정학적 전쟁 놀음을 벌이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인정하는 일이다. 국가 간 경쟁이라는 논리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인 이유는 인류가 환경을 대하는 새로운 관계 양식의 변화를 정립해야 할 시급한 필요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p. 23)

새로운 세계질서의 필요성은 정치적 혼란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생명의 위협때문에라도 긴급히 필요하게 된 시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은 어느 한나라 또는 몇몇의 선두나라의 변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말 전지구적 협력이 필요하다. 자국우선주의가 심화될때 지구적 문제는 더욱 급속하게 심각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유럽은 미국-먼저, 러시아-먼저, 중국-먼저 라는 구호 사이에서 지배력을 경쟁하는 세계와 맞지 않다. 군대를 만들지 않으면 유럽은 이 거대 삼자 세력이 벌이는 지배 경쟁의 놀이터가 될 터이고,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p. 37) 초국가적 통일체인 유럽으로서, 작금의 도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국민국가라는 제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유럽이다. (중략)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주관적'사회민주주의에 맞선 '객관적' 사회민주주의다. (p. 40)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방법의 하나로 저자는 유럽연대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유럽통합군대라는 실질적 방어조직과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적 대안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새로운 세계질서를 조금은 혁명적으로 꿈꾸고 있는 것도 같다.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투쟁과 이슬람혐오에 대항한 싸움은 동일한 투쟁의 두 측면으로 보아야만 한다. 오늘날에는 반유대주의가 좌파적이라는 주장이 종종 나온다. 이러한 몰이해에 반대하여 우리는 오늘날의 반유대주의가 포퓰리즘이라고 강조해야만 한다. 포퓰리즘은 언제나 국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그게 유대인이든 이주민이든 혹은 둘이 합쳐진 것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진정한 좌파는 결코 반유대주의적이지 않다. (p. 58)

오늘날 궁극의 '적'은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자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시스템 그 자체, 행위자로 쉽사리 귀속할 수 없는 시스템의 어떤 작동 양상이다. (p. 86) 개인의 탐욕에 맞춰 점증하는 불평등을 도덕주의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 더는 '탐욕적'행위를 허용하거난 심지어 부추기는 일이 없게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우리의 임무이다. (p. 87)

오늘날 근본적 변화를 상상하기 힘든데도 왜 근본적 변화를 고집하는가? 왜냐하면 우리와 전 지구적 곤경이 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급진적 변화만이 생태적 파국과 유전공학의 위험 및 우리 삶의 디지털 통제 같은 전망에 대처하게 해줄 수 있다. 이 과제는 불가능하지만 그만큼 절실하다. (p. 97)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보스니아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포퓰리즘 적 정치사건들에 대해 저자는 쓴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들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사리 휩쓸리지 말고 그 사건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채야 한다. 하지만 때론 그 주체가 불분명하기에 세계정세는 더욱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시스템적으로 교묘하게 이용되는 행위들이 더 교묘해지기전에 급진적 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진리로 회귀하는 유일한 길은 보편적 해방에 참여하는 입장으로부터 진리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역설은 보편적 진리와 당파성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보편적 진리는 해방을 향한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질 수 있고, '객관적' 무관심의 태도를 견지하려는 사람에게는 닫혀 있다. (p. 106)

그러한 범죄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것들의 끔찍함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충격을 받을 필요가 있다. <동물농장>의 서문에 조지 오웰은 자유가 어떤 의미를 지닌다면 이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말할 권리"를 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론 미디어가 검열되고 규제될 때 우리는 바로 이 자유를 빼앗긴다. (p. 114)

트로츠키는 국가의 핵심이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조직이 아니라 기술적 서비스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트로츠키가 우편, 전기, 철도 등을 지배하는 일이 권력의 혁명적 쟁취의 핵심 계기라고 보았던 것과 유사하게 국가와 자본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디지털 망체계의 '점령'이 오늘날 다른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지 않을까? (p. 138) 권력을 가진 자들이야말로 저항운동을 고립시키고 봉쇄하기 위해 디지털 망체계를 선별적으로 폐쇄하는 일에 스스럼이 없을 사람들이라는 것. 대중의 불만이 대규모로 폭발할 때 첫 번째 행동은 언제나 인터넷과 휴대폰의 차단이 될 것이다. (p. 139)

참여해야 바뀐다. 무관심은 곧 자발적 복종이 된다. 알아가는 과정에선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할 이야기들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할 장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에 대해 왜곡과 검열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정치는 디지털세계에서 더욱 난해해지고 있다. 거짓뉴스가 판을 치게 된 세상에서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워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자유를 추구해야 할까?

