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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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플로이드 과잉진압 사망사건 이후

불타오른 반인종주의 물결의 횃불이 된 책

유색인의 짐이자 그들 문화의 쟁점이던 인종주의 논의에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으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작

 

 

다양성, 다문화 이런 단어들이 활발하게 사용된지는 따져보니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 적응중인 이 단어들에 대해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하다고 쉽게 판단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식은 아직 다양성을 충분이 인지하지 못하고 다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함을 최근 읽은 사회관련 책들에서 기존의 안일함을 깨우치게 되곤 했다. 언론의 개소리에 대해서 한일관계의 쓴소리에 대해서 느낀바가 많았었는데 이번 책은 인종주의에 대한 편견 깨뜨리기다.

~의 라고 하면 소유격으로 이해된다. 백인의 취약성 이라고 하면 백인이 가지고 있는 약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취약성'은 좀 다르다. 원제도 그냥 WHITE FRAGILITY 백인취약성인데, 원제처럼 그냥 백인취약성 이라고 불러야 할 백인들이 주로 갖고 있는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취약하다라는 의미는 약함보다는 무지나 왜곡으로 인한 편견이나 고집에 좀더 가깝다고 보여지므로 소유격으로 이해하면 좀 곤란하지 싶다. '백인취약성'은 미국내 인종갈등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백인들의 특성이라서, 이 특성은 백인들의 약함이 아닌 강함을 강화시켜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앤젤로는 양심을 흔드는 외침으로 중요한 반인종주의 백인 사상가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녀가 같은 백인 형제와 자매의 양심을 흔든다는 것이다. WHITE FRAGILITY 은 진정으로 생산적인 개념이다. 우리로 하여금 백인이 그들 자신의 백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백인성이 아주 오랫동안 인종 탐지기에 걸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요구에 그들이 얼마나 방어적으로 반응하는지를 더 깊게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결정적인 개념이다. (p. 11)

디앤젤로는 백인의 정체성이 미국인의 정체성이 되어가는 흐름-인종주의적 신념이 국가적 신념이 되어가는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 미국인이라는 것이 곧 백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적어도 완전히 그런 의미는 아니고 주로 그런 의미인 것도 아니라며 목청껏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p. 12)

저자는 백인성 연구 및 다문화교육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는 학자이자 강사이다. 이 책은 인종주의 편견에 물들어있는 미국내 백인을 독자층으로 겨냥하고 쓴 책이라서 추천사를 쓴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여하튼 추천사에서 표현하듯이 미국인들이 외면해왔던 자신들의 치부를 끄집어내고 흔들어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책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당선 이후 영미권에서 나온 사회문제 관련 책들은 용감하다고 느껴질 만큼 직설적으로 읽힌다. 그들의 문제의식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려나 의구심이 들수도 있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면 우리의 현실과도 닿아있음이 절실히 느껴지기에 국내에서 잘 발견하기 힘든 이런 용감한 책들이 나는 늘 반갑곤 하다.

장벽에 부딪힌 집단을 거명하지 않는다면 이미 투표권을 가진 집단에게 유리할 뿐이다. 투표권을 통제하는 집단이 누리는 권리를 보편적인 권리로 가정하는 셈이다. 권리를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을 거명하는 행위는 불의에 도전하는 우리의 노력을 인도하는 지침이다. (p. 17)

