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2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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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부터 살인 현장이 펼쳐진다. 이미 시신은 감식반에 의해 실려나갔고, 하얀 묵필로 표시된 굵은 실루엣 만이 남아있다. 스웨덴의 노련한 형사 '마르틴 베크'는 동료 콜베리와 함께 용의자의 자백을 받는 데 성공한다.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그는 가족들과 함께 섬에서 휴가를 즐기지만, 그를 찾는 긴급한 전화와 함께 달콤한 휴식은 산통이 깨지고 만다.

'마르틴 베크'의 두 번째 이야기는 그가 휴가 중에 긴급히 경찰서로 복귀해야 하는 건으로 시작된다. 스웨덴의 발 빠르고 영민한 저널리스트 한 명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실종됐다. 외무부 관료, 실종 기자가 소속된 잡지사, 헝가리 현지 경찰까지 개입하여 복잡히 엉킨 사건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갈수록 미궁으로 빠지는데..



마르틴 베크는 혈혈단신 부다페스트로 건너가 실종자의 족적을 쫓는다. 60~70년대 부다페스트의 도나우 강을 건너는 유서 깊은 다리들, 머르기트 섬, 페슈트 구역과 부더 구역 등 주요 시가지의 풍경이 눈에 보이는 듯 생생히 묘사된다. 주의 깊고 신중한 형사와 마주치는 용의자들의 인상착의는 세세히 그려진다. 그의 오감을 동원하여 감지하는 현장의 특이점과 분위기는 담담하면서도 세심한 문장으로 다가온다. 동료들, 협력자들과 나누는 대화는 시니컬하면서도 위트가 흐른다. 공동 저자 마이 셰발, 페르 발뢰가 창조한 '마르틴 베크' 시리즈 2탄,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는 경찰 소설의 신영토를 개척할 만한, 완숙한 경지를 선보인다.


사건의 서사는 초반에는 차분하게 진행되다가, 변곡점에 이르러서는 긴장도를 끌어올리며 독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용의자로 마주친 여성이 마르틴 베크의 숙소를 찾아와 유혹하는 장면은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다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대마초를 밀매하는 패거리가 그를 불시에 습격하여 난투를 벌이는 장면은 혈흔이 난무하고 아슬하기만 하다.


피날레까지 30여 페이지를 앞두고, 마르틴 베크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사건을 처음부터 되짚는다. 그는 냉철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행방이 묘연한 기자의 행적을 역으로 되밟으며 용의자를 절벽 끝으로 몰아간다.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숨 막히는 반전과 고밀도의 서사를 독자에게 선사하며 마지막 페이지와 문장까지 긴박감을 불어넣는다.

과연 마르틴 베크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건을 마무리 짓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휴양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수사에 임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를 펼치시라.



우리는 유럽의 북적이는 구시가지와 낡은 선로를 운행하는 목재 열차, 썩은 달걀 냄새가 진동하는 유황 온천에서 어느 형사의 지친 얼굴을 마주할 것이다. 뿌연 안갯속에서 야광으로 빛나는, 형형한 두 눈동자가 어둠을 꿰뚫는다.

그의 발걸음은 느리지만 지칠 줄 모르니 부디 놓치지 말고 뒤를 따르라. 그는 자그마한 실마리도 놓치지 않고 사냥개 마냥 끈질기게 따라붙어, 짙은 그늘 아래 숨은 범인의 목을 조르고 수갑을 채울 것이다. 우리는 마르틴 베크,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




#연기처럼사라진남자 #마르틴베크 #경찰형사소설 #문학동네 #엘릭시르 #마이셰발 #페르발뢰 #김명남번역 #서평단 #책추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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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산들 문학인 산문선 5
이즈미 세이이치 지음, 김영수 옮김 / 소명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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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세이이치는 1927년 부친 이즈미 아키라가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조선으로 이주했다. 그는 경성공립중학교 3학년 때부터 경성 근교의 산을 오르면서 등산가, 알피니스트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이어 경성제대 재학 시절, 최초의 대학산악회인 '경성제대 산악회'를 창설하여 왕성한 산악 활동을 펼친다.

20세기 초 조선 북녘의 금강산, 관모봉, 부전고원, 백두산 등정까지 실행하였고, 주위 풍경과 지형, 상세한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수차례 금강산에 오르는 여정을 공들여 설명한다. 장안사의 방갈로에서 머무르다 망군대로 가는 길, 태초의 자연을 간직한 내외금강의 비경,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비로봉에 도달하여 금강산 전체를 조망하는 벅찬 감정을 글로 옮겼다.



p29>>

처음 오른 비로봉 정상에서의 한 시간을 나는 잊어버릴 수 없다. 금강산의 장대함을 통해 산의 굳건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힘과의 관계를 몸이 저릿할 만큼 느꼈다고나 할.. 그런 느낌이었다.



