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자, 장자크 상페 그림, 박종대 역자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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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쥐스킨트 의 짧은 단편 <승부> 는 체스 한판을 다룬 작품이다.

가냘픈 선으로 그려진 서정적인 삽화들이 익숙한 것을 보니 장자크 상페가 그리고 쥐스킨트가 쓴 <좀머씨 이야기>도 읽었던 모양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화책 읽듯이 그림책 보듯이 가볍게 읽었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전이라;;;

마을의 체스 챔피언이라 할 수 있는 '장'은 볼품 없는 외모를 지닌 일흔 정도의 노인이다. 파르르 떠는 손에는 곳곳에 검버섯이 피어 있으며 옷차림도 낡고 추레한 노인이지만 마을의 다른 노인들과 둔 체스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고수이다. 그러던 어느날 젊은 도전자가 나타난다. 마을 노인들은 저녁먹으러 가는 것도 잊은채 새로운 고수와 오래된 고수가 벌이는 체스 한판에 집중한다.

어찌 저리 태연하고 도도하고 창백하고 무표정할 수 있을까! 자신감에 넘치는 손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경꾼들은 눈가가 촉촉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자신들은 그렇게 두고 싶지만 감히 두지 못하는 수를 이 젊은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젊은이가 왜 저렇게 두는지는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들도 저 친구가 지금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젊은이처럼 두고 싶다. 저렇게 당당하고, 승리의 자신감에 넘치고, 나폴레옹처럼 영웅적으로 싸우고 싶다. 장처럼 소심하게 망설이듯이 질질 끌며 두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 자신이 실전에서는 장과 똑같이 두기 때문이다. 다만 장이 그들보다 더 잘 둘 뿐이다. 장의 게임은 이성적이다. (p. 34)

새로운 고수로 보이는 젊은이가 놓는 체스는 당췌 예상할 수가 없었다. 여지껏 그렇게 체스를 두는 사람은 본적이 없었다. 노인들은 모두 비슷하게 체스를 두어왔다. 장처럼 소심하게 망설이듯이. 그래서 장의 절대고수 위치를 인정해주고 싶지 않다. 자신들과 별다를것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젊은이가 두는 체스방식은 자신들과도 장과도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구경꾼들은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 게임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목표는 오직 하나다. 낯선 젊은이가 저 늙은 챔피언을 무참히 짓밟고 승리하는 순간을 보는 것이다. (p. 42)

자신들은 이겨보지 못한 장을 갑자기 등장한 이름모를 젊은 청년이 이겨주기를, 장이 아니라 이 이방인이 고수중의 고수 슈퍼고수가 되어주기를 한마음으로 바라며 구경꾼들은 체스판의 수 한번한번에 감탄과 탄식을 오르내린다.

하지만 장 이 이겼다. 그리고 동시에 장 은 패배감을 느꼈다.

솔직히 장은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그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게 이방인에게 경탄했고 그와 함께 자신이 수년 전부터 그렇게 기다려온 패배를 마침내 그 인간이 최대한 강렬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맛보게 해주기를 소망했다고 말이다. 그래야 자신은 언제나 최고여야 하고 어떤 상대든 무너뜨려야 하는 짐을 벗어던질 수 있고, 그래야 질투로 찌든 그 망할 놈의 구경꾼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고, 그래야 스스로 평온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 승리는 그의 삶에서 가장 역겨운 승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승리를 피하려고 체스를 두는 내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욕보였고, 그로써 천하의 그 한심한 풋내기에게 항복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분명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오늘 실제로 패배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복수할 기회가 영영 없고, 미래의 어떤 빛나는 승리로도 만회할 수 없기에 더더욱 비참하고 결정적인 패배였다.(p. 64)

 

젊은이는 풋내기였다. 체스의 ㅊ도 제대로 모르는.

젊은이는 예의도 없었다. 자신의 패배가 확실해 졌을때 무례하게 판을 엎고 구경꾼들에게 인사는커녕 눈길한번 주지 않고 가버렸다.

하지만 장은 이 체스판 이후 결심했다.

다시는 체스를 두지 않기로.

앞으로는 다른 퇴직자들처럼 마냥 즐겁기만 한 '불게임'이나 하기로.

어떻게 보면 장은 이 체스판 이후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은퇴한 것이 아닐지.

체스의 말을 하나 옮길때마다 막상 그 체스판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젊은이의 수는 내내 별생각없이 무모했다. 무작정 킹만 향해 돌진하다가 몇수 만에 대패한 체스게임이었다. 젊은이에겐 아무 의미없는 체스한판.

하지만 그 무모한 한수한수에 어떤 작전이 숨어 있는걸까 고심하고 고뇌하던 장은 설마설마 하면서도 젊은이가 정말 어이없이 져버렸을때 너무 지쳐버렸다. 늙은이에겐 너무 힘에 부치던 체스한판.

책 사이사이 들어있는 삽화들은 파리의 한적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스케치해 보여주기도 하고 체스한판을 두고 고뇌했던 장의 심경을 담은 체스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이 갔던 그림은 36페이지 그림이었는데 삽화중 가장 화사한 색감에 일부만 보여지는 체스판위 젊은이의 검은색 흑기사와 장의 흰색 백폰이 이 작품을 상징해 보여주는 듯 했다.

 

 

 

나이든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을 더이상 시도할수도 이해할수도 없어진다는 것이 아닐까.

젊은 날의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무모한 도전들은 나이들어 원숙해진 이성앞에 결과적으로 패배할진 몰라도

젊은날이 기억하지 못하는 승리감대신 나이들어 씁쓸하게 다가오는 패배감에 의기소침해질지 몰라도

괜찮다.

삶은 승패가 존재하는 체스판이 다가 아니니

그저 공원을 산책하고 가벼운 체조같은 운동을 하고 바쁘게 출퇴근 하는 군중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은가.

흑기사의 용맹함이 도드라져 보이는 나이에 읽어도 폰의 소박함이 소중해지는 나이에 읽어도 짧고 굵게 여운을 줄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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