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남기는 글쓰기 - 쐐기문자에서 컴퓨터 코드까지, 글쓰기의 진화
매슈 배틀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반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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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에서 스마트폰의 스크린까지,

글쓰기는 어떻게 우리의 정신과 함께 진화했는가

 

이 책의 원제는 PALIMPSEST : A History of the Written Word 로 글의 역사 혹은 문자의 역사라고 번역되는데 번역기에서 자동번역되지 않는 PALIMPSEST 는 따로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문서' 라고 나온다. 원래의 글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썼기 때문에 새로 쓴 글 아래 예전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 흔적,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핵심 단어 이다.

팰림프세스트는 고대에 이루어진 양피지의 재활용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원본 글이 삭제되거나 일부 지워진 자리 위에 새로운 글을 적어 넣은 표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의 경제를 향한 실용적인 찬사가 '팰림프세스트'가 가지는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확장된 용례'에 따르면 팰림프세스트는 '특히 예전 형태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한 채로 재사용되거나 변경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면과 엇비슷한 것'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 정의를 뒷받침하는 예문으로 토머스 드퀸시의 말을 실었다. "인간의 두뇌만큼이나 자연적이며 힘센 팰림스세스트가 또 어디 있겠는가?" (p. 12~13)

팰림프세스트가 책 내용의 전반을 아우르는 핵심단어라면 '들어가며' 에 나오는 문장인 '인간의 두뇌만큼이나 자연적이며 힘센 팰림프세스트가 또 어디 있겠는가' 는 이 책의 핵심주제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점토에 남았건 양피지에 남았건 종이에 남았건 스크린에 남았건 모든 글은 나름의 흔적을 남긴다. 이 모든 흔적은 결국 인간의 두뇌 아니 인간의 정신에 흔적을 남겼다. 저자는 이 흔적들을 찾아 고대부터 현재까지 관찰해보고자 한 듯 하다.

언어와는 달리,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광범위하면서도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글 읽기와도 달리, 우리는 글쓰기 없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수만 년 동안 글쓰기 없이 살아왔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글쓰기 없이 살고 있다. 언어와는 달리 글쓰기는 두뇌 속에 부재하면서도 외상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가 두뇌에 한번 자리를 잡고 나면 끄집어낼 수 없다. 우리가 글쓰기를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글쓰기도 우리를 필요로 한다. (p. 17)

생각해보니 그렇다. 말하지 않고는 못살지만 쓰지 않고도 살수는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기가 글쓰기보다는 먼저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랜세월 말하기로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사회는 별무리 없이 굴러왔을 것이다.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문자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다. 인간은 왜 글을 쓰게 되었을까...

중첩되는 형상들로 이루어진 글쓰기라는 뒤엉킨 타래에 대해 흔히 쓰이는 은유가 있다. 바로 팰림프세스트다. 기존에 쓰였던 텍스트의 잉크와 희미한 흔적은 새로운 텍스트 아래에 존재하며 지워진 것의 흔적을 보존한다. 이와 연관된 시 장르인, 시인이 앞서의 의견을 철회하면서도 완전히 말소할 수 없는 개영시처럼, 팰림프세스트는 진정한 삭제란 없음의 방증이다. 저자-지우는 자의 손아기를 빠져나가는 잔류 흔적이 언제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페이지 위의 글은 아무리 갓 쓰였다 해도 팰림프세스트다. (p. 18) 글쓰기의 팰림프세스트는 시간을 거슬러 가면 갈수록 동시에 새로운 형태를 향해 자신을 밀어붙일 것이다. 팰림프세스트는 오래된 흔적을 아무리 지우려 한들 반드시 그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p. 19)

입 밖으로 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으니 말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의 속담이나 숙어들이 많다. 말에는 흔적이 안 남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글은 다르다. 노트에 쓰던 컴퓨터에 쓰던 글은 썼던 것을 지울 수 있다. 깨끗이 지워도 흔적이 남는다는 의미는 물적흔적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글쓰기는 수단이 어떠하든 다 흔적이 남는다. 쓰기의 흔적에 대한 은유, 그것이 팰림프세스트 였다.

글자 자체도 새긴 글에서 시작된다. 글자(character)의 어원은 자국을 남기거나 새기는 도구를 뜻하는 그리스어(카락테르), 그리고 '새기다, 조각하다, 자르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카락테인 이다. 영어 character의 첫 용례는 글자 그 자체가 아니라 새겨진 모든 흔적과 기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까지 character는 알파벳의 글자들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20~21)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늘 흥미롭다. 어원의 역사는 문자의 발자취를 문자의 흔적을 거슬러올라가는 과정인 것 같다.

