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할 우리 가족 - 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홍주현 지음 / 문예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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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환장할 '우리' 사회의 가족을 위한 이야기

'우리' 라는 집단으로서의 가족이 아닌 '나'와 '너'의 가족을 말하다

"남편의 암투병으로 가족이 위기게 처했을 때 가장 두려웠던 건 주위의  시선이 우리를 '비정상'가족으로 낙인찍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우리는 '우리' 라는 말이 너무 익숙한 사회다.

우리 나라, 우리 집, 우리 가족 ...

우리말로 하면 전혀 이상할게 없는 '우리' 라는 말은 외국어로 표현하게 되면 사실 굉장히 이상해 진다.

처음 만나는 외국인과 가족을 집을 나라를 공유하여 지칭한다는 게 외국인 입장에서 얼마나 생소하고 당황스럽겠는가? 외국인이 처음 만나는 한국인과 가정관련 얘기를 하다가 상대방인 한국인이 '우리와이프'라는 표현을 써서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를 이야기 하는 것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한국은 스와핑이 자연스러운 나라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는 웃지못할 이야기...


'우리' 라는 말 외에도 이런 공동체적 개념은 우리 사회에 아주 흔하다.

'부부는 일심동체' 라는 말도 그렇다. 생판 남으로 살던 두 사람이 만나 한몸으로 합쳐진다는게 실은 말이 안되는 거다. 그래서 갈등이 일어나고 싸움이 생기는 거다. 한마음한뜻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과거와 달라진 문화와 관계가 바탕이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로 묶인 가족은 이렇게 환장할 관계로 변화되고 있다. 개인의 삶은 확장되고 있는데 개인이 없는 우리 라는 관계는 모든 관계의 발목을 잡는다. 이 책은 그 발목을 잡고 있는 족쇄를 풀어나갈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우리는 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가족을 마지막 보루라고 여길까. 혹시 그런 믿음이 가족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가족 탓이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가족의 민낯 보기를 외면하거나, 그저 꾹 참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가족에 대한 한국인의 이런 통념과 태도가 전형적인 집단주의적 시각에서 기인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의 가족은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집단'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족 이라는!

그러나 이런 가족은 가족 구성원을 지켜주는 보루가 아니라 가족(집단)을 위해 구성원(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굴레로 전락한다. 가족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가족이라는 집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과 기성 세대를 구분하는 인식의 가장 큰 차이는 개인과 가족에 대한 개념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기성 세대들은 기존의 가족 이라는 집단 개념이 익숙한 세대다. 가족으로 묶고 혈연으로 묶고 지연으로 묶어서 '우리'가 되야지만 관계를 맺고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 '우리'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포괄적 범위와 다르게 실제 '우리'의 적용 범위는 굉장히 배타적이다. 집단대 집단으로 인식하려 하고 개인으로서의 의미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나' 개인이 먼저다. 이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가족을 우선시 하는 기성세대와 나 를 우선시 하는 젊은 세대의 소통은 '개인'의 제대로 된 개념 이해 없이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에 해당하는 1부는 투병하는 남편 옆에서 내적,외적 고충을 겪으며 발견한 한국 가족의 집단주의적 현상을 설명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담은 2부에서는 전통적 가족관을 대신할 새로운 가족관을 제시하며, '우리'라는 집단으로서 가족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립한, 서로 다른 '개인으로서 '너'와 '나'가 모여 연대한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3부에서는 '개인'이 연대한 공동체로서 가족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과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남편은 아내나 부모에게 자신이 해야 할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달라고 구걸 하고, 아내는 자녀에게 자기 꿈을 대신 이뤄달라고 강요한다. 자녀도 부모에게 자기 인생을 대신 책임져 달라고 요구한다. 나 역시 부모에게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해달라며 의지했다. '희생'이라는 아름답고 고결한 명칭을 붙여서!

거칠게 표현됐을 수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가? 결혼을 하면 평소 무뚝뚝하던 아들도 자기의 아내만큼은 시부모에게 애교스럽게 대해주길 바라고 평소 까칠하던 딸도 자기의 남편만큼은 살갑게 친정부모를 살펴주기를 바란다. 자식에게는 다 너를 위한 거라면서 부모의 바램을 대신 실현시켜 주기를 강요하고, 자식은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부모니까 이정도는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의지하려는 모습을 주변에서 너무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나? 하지만 그렇게 가족 이라는 공동체적 모습을 로망으로 갖고 있기엔 우리 사회가 이미 핵가족을 넘어 개인으로 분화된지 오래다. 전통적 가족관을 유지하고자 하면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가족개념이 더 돈독하게 유지돼 왔던 이유는 경제적 복지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오래 일할수록 급여가 올라간다. 일을 잘하던 못하건, 생산성과 급여는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 왜 그럴까. 나이를 먹을수록 부양가족이 생기고, 자녀 양육비가 들며, 노부모의 의료비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용은 선진국이 될수록 사회가 부담하는 부분이 커진다.

