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 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이승욱 외 옮김 / 반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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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육아, 교육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이유

 탈권위 바람과 권위에 대한 맹목적 향수가 공존하는 시대,

 정신분석학의 대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권위'라는 해법!

 

 

전부터 느껴왔던 것이, 어느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어른'은 없고 '꼰대'만 넘쳐나고 있는것같다는 점이다. 진정한 사회의 어른은 왜 없어졌는가 라는 질문만 가져왔던 내게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라는 제목은 새로운 해답처럼 다가왔다. 어른이 되지 못하니 어른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왜 우리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간단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위는 없어지고 권력만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권위' 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전에 권위와 권력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권위는 권력의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 원하는 행동을 강요하려면 권위에 권력이 필요하다. 이때 말하는 권력이란 정당한 권력을 의미한다. 반면 권력은 권위가 없어도 홀로 기능한다. (p. 23)

뒤에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만 정리하면 권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권력은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한 집안의 가장에게 권위가 아니라 권력만 있다고 말하는 경우 가족들은 가장을 존경하지 않고 가장이 휘두르는 권력을 폭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다. 권위있는 가장에겐 가족들이 자발적으로 가장의 뜻을 존중하기때문에 가장이 권력을 내세울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부모 역할에 얼마나 성공했는가는 자녀가 부모를 떠나는 능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잘 양육되었는가는 부재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p. 30)

요즘 부모들이 자녀에게 미치는 통제력은 당연시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자기주관이 뚜렷하고 거칠다는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자녀의 뚜렷한 자기주관은, 권위자로서 부모 역할을 확실히 이행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부모의 두려움은 분명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잘못이해된 교육방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우리는 요즘 아이들도 여전히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것, 부모는 자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아이에게 얼마든지 발언권을 주되 최종 결정은 언제나 부모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아이 양육 과정에서 권위를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p. 33)

정상적인 양육 과정에서 부모는 확실한 권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어린자녀가 '다수'로 자라날 때까지 서서히 독립심을 키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이 순서를 인위적으로 뒤바꾸려고 한다. 젖먹이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초등학교는 최소한의 규칙들로 아이들을 관리한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썽을 일으키면 '협상'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협상'하기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처참한 실패를 낳을 것이 뻔하다.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이러니 학교가 애를 먹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즘 부모들은 학교가 아이들에게 권위를 가르쳐주길 원한다. 반면 학교는 부모가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을 떠넘긴다고 불만을 터트린다. (p. 34)

초반부터 시원스럽다. 솔직히 조금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친구는 밖에 나가면 마음껏 사귈 수 있다. 하지만 부모는 밖에서 만들 수 없는 존재다. 부모는 오직 부모만이 해줄 수 있는 책임과 역할이 있다. 친구같은 부모보다는 존경할 수 부모가 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존경할 수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인정받는 존재여야 한다. 자녀에게 권위를 인정받는 부모는 자녀를 제대로 독립시킬 수 있다. 그렇게 부모라는 어른의 모습을 보고자란 자녀만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다. 온통 친구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아이상태에 머물뿐 어른이 될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닐까? 이렇게 자란 아이는 권위를 모른채 결국 권력을 휘두르거나 권력에 휘둘리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권위에 뭔가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는 것. 우리는 사회로서, 또 개개인으로서 바로 이러한 어려움에 마주쳤다. 사람들은 더티해리, 로보캅, 간달프를 합쳐놓은 강력한 권위자가 돌아와 우리 모두에게 제자리에 있을 것을 명령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실패할 것이다. 진짜 해결책을 원한다면, 우선 문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p. 41, 42)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권위' 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권위의 원천이 개인의 외부에 있다는 것은 권위와 권력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권력은 양변적 구조를 지니고 있어 두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따라서 권력은 언제나 유예된 폭력이다. 반면 권위는 삼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타인에게 권위를 행사할 때, 그 권위는 제3의 요소, 즉 모두가 공통으로 믿는 외부의 원천에 근거하고 있다. 권위에 대한 다소간 자발적인 복종은 바로 이 외부의 원천에 의지한다. 권위는 언제나 내적 강박과 관련 있는 것이다. 권위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p. 47)

권위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 누구에게 권위를 인정받게 되는지 깨달아야 한다. 권위는 단기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얻고자 마음먹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에 당연하게 인정되어 왔던 것 같은 권위는 권위가 아니었음을 저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면서 증명해낸다.

