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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ㅣ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노벨문학상이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인간사를 냉철하게 꿰뚫는 무언가를 가진 '장편 소설' 혹은 '시'의 영역이다. 그런데 최근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의 개정판을 발견하며 단편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녀의 글들이 일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에 주목한다는 사실을 여러 리뷰와 인터뷰를 통해 접하곤 꽤나 놀랐다. 보통 노벨문학상이 주는 이미지는 '난해하다' 혹은 '어렵다'인데, 과연 그녀의 소설들은 어떨지 궁금해서, 웅진지식하우스에 번역되어 있는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행복한 그림자의 춤>, <런어웨이> 중 제목이 가장 끌리는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선택해 읽었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에 수록된 대부분의 소설은 40쪽 내외의 짧은 길이고, 표제작만 약 80쪽 가량 된다. 그래서인지 매일 하나씩만 읽자라고 결심했는데, 생각보다 하나를 읽을 때 걸리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놀라기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억>과 <곰이 산을 넘어오다>, 두 편이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 두 편이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느껴졌고, 그 형식이 마음에 들었다. <기억>은 '메리얼'이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노년의 메리얼은 젊었을 적 자신의 남편의 장례식에서 왔던 의사와의 만남을 차근차근 떠올리고, 그 만남이 자신이 독신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버팀목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이 약 40쪽에 걸쳐 전개되어 있는데,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고 분석하는 노년의 메리얼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마지막으로 수록된 작품인데, 마지막이라 그런지, 아니면 소설 내용 자체 때문인지 시선을 끌었다. 사건은 노년의 여인 피오나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시설에 들어가고, 자신의 남편인 그랜트의 존재를 잊고 그 곳에서 만난 오브리라는 남성에게 '여보'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예전에 바람 핀 것에 대한 복수로 시작된 장난은 아닐까, 만약 이 상황이 지속되면 피오나와 오브리가 함께하는 것이 아내를 위한 일인가 등 끊임없이 고민하던 그랜트의 고민과 회상이 소설 대부분을 채운다. 스포일러가 될까 줄거리 소개는 여기서 마치지만, 생각보다 사소하게, 때로는 깊게 고민하는 그랜트의 모습을 보며 노년 부부에게 '사랑'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소설이다.
나는 <기억>과 <곰이 산을 넘어오다>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지만, 다른 리뷰들을 보면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단편에 대한 호감을 표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입맛에 따라 재밌는 소설을 발견하고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다. 때때로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나 전혀 무관해 보이는 제목 선정에 궁금해질 때가 있었는데, 번역의 한계라 느껴진다. 나는 특히 '곰이 산을 넘어오다'라는 제목이 왜 붙었는지 궁금해서 영어로 구글링을 해보았더니, 알츠하이머를 인생이라는 산에서 갑작스레 내려오게 되는 곰의 모습에 비유하기 위해 이런 제목을 붙였다는 설명과 함께 실제 해당 표현이 가끔 쓰이는 영어 표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한국어로 읽든, 영어로 읽든, 가볍게 여러 생각을 하며 읽기 좋은 단편집이라, 조만간 앨리스 먼로의 다른 단편집도 찾아 읽을 예정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