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성찰하다 - 중산층 붕괴,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유럽중심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
다니엘 코엔 지음, 김진식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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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으로 세상을 바꿨다고 믿었던 우리는 이제 다시

세상은 변했다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를 옥죄고 있는 환상들에서 벗어나!

표지 中

저자는 오늘날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경제학 교수라고 한다. 사회를 통찰하는 지성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인지 저자는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려주고자 한다. 저자는 현대를 68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던 구분법이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주장하며, 68혁명 직후의 시대와 5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대가 얼마나 판이하게 달라졌는지를 저자 나름대로 철학적·경제학적 고찰을 펼쳐내고 있다.

68혁명의 청년들은 그들의 부모가 소비사회의 지겨운 안락함에 빠져 역사의 비극을 망각했다며 비난했고, 오늘날의 청년들은 연장자들을 향해 정반대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부모 세대의 과소비 결과로 자신들은 물질적 안정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68혁명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저주받는 원인은 바로 68혁명이라고 비난한다. 절대적 자유를 주장한 68혁명이 개인주의를 만연시킨 결과 자유주의 경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p. 19)

68혁명의 시민들은 무엇을 탐하고 나선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산업사회의 붕괴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이 사회의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의미 소멸로 잠식된 전대미문의 시대가 열리는 중이었는데, 이런 의미 소멸 때문에 이 시대가 펼쳐지는 데 50년이 걸렸다. (p. 25)

68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는지 본문의 글줄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지금 청년세대가 68혁명이라는 단어를 과연 알까? 저자가 속해있는 프랑스 사회에서는 청년세대에게도 익숙한 단어이려나?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기에 68혁명에 대한 이해는 독자의 몫이다.

단 하나의 진영으로 돼 있지 않던 68년 5월 혁명은 '최소한' 두 가지 감수성으로 나뉘어 있었다. 뤼크 볼탕스키와 에브 쉬아펠로가 제안한 분류를 따라서 우리는 이 혁명에서 '예술가적 비판'과 '사회학자적 비판'을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적 비판은 소비사회를 고발하고 사회학자적 비판은 생산 영역을 고발하고 있다. 예술가적 비판은 부르주아 사회의 특히 성적인 것에 대한 위선적 관습에 저항하고 있고, 사회학자적 비판은 작업 현장의 상황과 노동자 착취를 고발하고 있다. (p. 36)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산업사회로 인한 비인간화가 노동자의 빈곤화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테일러주의 같은 산업사회의 표준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예술가적 비판과 사회학자적 비판은 일치했다. (p. 39)

유럽이 68혁명의 들불에 휩싸이던 시기에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산업을 일으키며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시절이었다. 68혁명의 바람은 커녕 혁명의 ㅎ 자만 말해도 빨갱이로 잡혀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이후 민주화과정도 유럽의 68혁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니 연결지어야 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유럽이 50년간 겪어온 격변은 우리나라에서 몇년만에 스윽 지나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새로운 시대가 올것이라 꿈꾸었으나 그러한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하다.

고르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은 다른 합리적인 대안의 발전을 준비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진정한' 욕망에 대해 숙고하거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논의하면서 더 나은 삶의 선택지를 찾아보려는 능력 자체를 단념했다. 고르스는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 시스템은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각 개인의 삶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최소화하고 자율적인 활동은 최대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혁명을 기다리지 않고 진정한 사회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이 느꼈던 환멸은 스스로의 꿈을 실현하려고 공장으로 들어갔던 학생들이 느꼈던 환멸보다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p. 56)

산업혁명이후 발달해오던 사회에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지나치게 개인이 부품화된 것에 반기를 일으켰던 사람들은 자유를 주창했다. 공동체의 위기는 지금도 여전히 위기이고 그렇게 얻은 자유는 개인을 더 개인화시켜버렸다. 68혁명 세대가 원했던 자유는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획득되었던가? 지금 세대는 정말 자유를 얻은 세대라고 볼 수 있을까? 자유와 무책임은 분명 다른 의미인데 말이다.

레이건의 강점은 하나의 정책으로 월가의 엘리트와 백인 서민층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에 반대하는 레이건은, 빈곤층이 빈곤한 원인은 빈곤층에 대한 원조때문이라며 비난한다. '가난한 사람'은 '곧 '흑인'을 의미한다는 것을 미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p. 77)

정반대되는 생각들이 유행한 1960년대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대에 전혀 다른 보수 사상이 되살아난 것은 보수주의자들로서도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의 흐름이 이처럼 진동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p. 83)

높은 경제성장기에 해방의 욕구가 표현되던 1960년대의 정신적 분위기와, 불경기에 전통과 기존 질서에 대한 보호 요구가 나타나던 1980년대의 정신적 분위기를 구분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성장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현재 작동되고 있는 주기는 아주 손상된 주기다. 좌우를 움직이던 진자가 지금은 오른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져 있다. (p. 87)

유럽과 북미는 대서양으로 갈라진 서로다른 대륙이 아니라 그냥 한 덩어리로 보는 것이 맞을 만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럽 이야기를 하려면 미국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고 따라서 미국 정치권의 변동에 유럽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레이건의 정책과 현재의 트럼프가 너무도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따지고보면 혁명은 항상 반혁명세력에 의해 안정되곤 했다. 왕정을 몰아낸 시민군은 다시 왕을 옹립했고 독재를 몰아낸 시민 세력은 투표로 다시 독재자에게 대통령자리를 선사했다. 역사는 왼쪽을 많이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늘상 주류는 오른쪽이었다. 혁명이 있었다고 말하기 무색할만큼 시대는 점점 더 우편향 되고 있다. 왜일까.