나는 인간의 경험에 글쓰기가 미치는 영향을 교권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신학적 주제에 있어 교회의 가르침이 가지는 권위를 일컫던 교권이라는 단어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상호 보완적인 지적 분야인 과학과 종교에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교권은 그리 오래된 교권도 아니고 음악이나 신학이 가진 덕망을 따라잡지도 못한다. 그러나 글쓰기의 교권은 역사적으로는 새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읽고 쓰는 사람들의 개별 정신과 집단의식 속에 촘촘하게 엮여 있다. 글쓰기는 무척이나 심도 깊고 밀접하게 읽고 쓰기의 정신을 재구성하기에 그것이 힘을 행사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것이 가진 인지적 카르스마, 팰림프세스트적인 장식무늬와 가혹한 규율에 힘입어 인간 정신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아마 무슨 도전이건 스스로의 교권을 확장시키는 기회로 바꾸는 문자의 교권에 필적할 만한 것은 음악과 종교뿐일 것이다. 글쓰기는 그 역사 내내 고대의 방식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매체와 양식으로 확장하며 혁신했다. (p. 30~31)

'교권'이라는 용어에 한자가 표기되있지 않아서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으나 가르친다는 것과 종교적인 힘 두 가지가 다 들어있는 개념으로 저자는 쓰고 있는 듯 하다. 글쓰기의 힘이라... 역사 속에서 문자는 늘 권력의 중심에 있긴 했었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는 특성, 가장 고도로 발달한 인류 문명의 바탕이 되는 특징은 한편으로는 인류에게는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기에 본능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이는 기억 그리고 기억을 향한 갈망, 즉 시간 속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식을 새겨놓고자 하는 조바심이다. 이는 바로 언어와 그 언어에 의미를 불어넣고자 하는 충동으로, 이 욕망은 대체로 구술발화라는 형태를 취한다.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름을 붙이고 묘사할 뿐 아니라 약속하고 맹세하고 거짓말하고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p. 36~37)

문자의 비밀은 무엇보다도 종합의 가능성 속에 숨겨져 있다. 문자와 숫자는 결국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인식, 즉 '은유'라고 불리는 기이한 습관은 끝없는 의미의 생성과 확장을 가능케 한다. 그럼에도 이 기호가 담기는 팔레트는 자연이 우리에게 물려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제한적인 동시에 특수한 감각의 스펙트럼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다. 인간의 문자는 인간의 특수성을 체현한다. (p. 39)

인간만의 특성은 유발하라리가 말했던 것처럼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은유도 상상력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던 글이던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행위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이다. 하지만 말과 글은 분명 다르다.

소크라테스와 글쓰기의 관계-그의 사상을 대필하고 설파한 시인 플라톤이 주장한 바대로라면-는 양가적이고 복잡하다.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인간성의 뿌리로 회귀하고자 하는 건강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파열이라고 보았다. 신화라는 구술 세계에서 발생한 문자에 대한 이 같은 회의주의는 이후로도 건재하다. (p. 56, 57)

고대 그리스의 예술적 문화는 글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힘을 가진 이는 공연자와 가수, 곧 필경사와 '저자'를 경쟁자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p. 155) 해블록은 그리스 문학의 아이러니를 언급한다. 음유시인들의 구술낭독을 대체하게 될 알파벳이 구술문화의 보존을 그 첫번째 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글쓰기의 교권은 왕의 행정적 필요성보다 음향의 미학과 대중 공연을 우위에 두는 '문자화된 구술성'이라는 역설적 형태를 띤다.(p. 156)

서양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문화에서 글의 도입과정이 독특했다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만큼 강압 없이 문자가 상륙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 고대그리스 시대에도 문자는 이미 있었다. 그리스문명 이전의 문명인 미케네 시대부터 문자는 있었다. 하지만 고대그리스 사회에서 문자를 쓰고 읽을 줄 안다는 것은 그닥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능력이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많았다. 글보다는 말. 고대그리스가 남긴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대부분 대화체로 쓰여있음을 알고있었음에도, 문자가 있었으되 권력에 이용되지 않는 시대였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온다.