원초적 아버지에 대한 사이비 생물학적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설득력을 지닌다. 어떤 이들은 프로이트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놀랍게도 그는 권위의 근거가 아버지에게 맞서는 최초의 폭력 행위에 있다고 보았다. 법의 정립 또한 최초의 폭력 행위를 뒤따른다. 후기 저서에서 프로이트는 이 혹력 행위 안에서 유일신 종교의 기원을 발견한다. 유일신 종교는 거의 대부분 가부장적이다. 프로이트는 이 종교들의 기원에서 자신이 '가족 로맨스'에서 설명한 것과 비슷한 과정을 발견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가장 높은 자리로 격상하고 그런 다음에 그 환상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이다. 아들 예수가 자신을 희생해 자신의 아버지를 섬기는 종교를 발흥하고 확립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발전 경로는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자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잘못된 추론에 근거하고 있다. 프로이트도 자기 주장 속 순환 논리의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한다. 모든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부류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권위를 얻으며 그 원천은 한 명의 원초적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원초적 아버지의 권위는 그가 죽은 후에야 아들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p. 55 ~ 57 발췌)

우리는 그동안 '권위' 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 뿐만 아니라 사회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서구 사회에서는 서로 밀접히 연결된 권위의 원천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리스 고전 철학(플라톤), 고대 로마 그리고 기독교가 그것이다. 플라톤은 이성과 영원한 진리를 의미한다. 로마는 전통과 조상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양상을 합친 것에대 두려움이라는 요소를 넉넉하게 가미한다. 권위가 작동하는 방법은 아마 전 세계적으로 똑같을 것이다. 반면, 권위의 원천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아렌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권위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권위는 특정 시대의 맥락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 권위를 지탱하는 기반이 신뢰를 잃으면 권위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p. 72 ~ 73)

권위는 최초의 폭력을 배경으로 하며 신비로운 근거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에 기반을 둔다. 언제나 사후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에, 권위는 그 존재에 대한 실질적 근거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 근거를 따지기 시작하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p. 78)

우리는 권위에 대해 별 생각없이 인정해주어 왔다가 뒤늦게 그 기반을 파고들어가 생각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니 그나마의 전통적 권위도 없어진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권위가 없어진 시대는 어른이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한 시대의 종말을 겪고 있다. 약 1만년 동안 성, 사회, 종교, 정치, 경제 등 우리 인생의 모든 분야를 좌우했던 가부장적 권위가 사라지고 있다" (p. 80) 고. 하지만 이 사라지고 있는 권위가 진정한 권위였으니 다시 되돌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어떤 형태의 권위를 새로 형성해야 하는가"(p. 81) 라고 말한다. 지금 이시대의 우리에겐 모두에게 합의되는 새로운 '권위' 가 필요하다. 이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다양한 측면에서 지금의 사회를 진단한다.

정당화되지 않은 우월감은 서양 가부장제의 역사를 관통해왔다. 권력을 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지도 않았고 사람들로부터 권한을 넘겨받지도 않았으면서 특정 사람들을 대신해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 두 가지 특성이 가부장제의 전형을 이룬다. 이러한 온정주의 특징이 천박하게 드러난 사례는 수백 년 동안 서구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장받았던 식민주의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p. 98)

깨어 있는 독재는 환상일 뿐이고, 지각력이 결여된 로맨스는 파시즘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다. 이런 환상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신경증적 가족 로맨스', 다시 말해 '엄격하지만 공정한' 아버지에 대한 열망과 관련 있다. 정치체제는 이 열망을 몇 년이고 이용해왔다. 정부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한 가정의 좋은 아버지로 내비치며 유권자들을 힘없는 어린아이의 상태로 만들었다. (p. 100)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사례들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권위를 인정해주었던 이들은 사실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도 정치가들 중에서는 스스로가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인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국민이 뽑아준 정치가이건만 국민을 아이달래듯 다루려 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심리치료사는 신경증적 문제를 극복하도록 내담자를 도울 수 있지만, 그가 일상에서 겪는 불행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겪는 문제의 원인은 갈수록 사회적인 것들로 바뀌고 있다. 과거 심리치료사의 목적은 내담자를 돕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내담자를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이 암묵적인 과업이 되었다. 정부 입장에서 심리치료는 새로운 훈육 도구이다. (p. 109, 110)