유럽 포퓰리즘은 그들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두 계층, 즉 위로는 사회 엘리트와 아래로는 이민자 집단에 대한 증오를 응집시킨다. (p. 106)

2016년은 지금도 극심해지고 있는 포퓰리즘의 최고 절정기였다. 2016년은 영국의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처럼 정치계에도 포퓰리즘이 침투했음을 말해준다. 브렉시트에 대한 설문조사는 유럽을 벗어나는 데 찬성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페미니즘, 다문화주이, 생태학'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와 '인터넷'이라는 단어도 싫어했다. (p. 109) 포퓰리즘 부상이 빚은 두 번째로 끔찍한 사건은 2016년 10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 3분의 2가 트럼프를 지지한 '작은 백인들'(미국 어휘집에 따르면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도 똑같은 원한을 드러냈다. (p. 110)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사회적인 존중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유권자들의 욕구의 발로였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무엇이 될 수 있거나 되어야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기를 그들은 원했던 것이다. (p. 115)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삶과 더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말해주고 알려주는 변화에 호불호를 표현하지 않던 사람들이 지금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드러내며 인정을 원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거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옳건 그르건 다 필요없다고 그냥 자신들의 모습 그대로 살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세상이 어떻건저떻건 그냥 살던대로 살고 싶다고 변화따위 싫다고.

"개인은 진정으로 그 자신이 아니다. 개인은 사회와 연결될 때에만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실현한다. 개인이 삶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원천인 인정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강한 사회적 결속력이 형성된다" 오늘날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경제 불안은 사회 결속력 해체의 중요한 원인이다. "소득의 불안정성이 사회 통합 위기의 핵심요인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가족 간이나 친구 사이나 다른 모든 사회적 관계가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p. 126)

불평등은 늘 문제였다. 문제거리가 안될 수가 없는 문제다. 먹고살기 힘들면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된다. 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된다. 이때 정치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불만을 한데 모을 수 있는 대상이다. 그 불만이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희생양이 필요하다. 그렇게 불평등은 숨겨진채 더더더 심화된다.

이민자들을 공격할 때, 포퓰리스트들은 혐오의 실제 대상을 가린다.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자국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응집력이 붕괴된 사회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거울을 내민 것이 그들의 실수다. 이민자는 그저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르네 지라르가 말했듯이 위기에 처한 사회의 희생양인 이민자는 오늘날 폭력을 한 몸에 받는 동네북이 되어 있다. (p. 135)

유럽과 미국사회에서 이민자 문제는 가장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분야이다. 이민에 대해 한발짝 떨어져있는 편인 동양의 경우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성이 아직은 없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서구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어느 한쪽에 쏠리기 보다는 양쪽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우리사회가 될수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여하튼 저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미래를 위해서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야 하겠는가? 일단 적응해야 할 것이 디지털 세상이다.

컴퓨터는 규모의 혜택을 받지 않는 모든 거래 유형도 온라인으로 구조 조정하도록 해준다. 여기서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시키는 경향도 생겨났다. 소비자는 물건도 자신이 직접 수리해야 하고 영화관 입장권도 온라인으로 직접 예약하게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혼자서 스스로를 돌봐야 할지도 모른다. 임금노동자가 하던 일을 오늘날의 소프트웨어는 소비자가 직접 수행하게 한다! (p. 180)

일자리 양극화에 큰 관심을 기울인 미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오토에 따르면, 과거의 논쟁은 항상 인간과 기계 사이의 완벽한 대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의 보완은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규칙적인 것에 더 가까웠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p. 186)

온라인으로 이런저런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그저 편리하다고만 생각했었다. 뉴스에서 보던 사라지는 직업들과 그러한 서비스들을 직접적으로 연결짓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대는 벌써 어느새 그렇게 이미 변했다. 변해버렸다. 그리고 학자들은 인간의 직업이 기계들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고 늘상 얘기한다. 그런데 왜 체감되지 않는 것일까...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이겠지만...

아이폰 세대와 정치의 관계는 이상하다. 무관심과 극단적 참여라는 정치적 양극화를 오가는 것 같다. 소셜 네트워크는 어떤 사람의 사진을 수백만 번이나 돌아다니게 하고 또 날카로운 증오의 표현도 너무나 쉽게 전파시키고 있다. (p. 198) 소셜 네트워크 세상에서 태어난 신세대의 역설은 인간이 이만큼 스스로를 많이 드러낸 적도 없지만 이만큼 가면을 사용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p. 207) 우리는 사회적으로 디지털 사회의 명분이 되는 가치를 단념하지 않은 채, 고립된 개인에게 사회적인 공간과 풍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디지털 사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까? (p. 226)

68혁명에서 시작하여 굵직한 텀으로 정치경제사를 훑으면서 신세대들의 문화로 넘어오긴 했는데 저자또한 핵심적인 질문에 답을 구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포퓰리즘과 극우주의 등 극단적 문화 속에서 어떻게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팬데믹과 포스트휴먼의 혼동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휴머니즘을 찾아낼 것인가> 라는 표지의 문구에서 던지 질문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았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책임에 상응하는 통합적이고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 기술과 기술에 들어 있는 권력 네트워크가가 아무런 중재도 없이 우리 삶의 형태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기술과 시장의 연결을 통합하는 동시에 기술 외부에 자신을 배치할 줄 아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점점 더 필요한데, 이 균형점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선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을 공들여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다음 반세기 동안 우리가 행해야 할 멋진 과업일 것이다. (p. 226)

유럽을 성찰한다기보다는 프랑스사회를 성찰한 저자의 책은 우리 사회에 어떤 지향점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새로운 휴머니즘이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멋진 과업으로 받아안기에는 사회적 역량도 나의 역량도 터무니없이 모자라게 느껴지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다만, 불만감이 작용하여 하는 선택과 만족감이 작용하여 하는 선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점은 인상깊게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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