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열세개의 창이 달린 집

목 끝까지 블라우스 단추를 꽉 채우고 도수 높지 않은 날렵한 뿔테안경을 걸친 품이, 열정적인 커리어우먼의 분위기를 풍기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28

첫인상과 달리(...) 그는 반성했다.  공연한 선입견 때문에 오판했다. 오직 객관적 사실만을 믿어야 했다. 의지할 대상은 팩트뿐이었다. 주관적 감정을 개입시켜 한 인간을 판단하면 자칫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위험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좀처럼 고치지 못하는 습성이었다. - P130

언제든 제 발로 떠날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빼도 박도 못하고 한 곳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다는 절망감만큼 끔찍한 건 또 없을 거였다. - P134

타인의 입을 통해 확인할 때, 현실의 고통은 더 가혹하게 일깨워지는 법이었다. - P137

여자는 얄따란 티슈를 한 장 뽑아 눈언저리를 지그시 눌렀다. 울음 속으로 도망가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한 동작이었다. - P148

그늘진 골짜기에서 자라난 2월의 꽃나무처럼 우울한 인상이 도드라졌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본인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소년이랄 수도 없고, 아직 청년이라 부르기도 모호한 나이.
(...)
소년은 종종 위험하다. 참는 게 더 나은 한 순간을 참지 못한다.
(...)
묻는 말에만 대답했으며, 말수가 적고 느렸다. 가장 나쁜 유형의 참고인이었다.
(...)
엉뚱한 소리를 마구 늘어 놓는 축보다 한결 골치 아팠다.
(...)
명문대 의대생이라는 학벌, 허여멀끔한 외모, 돈 많은 아버지까지 두루 갖추었으니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많을 터였다. 세상은 공평한 곳이 아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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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말야

엄마가 말하고는 했지.
"네가 추우면 나도 추워"
맞아.
아니.
"네가 추우면 나는 더 추워."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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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게 갈린 얼음처럼 식탁 위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감돌았다]10


밍이 갑자기 중국어를 사용했다. 다른 사람 없이 둘만 있을 때,
그들은 항상 한국어로 대화했다. 스무 살 때부터 그래왔다. 그건 둘 사이에 내재된 레지스탕스의 윤리강령 같은 것이었다. 어떤 외부,어떤 타인으로부터도 분리된 둘만의 감옥,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맹목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암시. 그러나 밍의 중국어는 가차없는 현실을 상기시켰다.  - P48

뭘 먹다 왔는지 입가가 조금 번들거렸다. 오 분 정도 화장실에 다녀온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그가 씩 웃었다. - P49

사랑하는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은 아득한 공포로 다가왔다. 주인공의 죽음이 묘사된 맨 뒷장을 조바심치며 미리 들춰본 느낌. 옥영의 막연한 예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 P52

병명을 듣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의 고통이 적어도 엄살은 아니었음이 증명된 셈이었다. 그는 실체 없는 불안에는 도저히 설득당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 P61

유지는 오래도록 궁금했다. 왜 그는 사라지고 말 것을 선물했을까.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순간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리지만, 짧고 서툰 첫번째 연애편지가 기억의 서랍 맨 아래칸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처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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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큐멘터리:연출된 다큐멘터리
은근 흥미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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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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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키울 수 없어 자신을 레고 인형처럼 작아졌다 상상하고 울창한 숲을 상상하며 압도당하는 그녀의 상상력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그 상상력이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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