해방 이전 조선에 자리한 주요 봉우리들. 백운대, 인수봉, 만폭동 계곡, 접선봉 등을 오르내리며 남긴 글을 생생하기 그지없다. 이즈미 세이이치는 조선의 명산을 등정하며 등산가와 인문학자로서의 꿈을 동시에 키워 나갔다. 남해를 건너 제주도에서 등정한 한라산에서 뜻밖의 조난을 당한 동료의 사고에 괴로워하지만,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굿거리를 통해 토속 신에게 실종자의 행방을 묻는 제주도의 무속 신앙에 놀라워하면서도,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학문적 폭을 넓혔다. 그가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제주도- 그 사회인류학적 연구>는 당시의 제주도와 도민들의 사회상, 민중 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후 이즈미 세이이치는 몽골, 대만 등 중앙아시아, 남태평양의 뉴기니, 남미를 방랑하며 등산가에서 탐험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 복무와 아시아의 식민지 탐방을 하면서 일제가 몰락하는 전조를 포착한다. 학계 강연과 기고를 통해 일본 사회에 경고를 하지만, 그의 발언은 무시되고 탄압받기 일쑤였다. 이 책에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을 비롯한 여러 식민지가 해방을 맞이한 기록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일본은 이전의 과오를 인정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바람이 일부 행간에 묻어 있다.



쇠창을 든 뉴기니 섬의 원시 부족들이 밤새 호전적인 춤을 추며 위협하는 가운데 의료 봉사지원을 하고, 떼 지어 날아다니는 박쥐들을 수렵하여 통으로 구워 먹는 파푸아인들의 식생이 흥미롭다. 페루에서 '교차된 손의 신전'을 발굴하고 안전한 박물관에 보관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을 기술한 몇몇 에피소드에 이르러서는 저자의 고고학, 인류학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이즈미 세이이치가 1967년 8월부터 산악 잡지 <Alp>에 연재한 기록은 1970년 6월에 마무리되었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 일본 대사관에 걸어서 도착한 기록이 끝이다. 당대의 지리/생태학을 반영한 탐험기이자 문화인류학적 회고록으로 남은 이들 기고문을 김영수 역자가 매끄럽게 번역하고, 소명출판에서 최근 출간한 저작물이 <머나먼 산들>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연재 마무리 5개월 후, 70년 11월 뇌출혈로 급서했다. 향년 55세, 지병도 없었기에 너무 이른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생이 더 길었다면, 해방 후 조선과 일본의 알피니스트 조직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며 탐험가, 인문학자로서의 소명을 다했으리라. 항시 그리워하고 꿈꾸던 히말라야와 아프리카 야생의 고원 등을 누비며 <머나먼 산들> 이후 다음 작품을 펴내지 않았을까 싶다.




#머나먼산들 #이즈미세이이치 #소명출판 #신간추천리뷰 #책리뷰 #서평단 #학문적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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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 이상하고 신비롭고 환상적인 어느 날 밤 인생그림책 31
볼프 에를브루흐 지음, 김완균 옮김 / 길벗어린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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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이 뒤바뀐 아이와 달밤 '산책'을 나간 적이 있나요?


밤이 깊을수록 어린아이 솔의 눈동자는 밝게 피어나요


엄마는 입을 벌린 채 곤히 자고, 아빠는 드르렁 코를 골아요


아이는 뒤척거리다 잠드는 걸 포기하고는 아빠의 긴 코를 잡아 흔들어 깨워요


아빠는 피곤해 뒤척이고 아이를 다독이지만, 아이의 눈길과 발자욱은 이미 밖을 향해 있어요


어쩔 수 있나요? 아빠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곤 뚜벅뚜벅, 밤 산책을 나가요


키다리 가로등 주위는 환하지만 그 바깥은 어둑하고 껌껌해요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는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피고, 여기저기 손짓을 해요


하늘 높이 뜬 둥근 달의 얼굴을 가리는 레드 미키마우스에 놀라고


도로를 횡단하는 거대한 흰 고릴라의 손을 잡고 걸어요

갈라진 도로의 틈을 잇는 강아지 등을 밟고 건너고


토끼와 앨리스가 펼치는 이상한 나라의 서커스를 구경해요


너무 신기해요, 아빠! 저거 보여요? 


하지만 아빠는 유모차 손잡이를 잡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어요


아쉬웠지만 집으로 돌아왔어요 호리병에 갇힌 토끼와 더 놀고 싶었지만 아빠가 너무 피곤해 해서


다음에 놀기로 약속했지요 집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난 눈앞이 흐려지더니 바로 잠이 들었어요


유모차에 탄 채로 말이에요 아빠는 그런 날 바라보더니 미소를 짓고는


서가에서 어느 그림책을 찾아서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읽어 주었답니다.


