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게 갈린 얼음처럼 식탁 위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감돌았다]10

밍이 갑자기 중국어를 사용했다. 다른 사람 없이 둘만 있을 때, 그들은 항상 한국어로 대화했다. 스무 살 때부터 그래왔다. 그건 둘 사이에 내재된 레지스탕스의 윤리강령 같은 것이었다. 어떤 외부,어떤 타인으로부터도 분리된 둘만의 감옥,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맹목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암시. 그러나 밍의 중국어는 가차없는 현실을 상기시켰다. - P48
뭘 먹다 왔는지 입가가 조금 번들거렸다. 오 분 정도 화장실에 다녀온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그가 씩 웃었다. - P49
사랑하는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은 아득한 공포로 다가왔다. 주인공의 죽음이 묘사된 맨 뒷장을 조바심치며 미리 들춰본 느낌. 옥영의 막연한 예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 P52
병명을 듣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의 고통이 적어도 엄살은 아니었음이 증명된 셈이었다. 그는 실체 없는 불안에는 도저히 설득당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 P61
유지는 오래도록 궁금했다. 왜 그는 사라지고 말 것을 선물했을까.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순간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리지만, 짧고 서툰 첫번째 연애편지가 기억의 서랍 맨 아래칸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처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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