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웨덴 예타 운하 보렌스훌트 갑문에서 준설 작업을 하던 중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잔인한 폭행 흔적이 역력한 그녀의 신원과 단서, 용의자를 찾기 위해 스웨덴 경찰들은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수사에 별다른 진척이 보이지를 않는다. 스웨덴 최고의 형사 '마르틴 베크'가 수사팀에 가세하고, 그는 콜베리, 멜란데르, 라르손 등 유능한 동료들과 함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어느 날 미국 네브래스카 현지 경찰과 연락이 닿으면서 피해자와 용의자의 신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닥을 모르는 인내심, 논리적이고 냉철한 두뇌를 갖추었지만, 신체적/지능적으로 특출나지 않은 평범한 경찰인 마르틴 베크는 온갖 난관에 봉착한다. 과연 그는 한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용의자를 체포해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인가?




1965년 첫 출간된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국내에서 열 편으로 완간되었다. 스웨덴의 작가 커플인 마이 셰발페르 발뢰가 번갈아 원고를 쓰며 공동 저작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 그 시작을 알린 <로재나>는 밀실과 탐정, 수수께끼 풀이에 갇혀 있던 스릴러 소설을 스웨덴의 운하와 거리를 헤매는 경찰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일대 변혁을 이루었다. 시리즈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는 마르틴 베크는 셜록 홈스처럼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는 압도적인 지능을 자랑하거나, 악당들을 박살 내는 괴물 같은 피지컬을 지닌 캐릭터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험난하고 지지부진한 수사 진도에 낙담하고 괴로워하며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60년 대 인터넷과 무선 통신, DNA 과학 수사가 도입되기 이전, 발품을 팔아 주변인 심문에 증거 채취를 하고, 각지로 수사 협력 전보를 날리는 그 시대 경찰들.

마르틴 베크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연달아 밤을 새워 탐문에 미행을 하다가 감기 몸살에 시달리고, 그의 부인은 언제 집에 돌아오냐고 성화를 부린다. 그는 교살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고 가정에도 충실하고 싶지만, 구시대의 경찰 체제에 갇힌 평범한 인간에게는 힘에 벅찬 희망 사항일 뿐이다.



마이 셰발 & 페르 발뢰는 장기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경력을 살려 사실적인 경찰 소설을 선보이기로 결심했다. 당시의 스웨덴 운하와 거리의 모습, 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인물들의 행태를 세밀히 그렸다. 실제 수사 현장과 흡사하게,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초동 수사마저 힘겹기만 하다. 증거는 수집되지 않고 목격자와 제보는 낌새도 없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 일정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멀리 미국 경찰과 인터폴, 내부 동료들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베일에 가려진 용의자는 희미한 실루엣을 그리며 윤곽을 드러낸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완독하기 위해서는 저자들이 의도한 느린 템포에 맞추어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주변 인물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를 하고, 범행 현장과 피해자를 찍은 필름 사진들을 관찰하여 특이점을 포착하는 경찰들의 주의 깊고 느린 행보와 속도를 맞춰야 한다. 서서히 좁히는 수사망에 걸려든 용의자는 예상대로 매력이 넘치고 허점이 보이지 않는, 치밀하고 신중한 자였다. 조심스레 그의 뒤를 쫓고, 미끼를 놓아 함정 수사를 하는 후반의 체포 작전은 형사들의 바닥난 인내심을 시험하며 서서히 긴장도를 높인다. 막판 올가미를 조여 덫에 걸린 늑대의 발을 낚아채는 것처럼.. 본색을 드러낸 살인자를 연행하는 과정은 숨 쉴 틈 없이 진행되어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사실적인 노르딕 누아르를 표방한 '마르틴 베크' 의 첫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두 공동 저자는 이후 대히트한 네 번째 시리즈 <웃는 경관>을 거쳐 마지막 시리즈 <테러리스트>까지.. 총 열 편의 시리즈를 출간하여 경찰 소설의 모범이자 북유럽 미스터리 스릴러의 원점을 제시했다.