나의 바람은 여러분이 스스로를 백인으로 의식하는 사람들이 인종을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그토록 어려워하는 이유에 대한 통찰 그리고/또는 일상 생활에서 요동치는 인종의 바다를 항해할 때 여러분 자신이 어떤 인종적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이다. (p. 21)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을때 여성들이 자신들도 동등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이라는 집단을 거명하고 나서야 남성지배집단은 투표권을 부여했다. 장벽에 부딪힌 집단이 있을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흑인과 인종주의 라는 단어를 미화하고 덮어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름짓고 직시하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저자의 말은 다른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듯 싶다. 따라서 저자가 알려주는 통찰을 위한 여정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소외집단에 대한 통찰을 시작하는것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인의 취약성을 촉발하는 것은 불편함과 불안이지만, 이것을 낳는 것은 백인이 우월하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식이다. 백인의 취약성은 그 자체로는 약점이 아니다. 실은 인종을 통제하고 백인의 이점을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p. 24) 유색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수많은 백인을 보면서 우리가 유색인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이로운 체제에 투자하는 우리의 모습도 보았다. 또 우리가 이 모든 점을 부인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이런 역학이 거명될 때면 얼마나 방어적으로 나오는지를 보았다. 요컨대 나는 우리의 방어적 태도가 어떻게 현재 인종 상황을 유지하는지를 보았다. (p. 27) 실제로 우리는 인종에 대해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려 시도할 때 걸핏하면 침묵, 방어적 태도, 논박, 확신과 같은 반발의 여러 형태로 백인의 취약성을 금세 드러내곤 한다. 이런 반발은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라 사회적 구속력이다. 이 사회적 구속력은 한층 생산적으로 관여하는 데 필요한 인종 지식을 얻지 못하게 막는 한편 인종 위계를 강력하게 유지하려는 기능을 한다. (p. 33) 인종주의의 구속력을 저지하는 것은 평생 지속해야 하는 일인데, 인종주의적 준거틀로 우리를 길들이려는 구속력이 항상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습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p 34)

저자는 사회학자로서 끊임없이 분석한다. 자신이 미국에서 백인으로 살아오면서 경험했고 자신에게도 강하게 존재했던 인종주의에 대해 되짚어보고 사람들에게 강의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반발과 수시로 논쟁하면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지치지 않는 열정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백인은 우리의 인종 프레임에 관해 숙고하기를 유독 힘들어하는데, 인종적 관점을 갖는 것은 곧 편향되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믿음은 우리의 편향을 보호할 뿐인데,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p. 38)

백인성은 근본적인 한 가지의 전제에 의존한다. 바로 백인은 인류의 기준 또는 표준이고 유색인은 그런 기준에서 벗어난다는 규정이다. 백인은 백인성을 인정하기 않거니와, 백인의 준거점을 보편적인 준거점으로 상정하고 누구에게나 강요한다. 백인은 누군가의 삶과 인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한 상태로서의 백인성에 관해 생각하기를 아주 힘들어한다. (p. 61)

보편적이라고 일반적이라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에 대한 숙고,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받고 생각하기를 권유받았을 때의 불편한 마음, 이런 마음들에 대해 우리도 종종 경험해오지 않았던가? 일단, 이 책의 주제인 백인성에 대해서만 국한시켜 보더라도 우리는 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인의 시각으로 외국인들을 판단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백인들이 보면 우리도 유색인인데!

인종적 예외 사례에 대한 서사는 백인의 제도적 통제력이 유지되는 동시에 개인주의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되고 있는 현실을 가린다. (p. 63) 이런 서사에 기대어 우리는 사회의 제도 안에서 이루어내는 우리의 성공을 자축하고, 성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집단들을 비난한다. (p. 65)

인종뿐만이 아니라 소외집단이 인정을 받았을 때는 대부분 개인적 능력으로 인정받게 마련이고 예외적인 성공담으로 회고되기 마련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을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했을때 뉴스화되고 특별한 경우로 회지되는 것 이것은 결국 그 특별한 경험의 사례자가 그동안 소외되어 왔다는 것에 대한 반증인 셈이다. 저자가 사례로 든 것처럼 백인 남성이 야구선수가 되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흑인 남성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면 뉴스거리가 된다. 나아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소외집단을 망각시키고 개인적 능력주의로 문제점을 환원시키고 축소시키게 된다. 소외되는 계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능력껏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을 감추어버리고 모른척해버리곤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에요 말하게 된다. 하지만 출발선이 달라도 너무 다름을 알아야 한다.