한국사회에서는 복지를 사회가 아닌 기업이 책임져 왔다. 주택대출, 학자금, 상여금 등 사회가 지원해주지 못하는 영역들을 회사에서 지원해주면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복지를 제공하는 조직에 들어가야 했다. 이런 구조에서는 이건아닌데아닌데 하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민간(기업,개인)에게 미룬 복지 제공을 국가가 가져가야 하는데, 이 일을 계속 미루면 사회 구성원이 임금을 생산성에 따른 노동의 값이 아니라 복지 수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점점 커진다.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수단이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임금이어야 한다고 믿으면, 고용자에게 그 책임을 물으면서 각자 입장에 따라 민간끼리 투쟁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 사회 구성원의 태도에 따라 국가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보다 민간(고용자)를 압박하는 일을, 그것이 마치 국가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인 양 강화하고 우선하기에 이른다. 국가의 복지 서비스 제공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각자도생만 심화되는 것이다.

이 단락을 읽고 아차 싶었다. 몰랐다. 한국 사회에서 왜 유달리 대기업에 대한 취업 욕망이 높고 왜 유달리 대학진학율이 높으며 왜 유달리 가족을 위한 희생이 당연시 됐었는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복지를 제공해주는 주체가 회사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 있느냐에 따라 복지가 달라진다면 경쟁이 심화될 수 밖에 없다. 국가가 복지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상 이 문제는 해결되기 힘들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70여년 전, 독일과 스웨덴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그 문제를 해결한 방식이 오늘날 한국인이 선망해 마지않는 복지 천국의 바탕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그 핵심에는 국가의 역할이 있었다.

갈등하는 부분에 공권력이 개입해서 기업이나 노동자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이 아니라,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여지를 주고 노동자에게는 특정 기업에 소속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경직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책임과 부담을 국가가 나눌 때, 개인은 가족을 서로의 아바타로 삼는 데서 벗어나 자기 행복을 당당하게 느끼며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역할이 강조될 때마다 여전히 자기네 이익을 위해 편가르기만 열심인 정치권의 행태가 답답해진다. 그렇게 편을 가르고 국민을 동요시켜 결국은 자기네만 이익을 취할뿐 국민의 복지는 멀리멀리저멀리;;; 국가의 기능을 강화시키려면 국민이 제대로 인식하고 국가의 편을 들어주고 정치권의 갈등을 제압하는 힘을 가져야 하는데, 국민들도 여전히 부화뇌동하기 일쑤이니...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게 아니라 일을 시켜야 하는데...


화목한 가족이란 환상이 클수록 그 가족은 서로에게 환장할 가족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국인의 '우리'는 연대의 공동체가 아니다. 연대하려면 '너'와 '나'가 있어야 하는데, 구성원이 '우리'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동일시하다 보니 그저 한 덩어리 상태에 가깝다. 그 안에서 다른 의견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존중은 커녕 '다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름은 분리를 전제로 하는 것 아닌가. '너'와 '나' 사이 경계가 없는 '우리' 속에서 다름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 이 되기 쉽다. 구성원이 서로 경계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집단에서는 당연히 같거나 비슷해야 '정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름' 과 '틀림', '비정성' 을 구분하는 일을 서툴고 어려워 할 수밖에 없다. 직장 조직 같은 사회에서 이런데, 하물며 가족은 어떨까. '너'와 '나'로 분리하지 못하고 서로를 동일시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까. 가족이야말로 누구도 불경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우리'니까.

개인으로 독립적으로 제대로 바로 서는 일은 무엇보다 '우리' 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가족이 환장할 관계가 아닌 화목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보다 '나'와 '너'가 제대로 존재해야 한다.


존재 의미와 가치를 어떤 역할이나 그 역할 수행 능력,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기여에 두면, 그 역할을 잃거나 집단이나 타인에 기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나 사회적으로 존장 받기 어렵다.

내가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어떤 상황이나 집단에서 맡은 역할과 구분했다면, 상황과 주위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나 자신에 대해서 갈팡질팡 하지 않을 수 있다. 저자가 남편을 간호하는 상황에서 며느리인가, 아내인가, 간병인인가 하는 혼란을 느낀 것은 같은 상황도 역할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은 먼저 그냥 '나' 임을 인식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주체로 바로 서면, 내가 포함된 공동체 에서도 내 역할을 더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누구 때문에 생긴 불안이든, 어떤 상황으로 생긴 두려움이든, 불안과 두려움, 걱정과 염려가 있는 곳은 분명 내 마음이다. 따라서 그것을 가장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가족으로 인해 생긴 불안과 두려움 걱정과 염려를 스스로 다루는 건, 엄밀히 말하면 가족과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분리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가족을 끈저끈적한 '우리' 상태에서 떨어진 '너'와 '나'로 만들 때, 서로에게 힘이 되는 진짜 가족에게 다가가는 것일 테다.