글쓰기가 전설 속에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발명된 것이 아니라 진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개별적인 사건들, 일어난 일과 그 원인의 기록이라고 정의되는 역사는 진화의 현상들을 단속적으로 다룬다. 진화는 광범위한 것으로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일어나고, 한순간 인지할 수 있는 변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다. 그리고 진화라는 맹목적이고 인정사정없는 창조물 속에서 문화의 모든 아우성과 변덕이 일어나는 것이다. 글쓰기의 효과는 급진적이다. (p. 64)

인간의 본래적이며 원시적인 인지적 특성의 잔존에 초점을 두는 진화심리학자들은 두뇌가 읽기와 쓰기를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런 목적에 두뇌가 적응한 것은 우발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척추가 육지에서의 이족 보행을 위해 수직으로 세워진 몸통과 허리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는 것 역시 그 '원래의 목적'이 아닌 우발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애초에 읽고 쓸 운명이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p. 67)

흔적을 남기는 이들은 실용적인 정보 전달이나 능숙한 이야기 방식 이전에 놀이라는 한층 더 기본적인 충동을 공유했다. (p. 76)

글쓰기를 인간의 진화와 연관지어 생각하니 갑자기 생소하게 다가온다. 인류의 진화가 운명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유인원들 중에 직립보행을 할 인류가 나타날지 어떻게 누가 알았겠는가. 말과 글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변화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굉장히 급진적인 변화이긴 하다. 또한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한 상상력의 원동력은 놀이에서 비롯될 수 있었음에도 일면 수긍을 한다. 글쓰기가 생존과 직접적인 연결성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글쓰기의 뿌리를 찾으려 동굴과 모래더미와 비석조각들을 탐색했다는 저자도 결국은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자꾸만 과거와 현재를 묶어주는 쉬운 내러티브를 찾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볼수록 우리는 인간의 복잡성만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된다. (p. 80)

저자도 글쓰기의 뿌리를 찾는 복잡성에서 답을 찾지 못해서인지 조금은 구체적인 목표로 좁혀 보기도 한다.

문제는 어째서 문자가 생겨났는지, 또는 무수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문자가 생겨날 수 있었는지가 아니다. 문제는 어째서 그렇게 오래 걸렸나 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문자는 환상적인 가소성을 지닌 인간의 두뇌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전적으로 인간적일 필요는 없지만, 인간은 모든 면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쓰기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우리의 두뇌는 문화적 가능성을 계속 다양하게 표현함으로써 정신을 만든다. 문자를 이렇게 바라보면 글로 쓰인 표현이 증가하고 변이하는 것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기 쉽다. (p. 85~86)

문자가 왜 생겨났는지가 아니라 문자가 등장하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를 질문은 신선했다. 앞서 말했듯이 말의 역사는 길고 글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 하지만 글의 역사는 짧은 시간에 비해 다채로운 변화를 거듭해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를 기록하고, 실수로부터 배우며, 진보를 위한 지식을 나눈다는 공언된 목적 외에도 글은 "인간의 계몽보다는 인간의 착취를 용이하게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예술을 피워내고 동식물을 길들인 것을 비롯해 다양한 발전을 이룩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대였던 신석기혁명은 글의 도움 없이 추진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p. 133~134)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철학자다. 철학적으로 인류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구조라는 형식적 틀을 찾아내자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말과 글일 것이다. 인간만의 능력인 '상징성' 에 대한 그의 연구가 궁금하긴 하지만 철학까진 아이쿠;;; 그저 책속에 인용된 그의 문장들에 공감해보는 선에서;;;

인류의 탄생과 인류 문화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우리는 길가메시와 동시대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여전히 의외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p. 142)

길가메시의 시대부터 가장 강력하고도 널리 퍼진 언어는 확산되어 정복자와 피정복자 모두의 의식에 뿌리내린 구술언어였다. 이 경우 글쓰기의 교권은 순수하고 단순한 권력의 응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의 권력은 언어를 탄생시킨 왕국이 몰락한 뒤에도 살아남는다. (p. 148)

읽은 적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 가 인용되니 반갑다. 5천년 전에 쓰여진 그 이야기 수준에서 지금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5천년 후의 우리가 여진히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문자의 힘이기도 하지만 결국 권력문제 인 것 같기도 하다. 소멸되지 않고 남아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결국 권력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중세 유럽의 문학적 실천에서 부인할 수 없는 지배적 형태였던 베끼기라는 행위에 쏟았던 관심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필사 문헌에는 오류가 아주 많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오류투성이 결과물이 근대 학문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이 오류가 종종 필사본의 계보를 측정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p. 161)

글쓰기는 언제나 팰림프세스트다. 글로 쓰이는 것 중 이미 존재하는 것의 사이에, 또는 그 위에 쓰이지 않은 것은 없다. (p. 187)

오류도 차근차근 쌓이면 기록이 된다. 오류의 흔적도 역시나 언제나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팰림프세스트다.