이후 등장한 헨닝 망켈, 스티그 라르손, 요 네스뵈 등 북유럽의 장르 문학 작가들은 하나같이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 빚을 지고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장르 문학에 발을 들이고, 미스터리 스릴러 형사물에 입문하려는 이들은 마이 셰발 &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시작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마르틴베크 #로재나 #마이셰발 #페르발뢰 #시리즈정주행 #스웨덴 #노르딕느와르 #경찰범죄소설 #미스터리스릴러 #형사경찰물 #전설의시작 #엘릭시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면서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 극중 제외된 것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에 빠졌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수학자들 가운데 누가 얼굴을 비추지 않은 걸까? 단팥빵에 팥앙금이 빠진 것만 같은, 휑하고 허전한 느낌.. 벵하민 라바투트의 <매니악 Maniac>을 읽으면서 그 물음이 자연스레 풀렸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리처드 파인만,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유진 위그너, 쿠르트 괴델, 에드워드 텔러 등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신에 가장 근접한 천재라며 존경하고 칭송한 그 이름.. '존 폰 노이만'이 그 주인공이다.

네덜란드 태생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는 그를 유리 거울이 사면을 감싼 방에 가두고는 주변 인물을 통해 다각적으로 관찰한다. 어릴 적부터 괴력의 지능을 발휘한 노이만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의 부모, 가족들, 스승, 배우자, 친구 등을 화자로 내세워 편집증적이고 광적인 천재의 방대한 업적과 주요 에피소드, 심리 상태 등 거의 모든 면을 서술했다.




책은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심한 우울감과 고뇌에 빠진 천재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의 생애를 다룬다. 그는 개인사와 학문적 고뇌를 견디다 못해 다운증후군을 앓던 막내아들과 함께 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고전 물리학의 확실성이 무너지면서 대두하는 냉혹한 비이성에 대해 경고했다. 과학의 순수한 영혼을 따라다니는 유령, 정신 나간 미치광이 이성이 우리 곁에 어른거린다. 그가 남긴 말이다. 어둡고 음울한 오스트리아 태생 천재의 비극적인 삶을 통과하면 '노이만'이 전면에 등장한다.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똑똑한 사람, 외계인, 천재 중의 천재, 신에 가장 근접한 자.. 노이만은 100년 이후의 세계를 예견하고, 광대한 영역의 학문적 토대를 닦은 선지자였다. 인류의 발명 가운데 가장 창조적인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초기 이론과 모델을 창안했다. 가장 파괴적인 발명이라 할 만한 핵폭탄과 수소 폭탄의 연구 개발에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았다. 두 분야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닌,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폭발적으로 진화하여 전 인류의 밤낮과 세계 정세를 변혁시켰다. 또한 세계 판도를 냉전 시대를 거쳐 다극화/네트워크/디지털 AI 시대로 나아가는 동력을 제공했다.




2부 노이만의 일생을 짚어가다 보면..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에서 그를 배제한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다. 폰 노이만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학자들은 그 빛이 바래고 조연으로 물러날 위험이 있다. 놀란 감독은 그 점을 우려했을지 모른다. 후에 그를 주연으로 다룬 영화를 따로 만들자, 고심 끝에 이를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역사에 길이 남을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마저도 그를 불세출의 압도적인 천재라 칭했고 경외했다. 그는 유수의 천재들마저 쩔쩔매는 미지의 불확실성을 빠르게 제거했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모의 영역을 개척하여 학문의 신영토를 확장시켰다. 저자는 노이만의 개인/가정사를 세밀하게 그리고, 발음 상 특이한 버릇까지 세부 관찰하여 그가 환생하여 곁에 현존하는 것처럼 사실성을 부여했다. 덕분에 이 책은 픽션도 논픽션도 아닌, 소설과 다큐 경계에서 아슬한 줄을 타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폰 노이만은 신을 닮은 천재였지만 냉혹하면서 잔인한 면이 있었다. 그가 지지하고 개발에 기여한 수소 폭탄 '아이비 마이크'는 전 인류의 말살과 지구의 파멸을 앞당길 만한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피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무릇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었다. 대다수의 범인과 달리 한 천재의 죽음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었다. 책을 통해 평범한 인간으로 회귀한, 노이만의 말년을 돌아보길 바란다.