그 후로 어스름한 새벽에 눈을 뜰 때면 그 일이 떠올라 아빠에게 묻곤 해요


아빠, 오늘 우리 밤 산책 나갈까요?




- 볼프 에를브루흐의 <산책> 을 읽고..



#길벗어린이 #서평단 #그림책리뷰 #볼프에를브루흐 #새벽4시유모차산책 #누가내머리에똥쌌어 #산책 #아빠우리산책가요 #신간추천리뷰 #동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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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와 정원사 - 어느 괴짜 예술가의 치유하는 정원 그리고 인생 이야기
마크 헤이머 지음, 황재준 옮김 / 산현글방(산현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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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그에게 정원은 하나의 소우주이자 도피처였다. '봄비'라 불린 그는 정원에서 안식을 찾았고,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원 가꾸기는 글쓰기, 그림 그리기,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창작 활동이고,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마크 헤이머'는 초년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 친부는 '미친개'처럼 그를 가차 없이 헐뜯고 물어뜯기에 바빴다. 어머니는 그를 감싸주었지만 평생을 외로움과 병마와 싸워야만 했다. 그는 일찍이 집을 떠나 노숙자, 철도 노동자로 근근이 생활하다가, 미술을 공부하고 글쓰기에 매달렸다. 결국 '정원사'라는 천직을 찾은 그는 그간의 시행착오를 정리하고, 정원을 가꾸면서 머무르고 스치는 자연의 삼라만상을 관찰하고 기록하기 시작한다. <봄비와 정원사>는 그의 순간순간을 담은 명상록/회고록이자 사색과 성찰을 정리한 철학 이야기다.



그는 나이가 들었지만 마음은 어린아이의 그것, 동심으로 돌아갔다. 흙더미를 질주하는 개미 무리와 공중을 비행하는 벌들을 쫓으며 그들의 분주한 일상을 추적한다. 정원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제라늄, 라벤더, 라일락, 금강초롱 등 다종다양한 화초들을 보살피면서 자연의 신비함을 깨닫는다. 과거의 유년기를 떠올리며 친부의 폭력과 사무치는 외로움에 괴로워하지만 그에 집착하고 함몰되지는 않는다. 어릴 적 깡통 전화, 백과사전, 들고양이, 민달팽이 등을 다루고 어울리던 추억을 재구성하면서 그 안에 숨은 즐거움, 기쁨, 환희의 빛나는 감정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마크 헤이머는 소년 시절의 자신을 '' 라 칭하며 거리를 둔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본다. 과거의 기억을 헤매다 어쩔 수 없이 고통, 어두움의 늪에 빠지지만, 오래 허우적대지 않고 빠져나와 지금의 '나'로 돌아온다. 음영이 짙은 '자아'를 버리고 현재의 '무아'로 돌아오는 지난한 과정은 그가 평생을 두고 연마하고 훈련한 것이었다. 그는 평생의 반려자 '페기'에게 헌신하고 자식들을 양육하며, 지난날 친부와 같은 무책임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늙어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원을 몸소 가꾸며, 갈수록 쇠잔해지는 심신의 평안을 찾고 회복을 꾀한다.



마침내 그는 정원 속에서 삶을 즐기고, 순간순간 피어나는 기쁨, 슬픔, 외로움과 고통 등 온갖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깨달은 듯하다. 독자인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양옥집 정원에 깔린 잔디밭에 누워 뒹굴다가, 가쁜 숨을 내쉬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코끝을 간지럽히고 찌르던 초록 잎새와 간혹 뛰어오르던 메뚜기며 여치의 날갯짓에 깜짝 놀라던 기억. 단풍나무 아래 묻혀 있던 매미 유충 서넛을 발견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 관찰하다가 다시 파묻어 주었던 그 초여름 오후. 늦여름 매미 소리 요란하던 그 정원과 은행목 가지마다 얽힌, 무당거미가 쳐놓은 방사형 거미줄을 제거하던, 목덜미에 땀이 흐르던 아버지의 뒷모습. 매년 아버지와 함께 양지바른 정원에 연초록 잔디를 심던 그 기억이 선명히 떠올라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다시 정원을 가꾸게 되는 행운이 내게 찾아온다면, 마크 헤이머의 <봄비와 정원사>를 서고에서 꺼내 다시 읽어보리라. 분명 내게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노년의 삶을 즐기는 지혜와 정원을 가꾸는 세심한 노하우를 들려줄 것이다.