1963년 마틴 루서 킹 박사가 일자리와 자유를 위해 워싱턴으로 행진하던 중에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포함된 문장 - 언젠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문장-이 특히 백인 대중의 이목을 끌었는데, 킹의 표현이 인종 갈등 문제에 간단하고도 즉각적인 해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인종을 보지 않는 척하는 방법으로 인종주의를 끝내는 해법이었다. 그리아혀 '색맹'이 인종주의의 해결책으로 홍보되었고, 백인은 자신이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설령 보더라도 자신에게 인종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우기기에 이르렀다. 분명 시민권 운동은 인종주의를 끝내지 못했다. (p. 86, 87)

이런 방어적 태도는 인종차별은 고의로만 저자른다는, 그릇되지만 만연한 믿음에 뿌리박고 있다. 이렇게 내면화된 암묵적 편향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결국 회피적 인종주의에 이르게 된다. (p. 89)

인종색맹주의, 기막힌 표현이었다. 저자는 트럼프처럼 직접적으로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는 계층에게 이 책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쪽에게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나름 진보적이라 생각하고 인종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그런 것 같냐고 되묻고 있다. 저자의 질문에 no 라고 답했던 사람들일지라도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점점 마음이 불편해지다가 급기야 화를 낼지도 모른다. 뜨끔하고 찔리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인종 색맹이라는 이상에 더 헌신하면서 인종 문제를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로 남겨두고, 인종 간 불평등을 줄이는 조치에 반대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백인 밀레니얼 세대의 41퍼센트가 정부가 소수집단에 지나치에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48퍼센트가 백인에 대한 차별이 유색인에 대한 차별만큼이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p. 97)

지금의 미국내 혼란의 주된 갈등축은 백인노동자계급의 분노라고, 그동안의 역차별에 대한 저항이라고 표현되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반박한다. 그런 수치들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나 몰라서 당하는 것이 참 많은 세상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무엇보다도 어린 세대의 보수화가 세계적이구나 싶었다. 자신들의 피해가 누구로 인해 왜 생긴 것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할텐데...

백인 노동계급은 블루칼라 분야에서 언제나 꼭대기 위치(감독관, 노동조합 간부, 소방서장과 경찰서장)를 지켜왔다. 그리고 세계화와 노동자 권리 약화로 인해 백인 노동계급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백인 엘리트층은 백인의 취약성을 이용해 백인 노동계급의 분노를 유색인에게로 돌릴 수 있었다. 그 분노는 분명히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경제를 통제하여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소수(백인)에게 많은 부를 집중시키고 있는 주역은 백인 엘리트층이기 때문이다. (p. 117)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트럼프의 대선 슬로건)는 당시 백인 노동계급의 처지와 관련해 비난의 화살을 백인 엘리트층에게서 여러 유색인에게로 돌림으로써 백인을 겨냥한 인종적 조작의 효과를 대폭 높였다. (p. 118) 소수집단 우대 정책은 적격한 소수집단 지원자에게 백인 지원자와 동등한 구직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 정책은 융통성 있는 프로그램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할당 인원수나 요구조건은 없다. 더욱이 초기에 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소수집단 우대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백인 여성이다. (p. 165)

실체없는 분노였던 것이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아니 있긴 했었는지 확인한 바도 없으면서 역차별을 당했다고 분노한 셈이다. 상위1%의 부를 더욱 부풀려준 것도 모르고 하위계층이 자신들이 가져야 할 것을 빼앗아갔다고 오해한 것이다. 늘 그랬듯 다수가 소수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나 할까.

인종주의를 개별적·개인적·의도적·악의적 행위로 축소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은 백인이 자신의 행위를 인종주의로 인정할 가능성을 낮춘다. (p. 141)

인종주의처럼 민감한 무언가와 관련해 이것 아니면 저것 이분법으로 질문할 경우 우리는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주장은 대화에서 어떻게 기능합니까?'라고 묻는다. (p. 144)

우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실제로 자주 듣지만,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데 성공할 수는 없다. 인간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기를 원하지 않을 텐데, 사람마다 욕구가 다르고 우리와 맺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 유포되어 우리로 하여금 사람에 따라 불공평하게 대하도록 만드는 그릇된 정보다. (p. 147)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도 없다. 누구나 똑같이 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실은 반성할 여지를 닫아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p. 150)