고대의 시인들과 신들은 무척이나 다른 존재였지만 그들이 독자이자 필자로서 하던 행위에는 같은 습관과 규범이 있다. 카툴루스에게 모든 오래된 책은 읽기뿐 아니라 쓰기의 기회였다. 베끼기, 주석달기, 논평하기, 편지쓰기 말이다. 마리트알리스에게도 바울에게도 글쓰기는 책뿐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수단이었고 시인과 철학자, 필경사로 이루어진 드넓은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사회적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렇게 책들은 쓰기와 읽기, 호의의 주고받기, 공유하는 생각, 사상과 신앙을 함께하는 집단들의 사회적 연결망이 되었다. (p. 231)

기독교의 전파에 글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말과 말로서만 공동체가 엮였다면 사회의 성장은 더뎠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양적 증가에서 글이 발휘한 힘은 교권을 넘어 연결망이 되었다. 어쩌면 권력이 아래로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출판과 관련해서 '불법복제'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가 타인의 저작을 권한 없이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 행정당국이 발행한, 이 기술을 사용하고 공유할 권한을 부여하는 면허 없이 인쇄기를 사용하는 행위를 가리켰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빈틈없는 보호를 받은 것은 작품이 아니라 생산수단이었던 것이다. (p. 268)

글을 복제하는 수단을 억압하면 허위와 오류를 일삼는 자들뿐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자들 역시 악영향을 입는다는 주장이었다. (p. 271)

글의 위치를 추척해오는 과정은 결국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오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 과정을 촘촘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읽을수록 정리가 되지 않는 이 기분을 어찌해야 할꼬;;;

어쩌면 페이스북이 핵심을 찌른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아를 글로 쓰는 것에 대해선 책보다 담벼락이 더 적합한 은유일 테니까. 전자 텍스트를 책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추는 대신 우리는 벽과 로켓과 인방을 찾는다. 디지털 세계에서 이는 블로그와 피드, 모바일 디바이스,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터치스크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p. 281)

우리는 깊이 읽기가 사라질까 두려워하기보다는 읽기가 그렇게 깊은 곳까지 도달했음에 먼저 경이를 느껴야 한다. (p. 302)

글쓰기가 질서 짓고 비교하고 분류하고자 하는 우리의 충동을 만든 것은 아니다. 글쓰기는 우리의 그러한 경향 위에 만들어져서 그것들이 꽃피도록 했을 뿐이다. (p. 304) 글은 문명의 시녀이고 강자의 도구다. 그러나 글이 문학을 위해 열어준 공간 속에서 글은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며 우리의 존엄을 지켜준다. (p. 310) 단 한가지만은 믿어도 되리라. 그 편재성과 지속성 덕분에, 확산되는 생명력 덕분에, 자기 자신을 기록하고 연결하고 세계의 날실 속에 짜 넣고자 하는 충동 덕분에, 우리의 글은 우리들보다 오래 살아남으리는 것이다. (p. 321)

과거에 비해 글은 더이상 권력의 도구는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문화의 도구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문화로 봤을때도 고정적인 형식을 지키는 것에서 자유분방한 표현의 도구로 변화해왔다. 종이에 쓰던 것을 가상의 공간에 쓴다고 해서 쓰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새로운 공간에 남긴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의 발자취로 우리보다 더 오래 우리를 쫓아다닐 것이라는 점은 알겠는데 그래서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독자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었단 말인가;;;

내가 드퀸시의 질문으로 만든 팰림프세스트는 그 용어를 뒤집는다. 정신을 페이지로 보는 은유에서, 어쩌면 내 눈에는 12포인트 조지아체로 쓰인 이 페이지가 일종의 정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말이다. (p. 330) 이 새로운 종류의 페이지는 정신, 페이지로서의 정신을 뒤집으려는 정신일까? 나는 결론이 그렇게 간단하고 생각지는 않는다. 글이 쓰이는 표면은 변화했지만 결국 우리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성격을 정하는 것은 우리 독자, 사상가, 작가 모두가 맺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과 페이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글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우리가 맺는 관계다. (p.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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