대망의 3부는 천재 기사 '이세돌'의 바둑 인생과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의 탄생/각성을 다룬다. 인간 대 AI, 세기의 바둑 대전에 얽힌 숨은 이야기, 쌍방의 결정적인 승부수를 느린 호흡으로 복기한다. 이후에 이세돌의 이른 은퇴 선언, 알파고의 폭발적인 진화를 다룰 때면 한 인간으로서 당혹스럽고 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인간 이세돌은 전 인류에게 고개 숙여 사과할 필요가 없었다. 인류가 아닌 그의 패배이자 과오라고 원죄를 뒤집어쓰는 건, 한 개인으로서 너무나 잔인한 고백이자 형벌이었다. 현시점에서 인간은 AI의 번개 같은 수 계산과 승부 예측 그리고 냉혹함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 커제 등 AI 와 맞붙은 일류 바둑 기사의 연이은 패배로 인간과 AI의 격차는 증폭되고 있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AI는 인간의 활동에 도움을 주는 선을 지키고, 임계점을 넘을 경우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둑과 체스 등 예와 즐거움, 공정한 승부를 중시하는 게임은 인간이 AI와 맞붙지 않도록 규칙을 정하고 선을 그어야 한다. 어느 분야와 영역이든, 인간이 AI 와 대결하여 허무하게 패배하는 것은 초기 몇 번이면 족하다. 만약 이러한 패배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가중된다면 AI 로봇 혐오 현상,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현상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SF 영화에서나 볼법했던, 인간과 AI 간의 대립과 마찰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책의 말미 알파고와 대적하여 연승했다는, 업그레이드된 차세대 AI '알파제로'의 출현과 백돌 한 수를 신중히 내려놓는 이세돌의 사진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광적인 천재들이 이룩한, 매니악한 디지털 AI 세계의 끝은 희망 가득한 유토피아일지, 아니면 벼랑 끝 아포칼립스일지..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벵하민라바투트 #매니악 #폰노이만 #파울에렌페스트 #오펜하이머 #괴델 #닐스보어 #앨런튜링 #유진위그너 #맨해튼프로젝트 #트리니티 #아이비마이크 #오토마톤 #알파고 #이세돌 #바둑 #알파제로 #딥마인드 #인공지능 #AI #문학동네 #신간추천리뷰 #서평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디샤 필리야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흑인 여성들에게 '교회'란 어떤 의미일까?

대서양 건너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갖은 중노동과 학대, 차별을 겪은 그들에게 교회는 탈출구이자 안식처로 기능했을 것이다. 그들이 건설한 교회는 집단으로 모여 신께 구원을 갈구하는 곳이자, 흑인 특유의 리듬과 바이브로 목청껏 함께 노래 부르며 광란에 가까운 영적 체험을 겪는 공간이었으리라.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태생의 흑인 여성 '디샤 필리야'는 어릴 적부터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교회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다채로운 인물들이 부딪는 대소사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 어머니, 형제자매들, 친구들과 지인들을 지면으로 불러내 그들의 적나라한 욕망과 속내를 드러낸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숨기고 싶은 치부까지 대담하게 까발리며 첫 소설집을 대중들과 출판계 인사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디샤 필리야의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 표지에 그려진 목조 교회당의 솟을 지붕이 회빛 하늘을 비죽 찌를 듯하다. 교회 안에서 성령 충만하고 정숙해 보이는 신도들이지만, 일상에서 비치는 그들은 여느 인간들처럼 속된 욕망에 충실하고 현실 밑바닥에서 각자 몸부림치며 삶을 살아내고 있다. 2000년 밀레니엄 전야를 맞이하여 동성인 소꿉친구들이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밀회를 즐기는 첫 단편은 종교적 믿음과 성적 욕구가 충돌하는 혼란스러운 순간을 그린다. 관계를 맺기 전 기도를 올리며 신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율라'의 모습. 이후 제단에 69자세로 바친 제물들처럼.. 뒤엉켜 서로를 혀로 탐하는 장면이 도전적이면서 에로틱하다.