오늘날 삶이 어떻게 규제되는지 이해하고 이 규제가 어떻게 자유로 체험되는지 알려면 인류의 공유재를 통제하는 민간기업과 비밀 국가기관의 음험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는 중국이 아니라 그와 같은 규제를 받아들이는 스스로에 충격을 받아야 한다. 그 와중에 우리는 스스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언론이 우리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반면 중국 사람들은 자신이 규제받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새로운 인지적-군사적 복합체의 가장 큰 업적은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억압이 더는 필요 없다는 점이다. 개인은 스스로 자기 삶의 자유롭고 자율적인 행위자라고 지속적으로 느낄 때 훨씬 더 잘 통제되며 바라던 방향에 '맞춰 들어'간다. 이러한 도착적 뒤틀림이 더 나아가면, 이제 통제와 검열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협적으로 가로막을 트라우마적 경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방식의 하나로 정당화될 수 있다. (p. 184) 우리는 최근에 발흥하고 있는 새로운 학문인 '행복학'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인생의 목표가 곧바로 행복으로 정의되는 때이자 정신화된 향락주의의 시대에 어째서 불안과 우울증은 폭발하고 있는 것인가? (p. 185)

우리는 통제받고 조종된다. 뿐만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은 심지어 속으로는 그리고 위선적이게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종받기를 요구한다. 진실과 행복은 함께 가지 않는다. 진실은 아프고, 불안을 가져오며, 우리 일상생활에 매끈한 흐름을 방해한다. 현실은 방향타 없는 공간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궁극적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행복하게 조종받길 원하는가, 아니면 진정한 창조성의 위험, 이 위험이 불러일으키는 지속적 불안에 자신을 과감히 드러낼 것인가? (p. 192)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을때 그런 현실에 의문을 던지기는 쉽지 않다. 저자의 말처럼 '진실과 행복은 함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안정된 불행과 행복한 불안 중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행복한 불안'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을까?

현재까지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었따. 물론 때때로 노골적인 독재로 기운 적도 있었지만, 일이십 년이 지난 후에는 민주주의가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다. 그래서 우리 미래의 모델을 중국식 자본주의적 사회주의로 삼게 될 가능성이 꽤 있다. 이는 우리가 꿈꾸어왔던 사회주의는 분명 아닐 것이다. (p. 220)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공식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믿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중략)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을 실질적으로 충실하게 따르지 못한다는 유감을 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이데올로기 자체에, 적어도 그 전통적 형태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p. 224)

트럼프는 기존 체제를 흔드는 불안정한 멍청이다. 그러나 자체로 그는 하나의 증상, 즉 기득권 체제 자체의 문제가 불거진 효과이다. 진짜 괴물은 트럼프의 행동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바로 그 기득권 체제이다. 트럼프의 행동에 대한 당혹한 반응은 그가 미국의 정치적 기성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손상하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p. 228)

정치적 올바름을 '문화적 마르크스주이'라고 지칭하는 일이 옳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통념과는 반대로, 정치적 올바름은 그 모든 사이비 급진성에도 마르크스주의 개념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자유주의의 최후 방어기제로서, '주요 모순'인 계급 투쟁을 혼탁하게 만들거나 추방해버린다. (p. 239)

저자는 전방위적으로 예민하게 날을 세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기득권 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와 좌파세력에 대해서도 무차별적 비판을 거듭한다.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고 잘못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런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려는 사람들은 찾기 쉽지 않다. 있다해도 소수정예로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천하대혼란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우리의 지배자(기술 관료들)를 신경질적으로 자극하는 와중에 있다. 이 자극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조치로 이어져야만 한다. 시스템에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고 시스템 자체의 '불가능한'변화를 요구하는 일, 그런 변화가 '불가능해'보이고 현 시스템의 좌표 내에서 생각하기 어렵지만, 이 변화는 분명 우리가 처한 생태주의적이고 사회적인 곤경이 요구하는 것이며 유일하게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p. 246)

저자의 급진적 보편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시민 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민으로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책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 역할을 하나의 국가에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모두가 이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시스템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런 세계시민.

사실 세계시민 이란 단어는 최근 읽었던 에픽테토스의 철학책에서 읽었던 건데 스토아 철학자의 이 단어가 현대의 급진적 사상가가 촉구하는 변화에 대한 핵심용어로 이렇게 적합하게 될 줄이야.

저자는 '생존이 걸린 항해에 우리는 이제 막 나섰다'며 자신의 급진적 날선 비판들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지적이었고 귀담아들을만한 통찰이었으나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로 인해 많은 부분을 덮고 지나칠 수밖에 없어서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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