신체적 질병 못지 않게 마음의 병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기에 그러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마음의 병이 더이상 미친정신병자가 아니라 신체적 질병처럼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체적이건 심리적이건 병의 치료 배경에는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정치적 목적이 숨어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빠른 치료는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개인적 원인인식에 머물게 한다는 것도... 한 마리의 여왕개미에게는 수많은 일개미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권위는 자발적 복종을 만들어내는 내면화된 규범에 의해 작동한다. 어떤 집단이 같은 권위를 따른다는 것은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이 권위가 무너지면 전반적인 불신이 생기고 규제 조치가 자기 증식하는 바이러스처럼 퍼진다. 권력은 외부적 통제와 강압에 의해 작동하지만 반드시 저항과 반란을 일으킨다. 권력과의 충돌은 이어질 충돌의 발판이 되어 악순환을 낳는다. 완벽한 통제를 목표로 하는 통제 매커니즘과 강압적 조치가 사회에 만연해진다. 하지만 결과는 완벽한 통제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다가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p. 134~135)

권위인줄 알았더니 권력이었음을 깨닫고 일개미들이 여왕개미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 사회는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고 여왕개미의 권위를 다시 세울 것인가? 아니다. 저자는 공동체의 권위를 제안한다. "문제는 이 집단을 어떻게 인식되는 권위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p. 141) 이 권위는 그동안의 피라미드식 권력형이 아닌 '수평적 권위' 이다.

지난 두 세대 동안 '대중'은 어느 때보다도 높은 지식 수준을 갖췄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결과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가부장제가 그 자신의 더 나은 버전으로서 '대중의 향상'을 위한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더 쉽게 교육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조국의 아버지들은 자기 아들들을 놓아주지는 못했다. 지식에 기반을 둔 권위가 가장 낫다는 것은 자명하며 이 사실은 수평적으로 조직된 권위에도 해당한다. 객관적 지식은 그 자체로는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결정하려면 도덕적인 선택들을 내려야 한다. 집단은 완벽하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장기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정치와 경제 부문에서 그에 관한 설득력 있는 여러 사례가 나왔다. 이 새로운 형태의 정부로 전환하는 데 있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고착화된 행동 패턴을 깰 수 없는 무력함이다. (p. 150)

예나 지금이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도 교육이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제라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의 층위에서 수평적 권위를 세우려면 최소 세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첫째, 지식이 충분히 모두에게 보급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도덕적 목표는 수평적 집단이 결정해야 한다. 셋째, 그 집단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조합은, 수평적 집단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장기적 목표를 유념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습득할 수 있고, 그 목표를 위해 어떤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거나 위임하는 형태여야 할 것이다. (p. 154)

수평적 체계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이의 참여를 끌어내 조직을 돕는 것이다. 이때 지도자는 '평등한 사람 중 맨 앞에 있는 자' 가 된다. 협동에 중점을 둘때 지도자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서 차이를 중재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각자 해결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권위는 어떤 사람이 계층구조에서 차지한 자리로부터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올바르게 대변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서 나온다. 권위는 공동 목표를 위해서라면 여러 명이 나눠 가지거나 서로에게 양도할 수 있다. (p. 156) 이 모델에서 타인은 적이 아니다. 이들은 당신이나 나와 매우 비슷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p. 157)