총 9편의 단편들 중, <복숭아 코블러>에 눈길이 머무르고 손이 간다. 올리비아는 매력적인 외모의 어머니와 단둘이 빈민가에 살고 있다. 어머니는 매주 월요일이면 찾아오는 '하느님', 유부남 목사를 위해 '복숭아 코블러'를 정성껏 준비한다. 스위트한 디저트를 매개로 삼아 펼쳐지는 은밀한 불륜과 종교적 타락의 현장이 노골적이면서 생생하다. 올리비아와 함께 흐느적대는 외창 커튼 사이로 다가가 그들의 정사를 엿보는 듯하다. 실로 잔인하게 어머니는 상간남에게는 디저트를 맛보게 하지만, 딸 올리비아에게는 조각 하나 주지 않으려 한다. 어려서부터 달콤함을 경험하면 갈증을 달래려 할 테고, 자라서는 누군가 흘린 그 부스러기나 탐하리라는 명분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어머니 그 자신을 닮지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올리비아는 어머니의 말에 굴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뭉개진 코블러를 한 주먹 움켜쥐어 맛을 본다. 이브가 경고를 뿌리치고 금지된 악과를 따먹는 것처럼, 바닥까지 내려가 터부시되는 금기를 깨부순 그녀는 천상의 맛에 취한다. 허나 올리비아는 달큼한 복숭아를 탐했지만, 그것에 도취되어 복숭아 자체에 중독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니 불운하게도 목사의 집에 과외 선생으로 초빙되어 그 집 아들과 관계를 맺지만, 그녀는 달콤하고 끈적한 코블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다. 속된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고 집착하는 어머니와 달리, 그녀는 아름다움과 달콤함의 본질을 추구하고 곁의 이들과 나누며 살겠다고 항변한다. 부조리하고 타락한 이들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따귀를 날리고, 갖은 핍박을 가해도 그녀는 끝내 다른 삶을 살아낼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남긴 부스러기를 탐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어머니를 닮지 않으려 그녀는 분전하고 노력하리라.





디샤 필리야, 배경이 변변치 않은 흑인 여성이기에 누군가는 그녀를 미국 문단의 '신데렐라'라고 일컫기도 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 소설 장르만큼은 이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내밀한 삶이 투영되는 장르이기에 빈약하고 일천한 내적 경험과 사상으로는 이토록 파격적이면서 독자의 심정에 깊이 다가서는 소설을 써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녀의 첫 작품은 교회 의자에 나란히 앉아, 십자상을 바라보는 흑인 여자들의 은밀한 삶과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책 서두에서 인용한 앤설 엘킨스_<이브의 자서전>의 문장대로.. 은총을 잃고 타락하는 것이 아닌, 자유를 향해 두 날개를 펼친 천사처럼.. 저 하늘 멀리 도약하는 레전드 작가의 데뷔작으로 남길 바란다.




#디샤필리야 #교회여자들의은밀한삶 #데뷔작 #문학동네 #신작리뷰 #신작추천 #서평단 #흑인여성 #소설집 #복숭아코블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르웨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욘 포세'. 그의 대표작 <멜랑콜리아 I-II>를 손에 쥐었다.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을 접하려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각지의 도서관에 소장된 그의 책들마다 장기 대출에 예약이 한가득 밀려 있으니..


발 빠르게 그의 책을 펼쳐 보았다. 그의 문장은 스타카토처럼 짧게 끊어지는, 간결함과 단순함 그 자체이다. 현란한 수식어와 미사여구는 존재하지 않기에 초반 몇 페이지는 읽기 어렵지 않다. 소리 내어 읽으면 중첩되거나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 때문에 시적 운율이 느껴진다. 허나 책 전체를 깊이 파고들면 그 느낌이 달라진다. 동일한 의미의 문장들이 난데없이 뒤섞여 반복되는가 하면,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이 무차별적으로 난입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정신 착란/분열, 자아도취, 과대망상, 환각/환청에 휩싸인 조울증 화가의 머릿속과 심리를 속속들이 투시한다. 쉴 새 없이 스치는 망상과 사념들이 쇼츠 영상처럼 페이지와 행간을 가득 메우고, 현실과 상상 사이 천 자락으로 휘날리는 빛과 어둠이 예술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뇌리를 지배하는 가운데 결국, 그는 미칠 수밖에 없었다. 반쯤 미친 예술가의 혼란한 머릿속을 투영한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 또한 그의 멜랑꼴리한 정신 상태를 간접 체험하는, 진귀한 독서 경험을 맛볼 수 있다. 욘 포세의 의도적으로 중복 배열한 단어/문장과 살짝 비틀어 변주하는 장면 묘사에 빠지다 보면, 우리 또한 광기와 허상에 빠진 예술가의 심리 상태를 일부나마 겪어볼 수 있다는 의미다.   