#산현글방 #봄비와정원사 #마크헤이머 #황재준 #정원가꾸기 #서평단 #신간추천리뷰 #사색사유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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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흐른다 (특별판 트레싱지 에디션) -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 FIKA(피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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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바다 곁에 머물고 싶다. 보드라운 해변에 앉아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잔잔해진다. 가까이 코발트빛 바다에서 물장구치고 헤엄치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때로는 풍덩, 뛰어들어 더위를 식히곤 한다. 하지만 바다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 바짝 다가가는 건 두려워진다. 헤엄쳐서 가는 건 엄두도 안 나고 요트나 배를 타고 간다 해도 먼 거리 항해는 갈수록 삼가는 마음이 더해진다.

바다는 예측불허, 변화무쌍한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품고 있다. 파도는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곧이어 내리막이 찾아와 짜릿한 스릴과 공평함을 선사한다. 바다는 우리네 삶과 닮았다. 혹자는 산이 인간의 생을 닮았다 하지만, 바다는 삶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 있고 완벽함을 지향한다. 그간 바다에 대해 막연하게 품고 있던 생각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정리한 책이 있다.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 이번에 10만 부, 50쇄 기념 리커버 트레싱지 에디션이 새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바다와 인간의 삶의 관계를 돌아보고,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 그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냈다. 바다에서 마주치는 밀물과 썰물, 섬, 등대, 방파제, 빙하 등을 주제로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공감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 10만 부, 50쇄 기념 리커버 트레싱지 에디션

어릴 적 어느 잡지를 뒤적이다 시선이 머무른 사진이 있다. 어느 젊은 부부가 망연히 바다를 바라보는 흑백 사진. 최근 검색을 통해 바다에 뛰어들려는 남편을 제지하는 아이 엄마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1954년 4월 2일, LA Times의 사진 기자 John Gaunt 가 Hermosa Beach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바닷가의 비극>이라 명명된 이 사진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사진이 품은 사연은 당혹스럽고 잔인하기 그지없다. 


* 관련 링크>>

https://rarehistoricalphotos.com/tragedy-by-the-sea-backstory/



부부의 19개월 된 아기는 해변에서 모래 놀이 중이었다. 찰싹이는 파도가 모래를 적시는 가운데, 갑자기 돌풍이 불었는지 아니면 인접한 물살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는지.. 거센 파도가 아이를 덮쳤다. 가까이 서서 지켜보던 부부가 미처 구할 새도 없이 아이는 파도에 휩쓸려 그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닥쳐온 비극에 발을 동동거리고 입을 막은 부부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주변에 구조를 요청할 인력도 없었고, 금세 평온해진 바다에게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으니.. 멀리서 보기에 바다는 천국과 같이 반짝이고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 그 안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짙어진다. 심해는 칠흑과 같이 어두컴컴하고 아득하다. 미지의 불빛이 어른대는가 싶어 다가가면 비죽한 이빨을 드러낸 괴어가 달려들까 섬뜩하다. 휘몰아치는 조류에 휘말리면 아득한 심연이 눈을 뜨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바다는 이처럼 삶과 함께 죽음을 품고 있다. 인간의 어떤 불굴의 노력과 의지도 단숨에 꺾을 만한, 실낱같은 운명을 집어삼킬 바다의 블랙홀은 잠시의 고통을 선사하고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 앞으로 곧장 데려간다. 우리는 바다와 삶의 역경에 직면하여 겸손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 원숙해질수록 그 파도에 맞서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순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물침대처럼 잔잔하다가는 포효하며 으르렁대는 변덕스러운 파도에 몸을 맡기고 정처 없이 흐르다 보면 어딘가에 당도할 것이다. 그곳이 온갖 배가 모여드는 찬란한 미항일 수도 있고, 황량한 무인도일 수도 있다. 표류하다가 근처를 지나는 배의 눈에 띄어 구조될 수도 있으리라. 언젠가는 명이 다해 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수장될 수도 있겠지. 



그 끝이 어떻든 우리는 지금 눈앞에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패기 넘치게 맞설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숨은 찰 것이고 기력은 빠르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한낱 인간일 뿐이고 삶은 매 순간 다른 파도로 우리를 휘감으며 어딘가로 데려간다. 우리는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마치 우리네 삶을 투영하는 듯한 상념에 젖는다.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는 바다와 우리 삶에 대한 철학적 혜안을 담고 있다. 


붉은 아치형 창문 너머 푸른 바다가 그려진 책 표지를 덮고 다시금 1954년의 그 바다를 바라본다. 

그 후로 부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신들 그리고 바다를 끝내 용서할 수 있었을까. 어디든 육지 끝에는 너른 바다가 존재함을, 어디로든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지는 않았을까. 자신의 아이를 집어삼킨 저 바다가 자신들의 삶과 닮았음을 깨닫고, 유유히 흐르는 대로 몸과 마음을 놓아주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했을는지.. 어떻든 흐르는 대로 삶을 살아냈을 그들의 찢어진 마음을 짚어보고 흉터 자욱을 조심스레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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