모두가 사회에 관심을 갖고 의견을 갖고 참여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개인화된 시대에 필요한 것은 결국 공동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 보면 맞는 말 같기는 한데 현실성이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이론이 필요한 좀더 강력한 사회적 문제들을 제시하고 다양한 실례들도 제시한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가부장제가 쇠퇴하는 중이고 성적 지향이 (이분법이 아닌) 스펙트럼(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으로 존재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음에서 희망을 찾고, 양육 문제에서는 집단으로서의 부모역할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개인적으로 교육관련 입장에서 저자의 표현들에 깊이 공감하곤 했는데, 아이의 자율권을 존중해준다는 미명아래 결국 방임하고, 동기부여와 칭찬육아라는 것이 얼마나 빛좋은개살구인지 지적하고, 요즘처럼 정신장애를 진단받은 아이가 많았던 때는 없었다며 아이의 심리에 대한 무책임을 비판하고, '부드러운' 양육법을 택한 친구같은 부모형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장' 이 성장이 아니었음을 밝히며 앞으로는 '공유와 협동' 모델이 중요해질 것임을 강조하고 이 모든 사회체제의 기본 바탕인 민주주의가 완성형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기성 정치의 몰락에는 위험한 부작용이 따른다. 많은 사람이 기성 정치의 몰락을 민주주의의 몰락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형태의 정권을 모색하는 타당한 이유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시효가 다 되었고, 특히 더는 민주적이지 않게 되어 그 효력을 잃은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출발한 다른 형태의 정부에 대한 추구는 전체주의 정권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즉, 권위가 아니라 권력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p. 271)

민주화는 언제나 진행중에 있다. 다만 우리는 민주화의 최종 목표를 늘 명심해야 한다. 최종 목표는 데모스, 즉 민중의 자치다. (p. 278)

경제가 흔들리고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실망이 쌓이면서 강력한 보수주의 리더들에게 현혹되고 있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요즘에 꼭 생각해보아야 할 문장이 아닐까 싶다.

내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이제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로서의 공동체가 그 권위를 쌓아야 한다는 것. 여기서 핵심 질문은, 이 새로운 권위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의 다음 단계로서 어떤 형태를 갖춰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p. 287)

내가 더 선호하는 것은 숙의적 투표 방식이다. 숙의 민주주의는 선거 대신에, 투명한 기준을 적용한 계산법에 근거한 비례대표제를 원칙으로 삼는다. 그 목적은 사회를 최대한 정확하게 반영하는 대표 단체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의 다양성이 단체를 구성하는 기준을 결정한다. 사회외 동일한 비율로 대표의 성별, 인종, 연령대, 교육 수준, 그 밖의 중요한 사항들을 고려한다. (p. 294)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는 어찌보면 우리는 왜 시민이 되지 못했는가 로 바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너무 관람객처럼 사회를 멀리 떨어져 보아 온 것이 아닐지... 지식기반이 아니라 이런저런 소문에 휩쓸려 온 것은 아닌지... 역사적으로 그동안은 거의 늘 사회구조가 피라미드 식이었다. 왕에서 대통령으로 귀족에서 의회로 모습은 바뀌었어도 상위 몇 퍼센트에 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배·관리되어 왔다. 하지만 다행히 그러는 사이에도 그런 권력이 조금씩조금씩은 아래로아래로 옮겨져왔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이제 그런 수직적 권력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권위를 나눠갖는 시대로 탈바꿈해야 할 때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권력을 쥐여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권위를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 아닐까. 그동안은 권력과 권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꼰대와 어른을 착각했다면 앞으로는 정말 우리 모두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권력을 휘두르는 꼰대가 아니라 권위를 인정받는 어른이.

우리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두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들을 관찰하는 연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친사회적인 행동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면 반사회적인 행동은 학습을 통해 발현된다. 가령 어린아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알아서 돕는다. 그런데 이런 행동에 보상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보상이 걸려 있을 때에만 다른 사람을 돕는다. 이와 같은 결과는 사회와 그것의 권위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피라미드식 권위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반면 내가 선호하는 수평적 권위는 모두가 투명하게 공유하는 지식과 더불어 새로운 두려움, 즉 사회적 통제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을 둔다. (p. 303~304)

나는 수평적 권위가 정말로 새로운 권위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음을 굳건히 믿는다. 이 변화가 과연 이뤄질지는 더 이상 의심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미 이뤄지고 있는 변화를 어떻게 도울지 고민하고, 어떤 세력이 이 변화를 막으려 할지 감시하는 것이다. (p.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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