가족에 대한 진짜 사랑은 절절한 '우리'로 똘똘 뭉치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의 날개를 가진 온전한 '너'로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도록 서로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안에서 '너'와 '나'를 만드는 일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공감가는 문장이 참 많았다. 표지에 부제로 써 있는 '나'와 ----------- '너'의 가족을 위하여 라는 부분에서 ---------- 사이를 줄이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절실한 때다. 저자의 가족에서 개인으로서의 독립 부분 내용들에도 수긍이 많이 갔지만, 저출산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새로웠다.


저출산 현상에서 우려할 건 인구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구수 절댓값에서 2017년 한국은 세계27위이다 OECD에서 단연 1위고, 세계 230여 개국에서 세 번째다. 인구밀도가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대만과 방글라데시뿐인데, 대만은 출생율이 한국보다 낮고, 방글라데시 역시 급속도로 하락하는 추세다. 원인이 무엇이든 인구 감소 자체를 우려하는 건 복작복작한 고밀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그랬다. 저출산이 문제인줄로만 알았지 계속 복닥이며 고밀도 상태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던 것 같다. 아이쿠!


저출산 현상을 우려하는 것은 결국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 청년 한 명이 먹여 살려야 할 노인 인구가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걱정도 앞으로 한국은 생산성을 향상하지 않고 지금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허걱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기술은 발달하는데 생산성을 인구수에서만 찾는다는 건 너무 구시대적 발상 아닌가?


저출산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큰 원인은 국가의 필요와 구성원의 필요가 일치하지 않아서다. 과거에는 누구에게나 출산이 중요했다. 사회가 가족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출산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은 아니다. 성공과 명예는 신분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으로 달성해야 하고, 조직의 권위는 상위의 어떤 모호한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사회도 어느 가족 구성원의 하나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활동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체제나 구조가 가족에서 개인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개인 중심 사회에서는 '나', 이번 생의 내 삶이 가족보다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변화는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는 신호 같아서 나는 오히려 희망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 현상을 문제라고 본다면, 구시대적이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우리' 가족관을 바꾸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전통적인 우리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출생율이 높을 것 같지만, 통계에 따르면 오히려 가족이나 우리보다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개방적인 사회(프랑스, 스웨덴, 미국 등)의 출생율이 높다.

이래저래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는 저자의 관점에 놀라며 읽게 된 책이다. '나' 에 대한, 가족적 '우리' 에 대한 사고의 프레임은 '사회'에 대한, 자녀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을 가져온다.


한국에서 갈등이 가족 간에 언쟁으로, 사회에서는 생사를 건 투쟁으로 악화되기 쉬운 원인은 갈등을 관계의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라는 분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나'와 '너'란 독립적 개인이 아니라 집단 속 개체로 인식하니, 갈등은 관계의 균열을 가져오는 위협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갈등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이 '개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 하는 동안 생긴 문제라도 그것이 자기 문제인지, 타인의 문제인지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일과 타인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일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 가 아니라 '나' 와 '너', 즉 개인이 되는 첫걸음이니까. '개인'이 그저 개별적으로 고립된 존재를 의미하거나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자립의 존재를 지칭한다면, 그것은 자기 내면에서 시작하지만 반드시 타인과 관계에서 완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화의 역할이 중요하다.

예전보다 가족간의 갈등이 사건화 되는 경우를 심심치않게 뉴스에서 접하는 것 같다. 가족간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심리서들도 붐을 이루며 팔리곤 한다.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독립하지 못한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고민이 수면위로 떠오른 게 아닐까. 구시대적 가족 개념이 변화된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또 같이' 라는 흔한 말을 이제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라는 말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가족은 가족이다 라는 경계적 구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 경계는 높다란 담벼락으로 막힌 게 아니라 얕은 울타리와 개방적인 문이 있는 그러한 구분일 뿐인 것이다. 구분이 제대로 될 때 독립은 이루어 지고 독립이 이루어 질 때 연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단단한 개인의 공동체적 연대는 종속적 집단주의 가족보다 이 사회를 더 살기 좋게 만들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얇고 쉽게 읽히는 책 한 권이 이렇게 큰 생각의 변화점들을 던져주다니...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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