저자는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역지사지'의 관점을 다양하게 알려준다. 인종주의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행위에 대해 인종주의적 견해인가 아닌가 따져보라는 질문이나, 인간은 애초에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할 수 없다라는 문장이 뒷통수를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게 하면서 시원스럽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흑인을 위험한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이 나라가 건국된 이래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실제로 오간 폭력의 방향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묘사는 흑인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을 유발하고 우리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게 하지만, 이 가운데 우리가 도덕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감정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백인의 집단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p. 164) 요컨대 백인 정체성은 특히 열등성을 흑인에게 투사하는 행위와 백인 집단이 보기에 이런 열등한 지위에 의해 정당화되는 억압 행위에 의존한다. (p. 171)

흑인이 노예로 아메리카에 발을 딛게 된 이후 폭력의 방향은 분명 백인이 흑인에게로 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흑인이라면 무조건 폭력적일거라는 편견이 압도적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흑인이 백인을 노예처럼 부려먹은 적은 단 한번도 없는데도. 이러한 프레임이 누구의 지위를 더 돈독하게 해주었던가 생각해보면 이 프레임이 왜 인종주의적인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문제는 당연시 되는 이러한 시각이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지 못해왔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백인의 취약성'은 아주 구체적인 백인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다. 백인의 취약성은 단순히 방어적 태도를 보이거나 우는 소리를 하는 정도를 훌쩍 넘어선다. 이것은 지배의 사회학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우월의식과 이 우월의식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법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과정의 결과다. 이 용어는 불만을 토로하는 집단이나 그 밖에 다른 까다로운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예컨대 '학생의 취약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p. 198)

다시 말해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약점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가 예를 든 것처럼 학생의 약함을 빗댄 '학생의 취약성' 으로 같은 취약성 이라는 용어를 쓸수는 없다.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지배도구이고 사회화 개념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을 흔들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인종적 사회화로 인해 각자의 의도나 자아상이 어떻든 간에 인종주의적 행위를 반복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인종주의가 드러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계속해서 자문하는 것이다. (p. 238)

나의 마지막 조언은 이렇다. "당신 스스로 주도해서 찾으세요" 백인성의 길들임-인종주의와 무관심하게 만들고 인종주의를 지지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는 길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인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훌륭한 조언이 너무나 많다. 그런 조언을 찾아라. 백인성의 무관심과 결별하고 당신이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것을 입증하라. (p. 247)

백인의 취약성에 집중하긴 했지만 크게 보면 '백인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들은 많았다. 유태인에 대한 박해나 흑인을 비하하면서 어떤 (백인대비 모자란)고유한 특성이 있는 것 같은 표현들이나 서양에 비해 동양이 미개하다는 식의 어떤 종족에 대한 편견들... 하지만 백인만이 지니고 있는 '백인성'에 대한 분석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특별하다. 비록 내가사는 나라가 비교적 동일한 인종들이 사는 곳이기에 미국처럼 흑백갈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배집단의 고유한 성질과 백인성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에 다양하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책이었다.

유색인이 보기에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인종주의에 도전하지 않도록 하는 인종적 악순환을 유지하는 기능을 해왔다. 결국 백인의 인종주의에 도전하지 않는 것은 곧 인종 질서와 그 질서 내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지탱하는 것이다. 현행 체재의 기본 설정은 인종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p. 262)

인종주의를 저지하려면 용기와 지향성이 필요하다. 저지한다는 것은 그 정의상 순종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우리의 학습이 끝났다고 우리 스스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p. 263)

끊임없이 질문하고 돌아보면서 바른 지향점을 찾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안주하고 싶고 모르는 척 하는 게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사회가 얼마나 살기 힘든 사회가 되버리곤 했는지 역사는 늘 교훈을 보여주곤 한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보다도 앞으로의 후대를 위해서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가야할 지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ps. 읽는 내내 '선량한 차별주의자' 라는 책이 자꾸 떠올랐다. 선량함과 차별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충격받으며 읽었던 책인데, 결국 차별과 맞닿아 있는 '백인의 취약성'을 읽으면서는 그저 고개끄덕이며 읽게 된 것을 보면 그 사이 차별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어느정도 진척되 온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물론, 차별의 대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런 주제의 책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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