멜랑콜리아 I-II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두 종교관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작가 비드메의 에피소드를 통과하면, 앞서 등장한 라스의 누이 '올리네'가 전면에 등장한다. 정신 병원에 갇힌 라스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지 오래다. 그녀 역시 멜랑꼴리한 감정에 취해 허덕이는 캐릭터의 전형이다. 끼니를 해결할 생선을 들고 낡은 요강이 놓인 작은 집으로 거듭 향하는 그녀는 노년에 닥친 치매와 각종 신체적 노화에 시달리고 있다. 힘겨운 현실의 단기 기억이 상실되는 가운데 수시로 틈입하는 과거의 단편적 기억들은 그녀를 불안과 혼란으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가까운 거리조차 거동하기 어렵고 대소변을 가리기 힘든 그녀의 뇌중 역시.. 맥락 없는 복잡다단한 상념들이 가득하다. 뒤돌아 서면 이름마저 헷갈리는 이웃들과 대화하며 꼬박 하루를 겨우 지탱하던 중.. 투병하던 남동생 '쉬버트'가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자, 그녀는 자신의 작은집 변기에 앉아 어둑한 생선 눈알을 바라보며 눈부신 빛을 마주하게 되는데..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욘 포세의 문장들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시적이다. 허나 작품 전체를 통틀어 바라보면 혼란스럽고 '멜랑꼴리'한 감정을 이보다 예리하게, 고통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밀히 파고들었다.  <멜랑콜리아 I-II>, 제목 그대로 온갖 멜랑꼴리한 감정들의 총체를 시적 언어와 문장으로 직조한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수식어를 차치하더라도.. 노르웨이 문학의 정수를 접하고픈 이들이라면 꼭 읽어 보라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경식 교수. 그는 평생을 디아스포라, 즉 이방인과 소수자의 영토에서 살았다. 어느 국적이나 집단에 명확히 소속되지 않은 채,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선을 방랑하며 한국과 세계정세를 주시했다. 1951년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의 재건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그는 군홧발에 짓밟힌 모국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을지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70년대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두 친형이 구속되자, 그는 전 세계에 부당함을 호소하고 형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견제하고 가족들의 무고를 증명할 만한 세계 각지의 인권/시민/종교 단체, 민주화 인사 등과 소통하며 유랑하던 중, 그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최전방이자 다양한 인종/문화가 뒤섞인 용광로와 같은 미국에 발을 들이는데.. 


세월이 흘러 그는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던 판데믹 시기에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집필하면서 친형들의 구명 활동을 펼치던 1980년대를 회상한다. 낯선 이국의 땅에 도착한 그는 서투른 영어 실력을 자각하는, 고립되고 소외된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몇몇 인권 단체들과 구호 운동 관계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서경식 교수와 수많은 저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명 운동을 펼치는 틈틈이 그는 가까운 미술관에 들러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위안을 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를 얻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암울했던 시기를 견디게 했던 '선한 아메리카'의 기운에 대해 말한다. 부당하게 차별 당하고 소외된 자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숨은 이야기를 경청하던 당시의 자유분방한 아메리카를 떠올린다. 겉으로 보기에 미국은 변화무쌍한 혼돈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는 듯하지만, 그 복잡성과 다양성이 '아메리카'라는 거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허나 현재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동향은 어떠한가? 소수자와 이민자들을 공개적으로 배척하고, 판데믹 시절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내몰았던 '트럼프'는 백악관에 다시 입성하기 위해 행보가 분주하다. 러시아는 침공한 우크라이나에서 철군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스라엘과 반 유대국 간의 국지전과 마찰은 격화되는 상황이다. 서경식 교수는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져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걱정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필리핀과 캄보디아, 미얀마의 학살 등 잔악한 적대 행위가 반복되고 재현되는 최근 세계정세에 대해 진부하게 느끼는 우리의 둔감한 감정에 대해 경고한다. 일찍이 그는 자신을 '어두운 탄광 속에 갇혀 질식해 가는 카나리아'라 표현하며, 평생을 소수자의 처지에서 방랑한 디아스포라의 예민한 감수성을 드러낸 바 있다. 



그가 존경했던 세기의 현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과 유대 민족의 가시 돋친 경계를 허물고,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200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으려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은 서경식 교수는 지난 2023년 12월 고인이 되었다. 우리는 성큼 다가온 전 세계적 비극과 절망에 대해 경고해 줄 날카롭고 명민한 카나리아들을 하나둘씩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과연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갈수록 짙어지는 어둠과 안갯속을 헤매면서, 아우성치고 서로에게 주먹과 칼을 휘두르고 있다. 




#나의미국인문기행 #디아스포라기행 #이방인 #방랑자 #신작추천 #반비출판사 #서경식교수 #에드워드사이드 #유작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